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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5)] ‘문자 권력’을 백성에 돌려주기 위해 한글 창제 나선 세종 

신하들 반발 예상하고 10년간 오롯이 혼자 한글 개발 작업 

비밀 유지 위해 왕자와 공주들의 도움 받기도
애민사상 실천… 극한 반대에도 한글 보급 추진


▎한문으로 된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을 우리말로 옮긴 [훈민정음언해]. 세종이 직접 쓴 서문과 훈민정음 28자를 소개한 본문만을 한글로 번역해 간행했으며 모두 15장이다. 세종 때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1459(세조 5)년 간행된 목판본 [월인석보] 권1의 맨 앞에 실려 있다. / 사진:서강대 로욜라도서관
"언문을 제작하신 것은 지극히 신묘해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용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들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심되는 바가 있어 감히 간곡하게 열거하오니 부디 살펴주시옵소서.”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 의견을 피력한 집현전 학사 7명의 집단상소 첫 문장이다. 세상에 이런 극찬이 없을 만큼 잔뜩 추켜올렸다가 다만 사소한 잘못을 지적하는 척하는데, 방점은 당연히 칭찬 아닌 지적에 찍혀있고, 거론하는 잘못도 보통 잘못이 아니다.

먼저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살펴보자. 가장 직책이 높았던 부제학 최만리가 총대를 메고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등 7명이 이에 따랐다. 당시 집현전 정원이 20명이었으므로 전체의 35%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인원이다.

상소 날짜는 1444년 2월 20일이다. 세종이 또 다른 집현전 학사인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이선로·이개와 돈녕부 주부인 강희안 등에게 한자 사전인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라는 어명을 내린지 나흘 후다.

1443년 12월 존재 드러낸 훈민정음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해시계 앙부일구(복제품)를 살펴보고 있다. 세종은 국가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신분에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를 등용했다. 최고 발명품인 한글을 비롯해 수많은 과학기구를 만들고 기술을 발전시켰다. / 사진:이훈범
이 대목에서 독자들도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 사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신하들도 집현전 학사고, 왕의 뜻을 거슬러 한글 보급에 반대하는 신하들도 집현전 학사인 것이다. 그 수도 7대5로 엇비슷하다. 당시 돈녕부 소속이었지만 나중에 집현전 직제학까지 역임하고 [훈민정음] 해례와 [용비어천가] 주석에까지 참여했던 강희안까지 합치면 7대6으로 더욱 팽팽해진다. 김문의 경우 처음에는 [운회]의 언문 번역이 가능하다고 말했다가 상소파로 돌아선 점까지 고려한다면 묘한 내부 기싸움마저 느껴진다. 군주의 자문기관인 집현전이 반반으로 갈라졌다는 얘기다.

굳이 차이를 지적하자면 집단상소파는 대체로 집현전 고위직들이며, 운회 번역파는 중간급 실무진이 다수라는 점이다. 고령층일수록 보수적이기 쉽고 젊은층이 보다 개혁적이 된다는 일반적 잣대로 본다면 이상할 게 없는 구도다. 게다가 세종은 동궁과 진양대군(수양대군), 안평대군에게 [운회] 번역의 지휘감독 임무를 맡기고 번역팀에 상도 후하게 내리는 등 힘을 실어줬다. 그러한 왕의 권위에 도전하려면 어지간한 연륜으로는 어렵다는 게 당연한 이치다.

세종은 한글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반발에 부딪힐 것이라는 예상을 한 것 같다. 10년에 달하는 한글 창제 과정이 지극히 비밀리에 이뤄졌으며, 그 대부분을 세종 혼자 힘으로 해냈다는 것이 방증한다. 한글뿐 아니라 과학과 농업, 천문지리, 철학, 심지어 경제와 재정 분야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를 크게 업그레이드시킨 세종은 기계, 기구의 발명은 물론 제도 정비나 개혁에 일조한 인물들을 세세히 밝혀 기록하게 했다. 신분의 귀천도 없었다. 장영실처럼 노비 신분이던 인물 역시 실록에 이름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훈민정음의 경우는 다르다. 창제 때까지 어느 누구의 이름도 거론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날짜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왕이 직접 만들었노라고 공표한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그 글자가 옛글자를 본떴으며 초성과 중성, 종성으로 나뉜 것을 합쳐서 글자를 이루었다. 한자와 항간에 쓰이는 우리말에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간단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다.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른다.”([세종실록]1443년 12월 30일자 기사)

집단상소로 반대 의견 낸 학사들


▎훈민정음 창제를 알리는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자 기사.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이후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뀔 때까지 훈민정음에 대해 가타부타 어떠한 언급도 없다. 그러다가 2월 16일 세종이 [운회]의 언문 번역을 명하자 나흘 만에 반대 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세종이 갑작스럽게 한글 창제 사실을 공표한 뒤 신하들이 어떠한 반응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아무리 극비리에 창제 작업을 추진했다 하더라도 10년 세월 동안 비밀이 완전히 지켜질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왕이 말을 하지 않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막연하게 감만 잡고 있던 신하들이 세종의 발표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기왕 만든 것이야 어쩌겠나, 두고 볼 수밖에’라고 세 달 가까이 지켜보고만 있던 신하들이 [운회] 번역으로 훈민정음이 실제로 활용되기에 이르자 부랴부랴 반대에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왕의 숙원사업에서 소외된 일부 집현전 학사들이 왕의 부름을 받은 동료 학사를 시기해 반대로 돌아섰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터다. 당초 운문 번역이 가능하다고 했던 김문이 번역 작업에 참여하도록 명을 받았다면 불가로 돌아섰을까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최만리 등의 상소는 이른바 국가 최고 석학이라고 자부하는 집현전 학사들의 집단 상소치고는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 여섯 가지의 불가 이유를 들고 있지만 논리가 치밀하지 못하고 성긴 구석이 있다. 부랴부랴 급조한 탓이다. 첫째로 ‘중국에 대한 배신’이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글자 형상이 중국의 옛 글자를 모방했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당시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를 오늘날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이는 도가 지나치다. 조선 백성이 그때까지 한자로 글을 써왔던 것은 우리말을 그대로 옮길 글자가 없었던 탓이지 중국을 흠모해서가 아니다. 우리 고유 문자가 있는데 명나라가 그것을 못 쓰게 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명은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유학생을 파견하고 싶다”는 조선의 요청에 “중국어를 못해도 통역관이 있어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굳이 낯선 땅에 유학할 필요가 있는가”라며 만류하기도 했다.([역대요람] 조경남)

그런데도 부끄러움 운운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토록 중화를 흠모하고 존숭한다면 글자뿐 아니라 말까지 중국어를 쓰자는 중국어공용어론을 전개했어야 옳다. 다른 것은 다 중국을 따르면서 왜 말만 중국어를 안 쓰고 우리말을 고집하느냐는 말이다.

둘째 논리는 동어반복이면서 한층 더 깊어지는 억지 주장이다.

“옛부터 지방의 말에 따라 문자를 만든 예가 없고, 오직 몽고·서하·여진·일본과 서번만 글자를 갖고 있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므로 논할 게 못 됩니다. (…)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니 (…)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중국에 대한 배신’이 첫째 반대 이유


▎한자사전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라는 세종의 명이 실린 [세종실록] 1444년 2월 16일자 기사.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서하는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나라이며, 서번은 오늘날 티베트다. 자신들이 우습게 여기는 그런 오랑캐조차 가지고 있는 제 나라 문자를 갖지 못한 것을 먼저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도 오랑캐가 되지 않으려면 있는 문자도 다 버리고 중국 한자를 써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다. 게다가 문자를 만든 예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럼 몽골이나 일본, 티베트 같은 나라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무리 중화가 중심이 되는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무지렁이도 아니고 조선 최고 석학이라는 사람들이 말이다.

셋째는 억지 주장을 하다 보니 자기모순에 빠진 것을 깨달은 뒤 모순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내놓은 또 다른 억지다. 하는 말과 쓰는 글이 다르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사용된 편법이 우리나라에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한 속말이나 중국 한자를 빌어 사용했기에 아전이나 노비들이 익히려 해도 먼저 글을 읽어 문자를 알아야 했으므로 (…) 학문이 흥기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 이두는 수천 년이나 되어 폐단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그것을 고쳐 따로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만드시나이까. (…) 언문으로 족히 입신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성리학을 공부하겠습니까.”

이두가 아니더라도 신라 때는 우리말로 부르는 향가를 표기하는 방식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향가를 하나 보자.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이것은 그 유명한 ‘처용가’의 앞부분인데,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서울 밝은 달에 밤늦도록 노니다가 들어와서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한자의 뜻과 음을 편리한대로 차용해 표기한 것이다. 서울, 달, 밝다, 밤, 놀다, 넷 등 명사와 동사 등은 한자 뜻을 찾아 쓰고 늦게의 ‘게’와 놀다가의 ‘다가’, 들어와서의 ‘서’, 다리가의 ‘가’, ‘이어라’처럼 조사들은 음을 빌려 쓴 식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해석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이두(吏讀)의 경우 ‘관리(吏)의 읽기(讀)’라는 뜻 그대로 관리들이 법률과 행정 문서를 기록하는 데 많이 쓰였다. 훈독을 주로 하는 향가와 달리 음독을 하고 조사를 첨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자주 사용되던 이두어로 ‘등을(等乙 들을)’, ‘을랑(乙良 ~하거들랑, ~하면)’, ‘갑절(甲折)’ 등이 있다. 이밖에 ‘~이(~伊)’, ‘~에(~厓)’처럼 조사를 달거나 ‘거칠부(居柒夫)’나 ‘혁거세(赫居世)’ 등과 같이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표기했다. 한문 문법은 알지 못하고 우리말을 표기할 방법은 없으니 적당히 알고 있는 한자 중 우리말 소리에 가까운 자들을 골라 쓴 것이다. 오늘날 해석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에도 오역 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조차 상소 내용처럼 한자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쓸 수 있으니 한자를 모르는 민중은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라며 강하게 반발


▎김학수 화백이 그린 집현전 학사도. / 사진:이훈범
그런데도 이두로도 충분한데 뭐 하러 ‘비루하고 상스러우며 무익한 글자(鄙諺無益之字)’를 또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한글의 필요성 여부를 떠나 왕이 직접 만들었다는데, 비루하고 상스럽고 무익하다니… 세종이 폭군이었다면 참수를 면하지 못할 ‘막말’ 수준이었으니, 용감한 수준을 넘어 무모할 정도다.

셋째까지가 원론적 반대 이유라면 넷째는 세종의 논리를 반박하는 것이다. 왕의 논리를 부정하려면 정치한 반대 논리와 적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텐데, 논리와 근거 모두 초라하고 빈곤할 따름이어서 안타깝기조차 하다.

“‘사형 또는 옥살이를 할 수 있는 범죄 기록을 이두로 쓴다면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언문으로 쓰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쉽게 이해해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오나…”

너무나 당연한 내용 아닌가. 우리가 외국에 나가 어떤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됐다고 해보자. 그 나라 말을 몰라 기소 사실과 진술을 기록한 경찰 조서를 읽을 수 없다면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되지 않겠나. 게다가 내가 잘못한 사실이 없는데 누명을 쓰고 있다면 어떻겠나. 당시 조선 무지렁이 백성들은 어려운 한자를 몰라 매일같이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외국도 아닌 제 나라에서 말이다. 때로는 수령이나 지방 아전도 한자에 밝지 못해 기록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권력 남용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런데도 상소에는 ‘그러나’라는 접속부사가 붙는다. 그 다음 반박 논리는 참으로 가당치 않다.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사와 소송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이두를 아는 죄수가 자신의 진술 기록을 읽어 허위인 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해 인정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는 글을 몰라서 원통함을 당하는 게 아님이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언문을 쓴다한들 무엇이 다르오리까.”

사법 체계에서 억울함이 나오는 것이 글자와 무슨 관계냐는 타박이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얘기라 할 수 있다. 정의로운 판관만 있다면 글자와 무관하게 정의로운 판결과 형집행만 존재할 뿐일 터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소자 스스로 모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정의롭지 못한 판관이 많고, 그들이 정의롭지 못한 판결을 내리기가 백성이 글을 모르는 까닭에 더욱 쉬워진다는 현실 인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말과 글이 같은 중국에서도 억울함이 많은 것은 중국에 유독 법을 무시하는 폭군이나 학리가 많아서이겠는가. 수많은 중국 백성이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해 읽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하물며 말과 글이 다른 조선 백성은 그 어려움이 얼마나 더 컸겠나.

이 부분은 최만리 등의 주장보다 다른 의미에서 가치를 갖는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동기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최만리 등의 상소가 나오기 전까지 훈민정음에 관련된 기록은 ‘왕이 만들었다’와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했다’가 전부였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첫머리 정도는 외우고 있는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는 상소가 올라온 지 2년 7개월 뒤인 1446년 9월에서야 ‘훈민정음 어제 서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한 가지만이 아닌 여러 가지 복합적 동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세종이 가장 먼저 염두에 뒀던 이유를 최만리 등의 상소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그것은 백성이 글자를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애민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나아가 문자라는 권력을 백성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부분은 따로 짚어볼 가치가 있으므로 우선은 반대 상소로 돌아가기로 하자. 다섯째 반대 이유는 한마디로 한글 창제 과정에서 자신들이 소외된 데 대해 불만이다.

“(언문 사용이)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백료에 이르기까지 논의하고 100세대가 지나더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는 연후라야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갑자기 관리 몇 명으로 가르쳐 익히게 하고, 옛사람이 이룩한 운서를 가볍게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붙여 인쇄해 급하게 반포하려 하시니 후세에 뭐라고 일컫겠습니까.”

억지 주장과 모순투성이였던 집단상소문


▎한글 반포에 반대하는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 7명의 집단상소가 실린 [세종실록] 1444년 2월 20일자 기사. /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이것 역시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결국 하지 말자는 것과 다른 얘기가 아니다. 그럴 것을 잘 알았기에 세종이 더욱 비밀리에 한글 창제 작업을 추진한 것이었다. 100세대가 지나도록 한 점 의혹이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도 한글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흉년이 거듭되고 있는 시기에 다른 급한 일도 많은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며 군주를 넌지시 꾸짖고 있다.

마지막 여섯째 반대 이유 역시 소외에 대한 투정이다. 겉으로는 세자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듯하지만, 결국 왜 왕실에서만 작당해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것이다.

“동궁이 비록 덕성이 있다 해도 아직은 학문에 몰두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유익하다 하더라도 육예(六藝)의 한가지일 뿐입니다. 언문이 정치하는 도리에 하나도 유익함이 없는데 그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시간을 허비해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데 손실이 있습니다.”

세종은 한글 창제 작업에 세자를 비롯한 왕자들과 공주를 참여시켰다. 신하들을 시키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금의 음운학 지식에 비해 신하들의 학문은 가볍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기에 최만리 등은 어쭙잖은 반대를 하고 나섰다가 세종에게 혼쭐이 나고서도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극비리에 작업을 한 뒤 한글을 완성하고 나서 신하들에게 알리려던 세종의 심모원려가 돋보이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인지와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도왔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가능성이 높지 않다. 그들이 제작 단계에서 참여했다면 비밀 유지가 쉽지 않았을 테고, 최만리 등이 1444년까지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친한글파 집현적 학사들은 창제 이후 훈민정음의 교육과 활용을 위해 연구를 시켰을 뿐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한 것이 신숙주다. 예컨대 세종은 신숙주를 중국 요동 땅에서 유배 중이던 중국 학자 황찬에게 열 번 이상 보내 음운에 대한 궁금증에 답을 알아오도록 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어명을 받들어 처음 요동에 간 해는 한글이 완성된 지 4년 후인 1447년이다. 1443년 한글이 완성됐을 때 신숙주는 과거 급제한지 고작 2년 된 신예 학자일 뿐이었다. 한글을 만드는 데 보탤 만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성삼문도 마찬가지였다.

창제 과정 왕실에서 소외된 데 따른 투정도

왕자 중에서 세자인 향(훗날 문종)과 수양대군(훗날 세조), 안평대군 등이 부왕인 세종을 도와 머리를 맞댔다. 또한 정의공주가 도왔다고 알려진다. 정의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 사이에서 태어난 8남 2녀 중 둘째 딸로, 장남인 문종의 동생이자 수양대군의 누나다. 실록에는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역산에 밝아 세종이 사랑했다”는 정도만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정의공주가 출가한 죽산 안 씨의 족보인 [죽산 안씨 대동보]에 “세종이 대군들에게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풀어보라고 했으나 대군들이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해 세종이 다시 정의공주에게 하명했는데 정의공주가 그것을 풀어 올리니 세종이 극찬하고 상으로 노비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엇을 어떻게 풀었는지 구체적 내용이 전하지 않는 게 아쉽다. 사사로운 기록이다 보니 약간의 과장이 있을 수 있어 연구 자료로서 가치도 떨어진다. 하지만 세종이 한글을 만들 때 왕자와 공주의 도움을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종은 정의공주에게 훈민정음을 민간에서 시험해보는 임무도 맡겼으며, 공주는 시험 결과를 세종에게 보고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세종은 최만리 등의 상소를 읽고 대노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상소의 내용이 논리적이기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지나치게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집단 상소에 서명한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조목조목 묻는다.

“너희들은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글에 위배된다’고 하는데, 설총의 이두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제작한 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고 뭐겠느냐. 언문 역시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은 그르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늙어 세자에게 국가 일을 맡겼으니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참여해 결정함이 마땅한데 어찌 언문이라고 예외가 있겠느냐. 세자를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에게 일을 맡겨야 하겠느냐.”

상소 내용 중 하나라도 설득력 있는 게 있었으면 세종이 이렇게 질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최만리 등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자 세종은 버럭 화를 내고야 만다.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한두 가지 물어보려 했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니 너희 죄를 벗기 어렵다.”

한글 보급에 ‘진심’ 세종… 상소에 이례적 ‘버럭’

세종은 최만리 등 7명을 의금부에 가두라 명한다. 하지만 다음날 정창손과 김문을 뺀 모두를 풀어줬다. 김문은 “언문 번역에 불가할 게 없다”고 하다가 나중에 말을 바꾼, 다시 말해 임금을 속인 죄였다. 의금부가 장 100대와 강제 노역 3년에 처하라는 의견을 냈지만, 세종은 장 100대를 벌금으로 대신하게 감해줬다. 정창손은 파직됐는데 괘씸죄가 더해진 탓이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 이유였다.

“[삼강행실]을 반포한 뒤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그의 자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해야 모두 본받겠습니까.”

앞서 세종이 그에게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해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한 것을 비꼰 것이다. 세종은 정창손에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라고 비판한다. 용속하다는 뜻은 ‘평범하고 속되다’는 뜻이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이 그렇게 순화했을 뿐 세종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심한 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정창손은 말과 글이 다른 현실의 덕을 본 셈이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 책을 몇 권 펴냈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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