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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프리고진 반란, 푸틴 정권 종말의 시작인가 

푸틴 체제는 견고하다는 러시아 국민의 믿음이 붕괴됐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푸틴의 요리사’ 프리고진의 바그너그룹 반란 막았지만 모스크바 접근까지 허용
러시아 엘리트가 2024년 대선 노리는 푸틴 미래 어떻게 보느냐에 정권 향배 달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바그너그룹 무장반란 진압 후 “내전을 막았다”며 군인들을 치하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러시아는 의외의 취약성을 노출했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을 벌이던 1917년에도 등에 칼을 꽂는 공격이 가해졌다. 군대와 국민의 등 뒤에서 이루어진 음모와 이전투구가 군대의 엄청난 동요와 와해, 국가 붕괴, 광대한 영토의 상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전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에서 또 다른 분열이 생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국민과 조국을 지킬 것이다.”

민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과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무장 반란으로 집권 이후 최대 위기에 몰렸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6월 24일 대국민 연설에서 이렇게 장담했다. 푸틴 대통령이 지적한 1917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대격변의 해로 불린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제정 러시아에선 빈곤과 전쟁 등에 지친 노동자와 병사들이 ‘2월 혁명’을 일으켜 300여 년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렸다. 그 2월 혁명으로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후 혼돈과 생활고가 계속되자 같은 해 11월 공산주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1923년까지 볼셰비키의 적군(赤軍)과 반혁명파인 백군(白軍)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적군의 승리로 소련이 건국됐다. 푸틴 대통령이 1917년을 언급한 것은 1차 대전을 치르는 와중에 러시아군 내부에 분열이 있었고,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러시아 국민의 단합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바그너그룹 용병들과 프리고진의 반란을 1917년 병사들의 봉기와 비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처형당했다. 푸틴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을 니콜라이 2세에 대비시키는 우를 범한 셈이다.

푸틴 대통령이 바그너그룹 용병들과 프리고진의 무장반란 사태 이후 지난 23년간 유지해온 권좌를 그대로 유지할지 여부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킨 프리고진은 푸틴의 충실한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자신과 같은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인 프리고진과 30여 년간 인연을 맺어왔다. 청소년 시절 절도와 강도, 사기 등 혐의로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들락거렸던 프리고진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 1990년대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 선상 식당 ‘뉴아일랜드’를 운영하는 등 요식업에서 두각을 보였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었던 푸틴이 이 식당을 자주 방문했다. 이후 푸틴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프리고진은 크렘린궁의 각종 행사에 음식 공급 계약을 맺었다. 이 때문에 ‘푸틴의 요리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프리고진은 2013년 민간 용병기업인 바그너그룹을 스페츠나츠 지휘관(중령) 출신인 드미트리 우트킨과 공동 설립했다. 바그너란 명칭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좋아했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에서 유래한 것으로, 공동창립자인 우트킨의 콜사인(호출부호)이었다고 한다.

프리고진과 쇼이구의 파워게임


▎바그너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은 푸틴의 권좌를 위협하는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살아남았다. / 사진:콩코드그룹 영상 캡처
바그너그룹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크름)반도를 침공해 강제 병합할 때 상당한 역할을 했다. 또 시리아, 모잠비크, 리비아, 중앙아프리카 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인권 유린과 잔학 행위를 자행하며 악명을 얻었다. 러시아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도 참전해 러시아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바그너그룹은 또 죄수들을 대거 전투 요원으로 모집했는데, 죄수 전투 요원이 4만 명에 달하기도 했다. 프리고진은 용병들을 투입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전략요충지인 바흐무트를 장악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프리고진은 국방부와 군 지휘부가 탄약과 보급품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등 상당한 갈등을 보였다.

이후 프리고진은 바흐무트를 러시아 정규군에 넘겨주고 바그너그룹을 후방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다 러시아 국방부가 6월 10일 바그너그룹 등 모든 비정규군에게 7월 1일까지 공식 계약을 체결하도록 명령하자, 프리고진은 자신과 바그너그룹을 통제하려는 속셈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와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프리고진은 반란을 일으켰다.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이 자신이 아닌 군 수뇌부의 손을 들어주자 ‘배신’의 칼을 뽑은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자신의 손발이었던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 용병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해줬지만 결국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왜 배신자를 제거하지 못했나


▎푸틴이 쇼이구(오른쪽) 국방부 장관의 손을 들어주자 프리고진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 사진:AP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의 또 다른 위기는 프리고진의 무장 반란 계획을 이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를 막지도 못했고,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프리고진이 무장 반란을 일으키기 최소 이틀 전 반란 계획 정보를 입수했다면서, 당시 프리고진은 쇼이구 국방장관과 우크라이나 전쟁 총사령관인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이 우크라이나 국경 남부 지역을 방문하는 때를 노려 생포하려 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프리고진이 자신의 반란 계획이 유출됐음을 알고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6월 23일 모스크바 진격을 감행했다고 전했다. 문제는 푸틴 대통령을 비롯해 러시아 지도부가 프리고진의 무장반란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사전 대응도 하지 않았고, 또 심지어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했음에도 이를 차단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크렘린궁은 6월 24일에야 프리고진에 대한 체포령과 대테러작전 체제를 발령했지만, 바그너그룹 용병들이 모스크바에서 200㎞ 떨어진 지역까지 진격하는 동안 별다른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용병들은 23일 우크라이나를 벗어나 러시아 남부 관구 사령부가 있는 로스토프나도누를 장악하는 등 1000㎞를 이동하는 데 36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서방의 정보기관들은 이번 사태는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이나 판단력에 구멍이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CNN도 “푸틴 대통령에 대한 러시아군의 충성심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면서 “바그너 용병들이 모스크바로 진격할 때 이들을 막기 위해 나선 것은 체첸 군대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의문점은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에 대한 사면과 함께 벨라루스행에 동의한 이유다. [뉴욕타임스(NYT)]는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의 반란과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려 했지만, 프리고진과 러시아 지배 엘리트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프리고진이 그동안 워낙 발이 넓었다는 점에서 그와 연루된 인사들을 처벌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데다 프리고진을 가장 옹호했던 인사가 바로 푸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세르게이 수로비킨 러시아군 통합 부사령관 겸 항공우주군 총사령관(대장)을 들 수 있다. 수로비킨 대장은 바그너그룹 무장반란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에서 강경파로 분류되는 수로비킨 대장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서슴지 않는 무자비한 전술 운영으로 인류 최후의 전쟁을 일컫는 ‘아마겟돈’ 장군으로 불려왔다.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전쟁 통합 사령관을 맡았던 수로비킨 대장은 지난 1월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에 밀려 통합 부사령관으로 강등됐었다. 수로비킨 대장은 시리아 내전 당시 프리고진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서방 언론들은 수로비킨 대장이 프리고진의 반란 계획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묵인했다는 이유 때문에 FSB의 수사를 받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러시아 고위층의 부정부패를 폭로해 온 러시아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인 ‘도시에르 센터’에 따르면 수로비킨 대장은 바그너그룹의 VIP 회원이었다고 한다. 또 러시아군 장성과 정보기관 소속 간부 30여 명도 바그너그룹의 VIP 회원이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제정 러시아의 황제인 표트르 대제(1672~1725)처럼 강한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 종신 집권하겠다는 야심을 보여 온 푸틴이 앞으로 권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올해 70세인 푸틴 대통령은 2000~2008년(3·4대), 2012~2018년(6대)을 거쳐 2018년부터 7대 대통령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2020년 한 차례 헌법을 고쳐 임기를 ‘중임 2회’로 제한했지만, 개정된 헌법은 차기 대통령부터 적용된다는 단서를 달며 자신은 법 적용을 피하도록 했다. 그가 2024년 대선에서 당선되면 계속 연임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12년 더 집권할 수 있게 된다. 러시아의 차기 대통령 선거는 2024년 3월 17일로 예정돼 있으며, 당연히 푸틴은 출마할 계획이다.

2036년까지 집권 노리는 푸틴


▎바그너그룹은 푸틴을 거역했음에도 아무런 보복을 당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벨라루스로 철수할 수 있었다. / 사진:AFP연합뉴스
서방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이번 무장반란 사태의 후폭풍으로 푸틴의 독재 체제 종말부터 철권통치가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는 등 다양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리아나 픽스 미국 외교협회(CFR) 유럽 담당 연구원과 마이클 키마개 미국 가톨릭대 역사학 교수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게재한 ‘푸틴 종말의 시작’이란 제목의 글에서 “프리고진의 동기와 의도가 무엇이든 그의 반란은 푸틴 정권의 심각한 취약성을 드러냈다”면서 “프리고진의 반란은 푸틴 정권에 대한 첫 번째 주요 도전일 수 있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루크 코피 미국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도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프리고진의 무장 반란은 실패했지만 이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프리고진이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은 푸틴의 몰락과 내전을 포함한 모든 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엘리트 내 파벌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충성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그의 통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 드러났다. 티모시 프라이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러시아의 정치권력은 푸틴 한 명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배분되고 행사된다”면서 “푸틴의 정치권력은 엘리트들에게 국가의 부와 안전을 제공하면, 엘리트들은 푸틴에게 충성하는 거래의 형태로 이뤄져 왔다”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실로비키와 올리가르히(신흥재벌)를 권력을 유지하는 두 축으로 삼아왔다. 러시아어로 ‘제복을 입은 남자들’을 뜻하는 실로비키는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을 비롯해 정보기관, 군, 경찰 출신 인사들을 말한다. 올리가르히는 소련 붕괴 이후 국영 자산을 헐값에 사들이며 부를 축적한 신흥재벌이다. 소수의 올리가르히는 정권의 비호로 러시아 경제를 좌지우지해 왔다.

쿠데타 후 권력 잃는 러시아의 패턴


▎옐친(오른쪽) 전 러시아 대통령은 쿠데타 후 급속도로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 이후 그는 푸틴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 사진:AFP연합뉴스
또 다른 한편에서 푸틴은 행정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술 관료들을 중용해 실로비키와 올리가르히를 견제하도록 했다. 게다가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 등을 비롯해 비공식 실세들도 기용해왔다. 이들이 상호 견제하는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모든 사안의 최종 결정권자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푸틴 대통령은 일단 프리고진의 무장 반란을 수습하긴 했지만 권력 유지가 쉽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보 달더 전 나토 주재 미국대사는 “옛 소련 지도자는 쿠데타를 진압하고서도 몇 달 뒤에는 권력을 잃었다”면서 “푸틴은 지금으로선 살아남았지만 그의 권좌 유지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과거 소련과 러시아에서 발생한 쿠데타는 권력의 종말로 이어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에 직면했다. 반란 세력은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감금하며 권력 전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주도한 반(反) 쿠데타 시위가 국민적 지지를 얻으면서 쿠데타의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좌로 돌아온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거세진 소련 해체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같은 해 12월 사임했다.

옐친 대통령도 1993년 9월 정권 전복 시도를 겪었다. 공산당 등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려고 했다. 옐친은 군 병력을 동원해 무력 제압했고, 정권을 지키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에 대한 지지는 하락했다. 임기를 6개월 남겨둔 1999년 말 옐친은 결국 사임하고 당시 총리였던 푸틴에게 자리를 넘겼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옐친 전 대통령은 짧은 기간 안에 몰락했다며, 푸틴 대통령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강한 지도자를 좋아하는 러시아인들은 푸틴 대통령을 ‘불굴의 구원자’로서 존경했지만 지금은 상처 입고 실패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흠집 난 푸틴의 ‘강한 지도자’ 프레임

러시아의 친정부 성향 싱크탱크인 정치학 연구소의 세르게이 마르코프 소장도 “러시아 엘리트들과 국민은 국가의 견고함과 정치적 안정 때문에 푸틴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독립신문 [네자비시마야 가제타]의 콘스탄틴 렘추코프 편집장 역시 “푸틴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안정을 제공하고 안보를 보장한다는 생각은 반란과 함께 대실패를 겪었다”며 “러시아 엘리트들은 더 이상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강조했다. 미국 싱크탱크인 애틀랜틱 카운슬 유라시아센터의 브라이언 휘트모어 연구원은 “푸틴의 권력이 약화될 경우 엘리트들이야말로 푸틴 정권을 가장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이 상처 난 리더십을 복원하기 위해 내부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비판 세력을 무차별 숙청할 수도 있다.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 알렉산더 가부예프 소장은 “푸틴은 살아남았다. 이는 러시아의 누구도 푸틴에게 도전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서 “푸틴이 더욱 억압적인 통치 방식을 휘두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은 러시아 국민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바그너그룹의 무장반란사태 이후 국민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민심을 얻기 위한 공개 행보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푸틴 대통령이 7월 4일 크렘린궁에서 8살 소녀 라이사트 아키포바에게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6월 28일 다게스탄 공화국 데르벤트를 찾았는데 당시 자신을 만나지 못해 눈물 흘리는 라이사트의 사진을 뒤늦게 보고 크렘린궁에 초대했다는 것이다.

6월 27일에는 크렘린궁 대성당 앞 광장에 국가근위대, 내무부, 연방보안국, 연방경비국 병력 2만5000명을 불러 모아 놓고 반란 저지를 공개적으로 치하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6월 29일엔 모스크바에서 열린 기술 박람회에 참석해 화이트보드에 직접 유명 만화 캐릭터를 그리는가 하면 관람객들과 셀카를 찍는 등 스킨십을 보였다.

이런 모습들에 대해 러시아 정치학자 예카테리나 슐만은 “푸틴 대통령은 개인적·정치적 생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엘리자베스 섀클퍼드 미국 시카고 글로벌 어페어스 위원회 연구원은 “푸틴이 서방보다 더 오래 버틸 것인가, 서방이 푸틴보다 더 오래 버틸 것인가 하는 건 더 이상 질문거리가 아니다”라면서 “중요한 건 푸틴의 가장 큰 전투는 서방과의 싸움이 아니라 러시아 국민과의 싸움이 될 거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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