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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14)] 영화 '남한산성', '올빼미'로 본 병자호란과 17세기 소빙기 

혹한으로 굶주린 청나라 군대, 얼어붙은 압록강 쉽게 건넜다 

빠른 진군에 당황한 인조, 강화도 아닌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
인조의 항복 받아낸 청, 조선을 식량 기지로 삼아 중원을 점령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청나라 기병은 이상기후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다. / 사진:CJ E&M
영화 [올빼미]는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가 맞이한 의문의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사망 당시 모든 구멍에서 검은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그가 독살된 것이라는 추측이 오랫동안 제기돼왔다. 특히 그가 죽은 후 부인이었던 세자빈 강씨와 아들 덕철 또한 사망한다는 점에서 당시 국왕이었던 인조를 배후로 꼽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서양 문물을 접한 소현세자는 청과의 교류 확대를 주장한 반면 청나라를 원수처럼 여긴 인조는 이를 불편하게 여겨 결국 아들까지 죽게 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이를 둘러싼 소현세자와 인조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인조가 그토록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것은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라고 해 남한산성에서 나왔을 때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린 일 때문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묘사했듯이, 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맨땅에 이마를 찧어야 했던 것이기에 조선 국왕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수치였고, 이는 인조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다. 그런 인조에게 청나라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한 소현세자도 요즘 말로 하면 ‘정무감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조를 비롯한 조선 신료들이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것은 예상 밖 결과였다. 고려 왕조가 몽골을 상대로 40여 년을 버텼듯이 이때도 원래 계획은 인조를 비롯한 주요 지도부가 강화도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청군의 기동전이 발을 묶어버렸다.

파죽지세의 청나라 군대


▎청 태종 홍타이지는 항복한 조선을 식량 기지로 삼아 명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결국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에 무너진 명나라를 대신해 중원을 정복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가 6일 만에 개성을 통과하며 초고속으로 진군한 것이다. 조선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이토록 빠른 속도로 올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최명길이 나서 “오랑캐 진영으로 달려가 맹약을 어기고 침략한 것을 따지겠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 말발굽 아래 죽을 것이오, 다행히 말 상대가 된다면 잠시나마 그들을 묶어둘 수 있을 테니 전하는 그 틈을 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십시오”라고 제안했다. 그나마 최명길의 목숨을 건 시도 덕분에 시간을 확보한 인조 일행은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이처럼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당시 기후 덕분이었다.

기후학자 월리엄 애트웰은 동아시아의 소빙기를 연구하면서 17세기 전반인 1584~1610년과 1636~1644년의 두 기간을 주목했다. 공교롭게도 1584~1610년은 동아시아에서 임진·정묘왜란이, 1636~1644년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소빙기가 이어지면서 중국에서는 가뭄·기근·역병이 연이어 발생해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명나라의 군사력은 붕괴됐다. 또한 국경 밖에서는 여진족의 침입이 확대됐다. 중국이 경험한 심각한 가뭄과 한랭한 날씨는 이웃한 조선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당시의 이상저온 현상으로 간에이(寬永) 대기근이 발생해 교토에서만 5만~10만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조선에서는 겨울 혹한이 이어졌다. 이것은 압록강 등 주요 강이 얼어붙는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조선으로서는 국방에 있어 민감한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여진족의 주력은 기병인데, 강이 얼면 기병이 쉽게 강을 건너 쳐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1600년대에는 압록강이 얼어붙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강이 이미 견고하게 얼어붙어 남북의 경계가 없으니 강 연안의 방비가 급한 것은 이전에 비해 백배나 된다”라거나 “압록강 일대가 얼어붙은 후에는 하나의 평지가 되니, 철기(鐵騎)가 달려오는 것이 질풍보다 빠르다”는 등의 우려 섞인 보고가 이어졌다.

그래서 조선에서 여진족에 대한 방어도 압록강의 결빙에 따라 태세가 달라졌다. 병자호란보다 10년 앞선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조선에서는 압록강의 결빙에 맞춰 경상, 전라, 충청도의 군사를 국경 일대로 이동시켰다가 봄이 돼 압록강이 녹으면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모두 한겨울에 발생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특히 애트웰이 주목했던 1636년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청나라 군사들은 무리 없이 압록강을 건넌 뒤 그 뒤로도 청천강, 임진강 등을 쉽게 건너며 열흘도 안 돼 한양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에서 보듯이 한반도의 강은 외부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좋은 지리적 요건이었으나, 겨울의 매서운 추위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식량 부족이 전쟁을 재촉하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이 인조에게 고하는 장면. 청이 빠른 속도로 남하할 당시 최명길이 목숨을 걸고 그들을 찾아간 덕분에 시간을 확보한 인조 일행이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사진:CJ E&M
소빙기의 특징 중 하나는 한랭한 기온과 가뭄을 동반하며 농업을 붕괴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농업 국가인 중국·조선·일본에 모두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애트웰이 꼽은 1584~1610년 사이에 들어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도 일본군 못지않게 조선 정부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 식량 부족이었다. 물론 일본군이 저지른 살육과 약탈로 농민들이 도망치면서 농사를 포기한 것도 있었지만, 이 당시의 세계적인 한랭한 기후도 중요한 작용을 했다. 그래서 조선을 구하러 출병했던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서 군량을 공급받을 수 없어 본토에서 직접 공수해야 했으며 그마저도 조선을 구휼하는 데 일부 사용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1599년에도 가뭄이 이어지자 1601년에는 식량 사정이 매우 악화됐는데, 명나라는 전쟁 이후 조선에 남아 있던 명군을 철수시키면서 의주에 저장해 두었던 쌀과 콩 12만여 석을 조선에 넘겨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했다. 그래서 선조는 “만신창이 되고 기근이 들어 스스로 소생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다시 수만 석의 양곡을 모두 나누어 주시니 이것은 실로 역사가 기록된 이래 아직까지 없었던 일”이라며 감사를 표시했다. 임진왜란 이후 사대부의 의식을 지배했던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개념에는 군사 원조뿐 아니라 기근에 대한 곡물 원조도 포함됐을 것이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것도 식량 부족의 이유가 적잖았다. 1600년대 이후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도 소빙기의 여파로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명나라는 이때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는 만주에 자리 잡은 청나라에도 큰 위기로 다가왔다. 청나라의 주축인 여진족(만주족)은 기본적으로 농업민족이 아닌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 교역을 통해 명·조선에서 식량을 얻어갔다. 그런데 명과 조선이 소빙기로 식량 생산이 어려워지자 여진족은 식량 공급 루트가 끊기는 상황에 처해버린 셈이었다. 누르하치의 주도로 후금(청)을 건국한 뒤로는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농업 생산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농업기술이나 토양 등의 문제로 생산력은 나라를 먹여 살릴 수준은 아니었다. 특히 소빙기는 그나마 적은 농업 생산조차도 어렵게 만들었다. 병자호란 직전 청나라는 연이은 기근으로 곡물 사정이 극도로 좋지 않아 침공 2개월 전에는 왕족과 신료들에게 먹을 양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장에 내놓도록 했을 정도였다.

명나라와 전쟁 중이었던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이 부족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통로였다. 이들이 정묘호란 후 조선 측에 국경 지대에 시장을 열어 교역하자고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은 이런 사정이 있었다. 당시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과 우호를 맺은 것은 성신으로 서로 대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교역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우리는 이런 기근을 당하여서 돈을 주고 매매하려는 것이니 만약 서로 구해주지 않으면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식량 보급기지 확보한 청의 승리


▎영화 [올빼미] 속 인조.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조아리는 굴욕을 당한 인조는 청나라에 대해 우호적인 소현세자와 갈등을 빚었다. / 사진:NEW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병자호란 무렵 청나라 여진족의 인구는 200만 명을 넘지 않았다. 2억 명에 육박하는 명나라와 비교하면 100분의 1 수준이었다. 이런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가는 청나라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군량의 안정적인 확보가 중요했다. 당시 기후 문제도 있었지만, 인구가 적은 청나라가 농업 생산과 전쟁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637년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은 매해 ‘세폐미(歲幣米)’로 1만 석을 바치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에 곡물을 요구했다. 청과의 곡물 교역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을 확실한 곡물 공급기지로 삼은 조치였다. 이때는 조선도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640년대 들어 중원과 만주 일대가 극심한 기근을 겪으면서 청나라의 식량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이런 식량 위기를 직접적으로 겪은 당사자였다. 기근이 절정에 달했던 1641년 청나라는 소현세자에게 더는 식량을 제공하기 어려우니 직접 농사를 지으라고 통보했다. 볼모로 잡은 조선 왕자에게 줄 곡물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대국에서 소국의 볼모를 먹일 수 없어서 스스로 경작하게 한다면 이는 만고에 없던 일”이라고 항변했지만, 소현세자뿐 아니라 청에 투항해 온 몽골의 부족들도 농사를 지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실상이었다.

청나라는 이듬해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투항했을 때도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에 “(투항한 명나라 포로들을 먹이기 어려우니) 매년 바쳐야 하는 쌀의 5년 치를 한꺼번에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것도 기한을 보름으로 잡았다. 청나라의 식량 사정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이라고 소빙기와 기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소현세자는 “조선이 전쟁에 진 뒤 해마다 흉년이 들어 나라와 백성의 창고가 모두 바닥을 드러냈다”고 호소했지만, 청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청나라는 조선의 식량 보급 덕분에 명과의 전쟁 수행을 감당할 수 있었고, 결국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에 무너진 명나라를 대신해 중원을 정복했다. 17세기는 동아시아 각국이 모두 식량 부족으로 허덕였고 그로 인해 중앙 권력도 위태로워지는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식량 보급기지를 확보한 청나라였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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