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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일본 직설(直説), 요설(妖説) 그리고 곡설(曲説)(2)] 아시아 유곽문화의 원조 요시와라를 찾아서 

세계 최초·최대 규모 ‘공창’ 이었던 도쿄 

일본이 뿌린 매춘의 역사… 아시아 쇼윈도 홍등가의 출발점
아시아 유곽 문화와 근대화 전 여성 수난사 체감할 수 있어


▎죠깐지 무덤에 들어선 요시와라 유죠들의 집단 매장 위령비. 오갈 데 없는 영혼들을 위한 최후의 안식처다. / 사진:유민호
거의 한 세대만의 캄보디아다. 베트남에는 가끔씩 왔지만, 7월 한여름의 프놈펜은 1995년 이래 처음이다. 상전벽해라고나 할까. 천지개벽 수준이다. 40~50층 고층 건물과 함께 서울 세종로 전광판보다 몇 배나 크고 선명한 첨단 기기가 프놈펜 곳곳에 세워져 있다. 필자가 머문 호텔은 아예 벽면 20층 전체가 3D 고성능 전광판으로 번쩍인다. 홍수로 점철됐던 프놈펜 주변 정글 메콩강도 여의도식 마천루로 변신했다. 변화의 동력은 중국이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일대일로가 인도차이나에 밀려들면서 프놈펜도 현대 도시로 탈바꿈한다. 바다와 육지를 잇는 일대일로 프로젝트 아래 도로·철도·건물·항구·비행장 심지어 초대형 운동장까지 한순간 등장한다. 인도차이나는 땅을, 중국은 돈을 대면서 프놈펜의 상전벽해가 나타난 셈이다.

세상만사 공짜는 없다. 돈을 댄 중국의 욕심은 엄청나다. 보통 BOT(Build-Operate-Transfer) 형식으로, 건설 직후 운용권이 장시간 중국에 넘어간다. 이후 캄보디아가 소유권과 운영권을 완전히 넘겨받는다. 언뜻 들으면 모두에게 유리한 ‘윈윈 게임’같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불평등 일방통행 계약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핵심은 중국 손안에 있을 운용 기간이다. 최소 50년에서 최대 99년까지 이어지는 길고도 긴 세월이다. 지난 6월 착공에 들어간 캄보디아 일대일로 135㎞ 고속도로를 보자. 베이징의 융자 14억 달러를 통해 2년 만에 완공될 예정이지만, 완공 후 무려 50년간 중국이 운용권자다. 인도차이나 최첨단 고속도로라고 하지만, 반세기에 걸쳐 캄보디아 주권과 무관하다. 한국에게 초고속 철도를 공짜로 지어줄 테니 50년 운영권을 달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BOT에서의 운영권은 보통 10년 정도에 그친다. 일대일로는 도로뿐만 아니라 철도·항만·건물·스포츠센터에 관련된 모든 운영권이 최하 50년에서 시작한다. 캄보디아나 인도차이나만이 아닌 전 세계 일대일로에 관여된 120여 개국 내 중국발 인프라가 전부 이런 식이다. 일대일로의 마수에 걸려들 경우 중국발 인프라와 주변 땅 전체가 장시간 중국 땅이 된다는 의미다. 38년 독재자 훈센의 캄보디아는 그 같은 일대일로 차이나 랜드의 대표주자다.

21세기에도 ‘성매매’는 진행형

20세기, 아니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캄보디아에 관한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폴 포트 정권이 벌인 ‘인종 대청소’다. 1975년 공산화 직후부터 5년간 자행된 크레르 루즈의 킬링 필드 무대가 바로 캄보디아다. 둘째는 세계에서 제일 싼 매춘의 나라라는 이미지다. 10대 미성년자까지 포함된 매춘이 캄보디아 전역에서 이뤄졌다. 21세기 들어 미성년자 매춘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명목에 그칠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12~13세 미성년자 매춘도 가능한 나라가 캄보디아다. 필자가 직접 눈으로 봤지만, 프놈펜 거리를 지키는 밤 여성 상당수가 앳된 얼굴의 미성년자였다. 캄보디아에 처음 들른 것은 1995년이다. 당시 프놈펜 매춘은 2023년보다 10배 아니 100배는 번창했다. 도심 한복판 힐튼호텔 주변 1㎞ 영역에 서성이는 여성 대부분이 매춘에 관련됐을 정도다. 캄보디아인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온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출신자도 많았다. 빚을 진 부모가 자식을 판 탓에 어린이마저 세계 최대 매춘가로 몰렸다.

28년 전과 비교해 보면 프놈펜 도시 자체도 상전벽해지만 매춘 풍경도 많이 변했다. 일단 매춘 여성의 외모가 변했다. 허름한 옷차림이 아닌 몸에 붙은 짧은 원피스 차림이 기본이다. 여성의 수도 많이 줄었고, 매춘 가격은 올랐다. 많은 변화 중 필자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매춘 가게의 풍경이다. 20세기 당시는 붉은 등이 들어선 방안에 매춘 여성이 나란히 앉아 기다리는 식이었다. 40대 이상 한국인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청량리 홍등가를 연상하면 된다. 실내에 앉아 있는 여성을 보고 선택하는 ‘쇼윈도’ 매춘이었다. 한 명이 아닌, 많으면 십여 명 이상 들어선 쇼윈도다. 마치 물건을 구매 하듯 얼굴·몸매·나이를 보고 선택하는 식이다. 쇼윈도 매춘은 태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밤 문화의 풍경이기도 하다. 인간 비하·경멸의 상징적 장면이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에서도 볼 수 있던 일상이다. 21세기 프놈펜 풍경이지만, 아직 쇼윈도 매춘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대세는 ‘자유·개방형’으로 가고 있다. 쇼윈도가 사라진 실내이거나 아예 실외에서 손님을 직접 끌어오는 식이다. 수동형에서 능동형 매춘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매춘 풍속사라고나 할까? 그럼 쇼윈도 매춘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홍등가에서 볼 수 있는 단독 비즈니스가 아닌, 집단 쇼윈도 매춘의 기원은 어디일까? 바로 일본이다. 일본이 주변국에 뿌린 매춘의 역사가 아시아 쇼윈도 홍등가의 출발점이다. 일본은 유곽(遊郭)문화의 선구자다. 이른바 나라가 지정한 공창(公娼)지역이 유곽이다. 매춘은 인류가 가진 최고(最古) 장수 직업으로 통한다. 특별한 기술이나 물건 없이, 자기 몸 하나만으로도 언제 어디서든 사고 팔 수 있다. 유곽은 일본이 창안해낸 매춘 역사의 새로운 영역이다. 고대 도시 폼페이에도 매춘 산업이 융성했지만, 일본 유곽문화는 ‘집단화·규격화·지역화’를 거친 공적 조직이란 점에서 다르다. 일본 유전자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지정된 장소에서 자격증을 가진 여성과 업자가 규율과 원칙 아래 행한다. 서방의 매춘은 개인주의에 기초해 영역과 규율을 뛰어넘는 자유 직종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공(公)이 아닌 사(私)다. 일본 유곽은 마치 샐러리맨을 위한 ‘공간·규범·조직’에 기초한 비즈니스 현장에 해당된다.

유곽은 일본 에도(江戸) 시대를 상징하는 고정 풍경 중 하나다. 손님을 기다리는 쇼윈도의 원형은 유곽 안의 ‘코우시마도(格子窓)’라는 개방형 문에 있다. 가는 나무를 가로 세로 엇갈리게 만들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격자식 전시룸이 코우시마도다. 좁은 새장이나 감옥을 연상하면 된다. 일본 유곽이 아시아로 확산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이른바 ‘가라유키(唐行き)’로 불리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가라(唐)‘는 외국이란 의미다. 외국에 가는 원정 매춘 여성이 가라유키다. 19세기 말 일본은 인구 폭발 시대에 접어든다. 사람값이 동물보다 못하던 시기, 돈을 벌기 위해 10대 소녀들이 외국으로 떠났다. 바다로 연결된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가 비즈니스 터전이다. 주된 손님은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서방 식민지 경영자와 군인들이다. 다만, 돈만 주면 현지인도 받아들였다. 당시 가라유키 1인당 하루 평균 20명 정도의 손님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해외 원정 매춘은 1920년 정부가 출국을 금지할 때까지 지속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군대는 가라유키 여성을 ‘애국낭자군(愛国娘子軍)’으로 찬미하기도 했다. 이들을 통해 현지 정보를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일본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유곽문화를 다시 아시아 전체에 퍼뜨린다. 종군위안부는 전쟁 중 일본군에게 주어진 섹스 도구였다. 20세기 말까지 아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던 쇼윈도 매춘은 140여 년 전 일본 가라유키에서 시작해 1940년대 종군위안부를 통해 현지화한다. 캄보디아 프놈펜은 에도 유곽문화를 기초로 한 가라유키와 종군위안부 흔적이 남은 최후·최대의 무대다.

국가가 지정한 공창 지역 ‘유곽’


▎오이란은 유죠들의 꿈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와까무라사끼는 해방 5일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갔다. / 사진:AP 연합뉴스
세계 최초·최대 규모의 공창은 도쿄에서 탄생했다. 그 유명한 요시와라(吉原) 유곽의 출발점은 1612년이다. 막부에게 공창을 만들어 풍기를 단속하자는 것이 유곽 탄생의 동인(動因)이다. 1612년 조선은 광해군이 집권한지 4년째 되던 해다. 조선에는 후금과 명나라와의 줄타기 외교가, 일본에서는 공창이 나타난 것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창은 평화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일본에서 유곽이 탄생하던 때, 광해군이 물러나고 후금의 정묘호란에 직면한다. 외침과 당파 싸움으로 나라가 풍비박산 난 조선과 달리, 도쿠가와(徳川) 막부의 일본은 매춘으로 상징되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막부는 이후 유곽을 전국으로 확장한다. 유곽에서 곽은 울타리를 의미한다. 17세기 이후 막부가 지정한 울타리 안에서의 육체 거래는 자유롭게 행해진다. 요시와라 유곽은 현재의 천황 거주지를 기준으로 할 때 동북쪽에 들어선 공간이다. 한국인 관광객이라면 도쿄 방문 시 반드시 들르는 명소인 아사쿠사(浅草)절에서 북쪽으로 2㎞ 정도 떨어져 있다. 초기에는 작은 규모로 출발했지만, 19세기 초에는 최고 2만 평 규모, 즉 축구장 8개 정도 공간으로 확장된다. 최대 수천 명의 여성이 매춘에 나섰고, 찾는 손님은 수만 명에 달했다. 앞서 살펴봤듯, 여성 1인당 상대가 하루 평균 10명이 넘었다.

에도 시대 당시 매춘 여성은 ‘유죠(遊女)’로 불렸다. 돈은 막부가 유곽을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바로 세금이다. 풍기 통제도 있지만, 매춘 산업을 통한 세금 확보가 도쿠가와 막부의 의도 중 하나였다. 유죠는 막부의 돈을 창조해내는 기본 출발점이다. 한·일 문화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대의명분에 기초한 주자학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는 스텝이 꼬이더라도 말로는 ‘인의예지신’을 주문처럼 반복한다. 사실 21세기 한국 정치문화의 상징인 내로남불은 문재인 정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풍속을 잡는다는 미명 하에 어느 날 하루아침에 매춘산업을 불법 시 한다. 그러나 살기 위한 여성들의 몸부림은 조선팔도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밖에 없다. 불법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행동을 눈감아주는 조건 아래 부정부패가 판을 친다. 물론 양반을 비롯한 대의명분 주창자들은 매춘 단골손님이 될 수 있다. 인의예지신을 외친 뒤, 뒤로는 돈을 받고 공짜 매춘에 나서는 식이다. 자세히 보면 2023년 한국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 유형과 너무도 비슷하다. 일본은 어떨까? 명분이나 말보다 현실과 실리에 주목한다. 매춘 그 자체에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닌 ‘필요 악’으로서의 매춘 비즈니스일 뿐이다. 인의예지신을 강조하기 전, 유곽을 통한 경제권을 창조해 세금도 그러모은다. 중요한 것은 매춘 외에는 살길이 없는 여성들의 삶이다. 그 결과 유곽의 수와 규모는 한층 더 커진다. 1929년 통계에 따르면 540여 개의 크고 작은 정부공인 유곽이 일본에 존재했다고 한다.

최근 요시와라에 들렀다. 21세기 요시와라는 타임슬립(Time Slip) 공간으로 느껴진다. 40여 년 전 쇼와시대의 공기가 흐른다. 관광객 발길이 뜸한 공간으로, 지금도 현역 유곽지대로 활약하고 있다. 과거와 같은 노예 매춘과 무관한 일명 ‘소프란드(ソープランド: Soap Land)’로 불리는 명소다. 소프란드는 마사지와 목욕을 전제로 한 매춘으로 보면 된다. 방 안에 설치된 목욕탕에서 몸을 씻은 뒤 마사지와 함께 매춘이 이뤄진다. 24시간 영업으로, 보통 1시간에 2만 엔부터 시작한다. 고급 시설과 인기 여성을 갖춘 소프란드는 시간당 10만 엔도 넘어선다. 소프란드 가게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필자에게 말을 건넨다. 일본에서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벌이는 호객행위가 불법이다. 여자가 아닌 50~60대 남자가 쉬었다가라고 말한다.

매춘 통한 세금 확보가 출발점

신앙과 종교 영역은 필자가 주목한 부분이자 요시와라의 하이라이트다. 속(俗)의 세상에 표류하던 수천 명 유죠들의 성(聖)에 관한 부분이다. 세상에 매춘을 행복하게, 자발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루이뷔통 가방을 위해 자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매춘은 궁핍한 생활과 어두운 환경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불법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인간에게 남은 최후 생존 수단으로서의 매춘이다. 에도 시대 유죠 대부분은 돈에 팔려온 거의 노예 같은 존재였다. ‘집단화·규격화·지역화’를 특징으로 하는 유곽세계에서 거의 기계처럼 일하는 ‘하루살이 나방’과 비슷했다. 기본적으로 요시와라 유죠는 10대와 20대 초에 한한다. 대략 20대 중반을 넘어서는 순간 매춘 도구로서의 생명도 끝났다. 성병으로 인한 병사(病死)도 흔했고, 결국 어린 유죠를 돕는 일만 남아있었다. 돈을 벌어 자유의 몸으로 요시와라에서 벗어나는 유죠는 극히 드물었다. 하루에 손님 20여 명을 상대한다고 해도 버는 돈의 상당수는 의류·음식·화장품 구입에 쓰였다. 업주에게 빌린 돈을 갚고, 부모에게 송금하기에도 벅찼다. 돈과 자유를 얻었다고 해도 얼굴을 내밀고 떳떳이 살아가기 어려웠다. 결혼을 할 수 없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외톨이 늙은 인생이 유죠의 숙명이었다.

에도 당시 법이지만, 유죠 고용주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규칙을 어기거나 마음에 안 들 경우 고문이나 살해를 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 일본 시대극에 자주 등장하지만, 요시와라에서 벌어지는 억울한 죽음이 비일비재했다. 업소 주인은 물론 술에 취해 손님에게 대들다가 맞아죽은 여성도 많았다. 주인 허락 없이 나갈 수 없는 밀폐된 공간이 유곽이다. 에도 건물은 목재와 다다미(畳)로 이뤄져 있다. 도시 전체를 덮은 화재가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불이 나도 주인이 풀어주지 않았다.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심적·육체적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유죠들의 야반도주가 비일비재했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살아간 요시와라 유죠가 화재의 주된 희생자였다.

성(聖)으로서의 절(寺)과 진자(神社)는 그 같은 하루살이 나방을 위한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다. 에도 시대 당시 요시와라 주변에는 수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 업주를 위한 곳도 있었지만, 요시와라 유죠도 들러 자신의 행복과 부모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1945년 전쟁 직후부터 본격화한 도쿄 개발로 인해 수많은 사찰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요시와라 유죠들의 한을 달래준 곳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지난 7월 초 필자가 찾아간 죠깐지(浄閑寺)는 요시와라 유죠의 흔적이 서린 대표적인 곳이다. 연고자 없이 죽은 유죠들의 시신을 집단 매장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매춘 여성의 안식처 절(寺)과 진자(神社)


▎21세기 인도차이나 매춘 풍경은 디지털과 원피스 여성들로 급변했다. 수동형 페쇄형 유곽이 아닌 능동형 개방형 마시지 클럽이 대세다. / 사진:유민호
불교 사찰과 진자는 일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시설이다. 비슷한 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다르다. 불교 사찰은 부처와 불교 성인을 기린 곳인 반면, 진자는 중국의 도교처럼 수많은 인간 성인을 모시는 곳이다. 멀리 기원을 따지자면 천황 가계를 모시는 곳이 진자이기도 하다. 무덤은 사찰과 진자를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보통 사찰에는 무덤이 있지만, 진자에는 없다. 요시와라 유죠가 죽은 뒤 묻힌 곳은 부처를 모시는 사찰이다. ‘나게꼬미(投げ込み)’는 돌아갈 곳이 없는 무연고 사망자의 집단 무덤을 의미한다. 일본 전역에서 볼 수 있지만, 특히 죠깐지는 나게꼬미 사찰로 유명하다. 죠깐지에 들른 즉시 중앙 불당 뒤쪽에 들어선 무덤으로 향했다. 요시와라 유죠를 기리는 집단 위령비가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높이 2m 정도의 아담한 불교식 위령비로, 주변을 꽃과 물로 장식했다. 위에는 좌상 부처가 들어서있다. 들른 날 비가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뭔가 신비로운 공기가 위령비 주변에 표류했다. 흥미로운 것은 위령비 곳곳에 빼곡히 채워진 여성용 액세서리 물품들이다. 반지·목걸이·팔찌·매니큐어·속눈썹 등의 장식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추측컨데, 유흥업소 관련 여성들이 바친 물건일 것이다. 저 세상의 유죠에게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희망을 녹여낸 의식일 것이다.

죠깐지에서는 요시와라, 아니 일본 유곽 역사 전체를 대표하는 유명한 유죠의 무덤도 만날 수 있다. 개인 무덤은 유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개인 무덤을 갖기 위해서는 돈은 물론 주변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유죠는 말하는 동물 수준으로 대우했다. 물론 무덤을 지키고 기일을 기리는 의식도 누군가 행해야만 한다. 유조로서, 일본에서 유일하게 자기 무덤을 가진 인물은 와까무라사끼(若紫)란 이름의 여성이다. 일본 역사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한 많은 인생과 허무한 죽음으로 저세상에 간 요시와라의 꽃이기도 하다. 일본 역사에 익숙하다면 와까무라사끼란 기묘한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일본 최고(最古)·최장(最長)의 고전 소설 겐지모노카다리(源氏物語)에 등장하는, 주인공 겐지의 부인 이름이 바로 와까무라사끼다. 미모와 함께 문학과 인생을 이해하는 총명한 머리의 인물이다. 왕 주변 고품격 여성에게나 허용되는 이름이 유죠에게 허용된 셈이다.

와까무라사끼는 19세기 말 메이지(明治) 시대 당시 유녀다. 원래 오사카(大阪) 출신 사무라이 집안의 딸로, 키가 늘씬한 흰 피부의 여성이었다고 한다. 에도가 끝나고 메이지로 접어들면서 사무라이 가계(家系)도 자식을 팔지 않을 수 없었다. 에도 시대가 끝나면서 유죠의 역할과 기능도 변한다. 단순한 성적 소모품으로서만이 아닌, 머리와 지혜를 필요로 하는 유죠가 탄생한다. 사무라이 집안 출신의 와까무라사끼는 미모와 머리를 겸비한 당대 최고 인기 유죠로 올라선다. 앞서 유곽의 특징으로 ‘집단화·규격화·지역화’를 강조했다. 유죠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사안이다. 유죠라고 해도 군대처럼 상·하 계급이 분명히 존재했다. 기준은 인기, 즉 돈이다. 높은 인기를 통해 돈을 많이 버는 유죠가 위로 올라간다. 일본 긴자(銀座) 1류 호스티스에게도 적용되지만, 피라미드 순위는 나이나 배경과 무관하다.

오갈 데 없던 영혼들의 안식처 죠깐지

17세에 팔려온 와까무라사끼는 유죠 서열 1위인 오이란(花魁)에 올라선다. 유죠 계급 사회의 최고봉 자리로, 요시와라 외부 판촉용 얼굴이 바로 오이란이다. 일본 영화나 문화 기록물에 나오지만, 어린 아이들을 앞에 세운 채 50㎝ 높이의 구두를 신고 천천히 앞으로 행진하는 여성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현란한 기모노(着物)와 머리 장식품으로 모두의 시선을 그러모으는 유곽의 특급 간판이다. 오이란은 주기적으로 유곽 주변을 돌면서 손님을 끌어들인 인물이다. 21세기 아이돌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인기 최고봉의 오이란은 모든 유죠의 꿈이었다. 돈을 벌면서 좋은 남자를 만나거나 권력자의 눈에 들어 결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유곽의 원칙이지만, 남자가 유죠를 밖으로 빼낼 경우 매매대금이 필요하다. 업자와 협의를 통해 돈을 지불할 경우 유죠의 해방이 가능하다. 오이란에 오른 와까무라사끼를 풀어주겠다는 남자가 줄을 섰다. 그러나 와까무라사끼는 돈이 아닌 사랑을 택했다. 22세 되던 해 자기가 좋아하는 청년과 결혼하기 위해 돈을 모은 뒤 요시와라를 영원히 뜰 결심을 한다. 와까무라사끼는 그러나 요시와라를 떠나기 5일 전 저세상으로 간다. 술에 취한 남성의 칼에 찔려 즉사한 것이다. 주변 모두가 와까무라사끼의 새 출발을 축하하던 때 맞이한 비극이다. 죠깐지 무덤은 애석한 죽음을 슬퍼한 당시 유죠와 업소가 돈을 모아 만든 것이다. 와까무라사끼 무덤은 사찰 본당 왼쪽에 특별히 들어서 있다. 높이 1m 정도의 비문 주변이 물에 흠뻑 젖어있다. 불교 예법이지만, 무덤 주변에 물을 뿌리는 것이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것으로 통한다. 물에 젖은 무덤일수록 방문객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와까무라사끼 영혼을 달랜 뒤, 뒤쪽의 유죠 위령비에 한 번 더 들렀다. 잊고 스쳐지나갔던 위령비 근처 비문 하나를 보기 위해서다. ‘살아 있을 때는 고생으로, 죽어서는 죠깐지(生れては苦界, 死しては浄閑寺).’ 메이지 초기에 탄생한 요시와라는 물론 유곽 역사 전체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유명한 시 구절이다. 살아서 못 누렸던 평화와 자유를 죽은 뒤 성(聖)의 공간 죠깐지에서 비로소 체득한다는 의미다.

요시와라 유곽은 21세기 일본인들의 역사 체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곽이라고 비난하거나 멀리하지 않는다. 싫든 좋든 모두의 기억이자 유산이다. 도쿄 사찰 아사쿠사에 들른다면 걸어서 15분 거리인 요시와라에 가보길 권한다. 곳곳에 영업 중인 소프란드를 관찰하면서 유곽의 공기를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유곽 문화의 흐름은 물론 근대화 이전 여성 수난사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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