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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성매매’는 진행형20세기, 아니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캄보디아에 관한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폴 포트 정권이 벌인 ‘인종 대청소’다. 1975년 공산화 직후부터 5년간 자행된 크레르 루즈의 킬링 필드 무대가 바로 캄보디아다. 둘째는 세계에서 제일 싼 매춘의 나라라는 이미지다. 10대 미성년자까지 포함된 매춘이 캄보디아 전역에서 이뤄졌다. 21세기 들어 미성년자 매춘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명목에 그칠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12~13세 미성년자 매춘도 가능한 나라가 캄보디아다. 필자가 직접 눈으로 봤지만, 프놈펜 거리를 지키는 밤 여성 상당수가 앳된 얼굴의 미성년자였다. 캄보디아에 처음 들른 것은 1995년이다. 당시 프놈펜 매춘은 2023년보다 10배 아니 100배는 번창했다. 도심 한복판 힐튼호텔 주변 1㎞ 영역에 서성이는 여성 대부분이 매춘에 관련됐을 정도다. 캄보디아인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온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출신자도 많았다. 빚을 진 부모가 자식을 판 탓에 어린이마저 세계 최대 매춘가로 몰렸다.28년 전과 비교해 보면 프놈펜 도시 자체도 상전벽해지만 매춘 풍경도 많이 변했다. 일단 매춘 여성의 외모가 변했다. 허름한 옷차림이 아닌 몸에 붙은 짧은 원피스 차림이 기본이다. 여성의 수도 많이 줄었고, 매춘 가격은 올랐다. 많은 변화 중 필자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매춘 가게의 풍경이다. 20세기 당시는 붉은 등이 들어선 방안에 매춘 여성이 나란히 앉아 기다리는 식이었다. 40대 이상 한국인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청량리 홍등가를 연상하면 된다. 실내에 앉아 있는 여성을 보고 선택하는 ‘쇼윈도’ 매춘이었다. 한 명이 아닌, 많으면 십여 명 이상 들어선 쇼윈도다. 마치 물건을 구매 하듯 얼굴·몸매·나이를 보고 선택하는 식이다. 쇼윈도 매춘은 태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밤 문화의 풍경이기도 하다. 인간 비하·경멸의 상징적 장면이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에서도 볼 수 있던 일상이다. 21세기 프놈펜 풍경이지만, 아직 쇼윈도 매춘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대세는 ‘자유·개방형’으로 가고 있다. 쇼윈도가 사라진 실내이거나 아예 실외에서 손님을 직접 끌어오는 식이다. 수동형에서 능동형 매춘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매춘 풍속사라고나 할까? 그럼 쇼윈도 매춘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홍등가에서 볼 수 있는 단독 비즈니스가 아닌, 집단 쇼윈도 매춘의 기원은 어디일까? 바로 일본이다. 일본이 주변국에 뿌린 매춘의 역사가 아시아 쇼윈도 홍등가의 출발점이다. 일본은 유곽(遊郭)문화의 선구자다. 이른바 나라가 지정한 공창(公娼)지역이 유곽이다. 매춘은 인류가 가진 최고(最古) 장수 직업으로 통한다. 특별한 기술이나 물건 없이, 자기 몸 하나만으로도 언제 어디서든 사고 팔 수 있다. 유곽은 일본이 창안해낸 매춘 역사의 새로운 영역이다. 고대 도시 폼페이에도 매춘 산업이 융성했지만, 일본 유곽문화는 ‘집단화·규격화·지역화’를 거친 공적 조직이란 점에서 다르다. 일본 유전자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지정된 장소에서 자격증을 가진 여성과 업자가 규율과 원칙 아래 행한다. 서방의 매춘은 개인주의에 기초해 영역과 규율을 뛰어넘는 자유 직종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공(公)이 아닌 사(私)다. 일본 유곽은 마치 샐러리맨을 위한 ‘공간·규범·조직’에 기초한 비즈니스 현장에 해당된다.유곽은 일본 에도(江戸) 시대를 상징하는 고정 풍경 중 하나다. 손님을 기다리는 쇼윈도의 원형은 유곽 안의 ‘코우시마도(格子窓)’라는 개방형 문에 있다. 가는 나무를 가로 세로 엇갈리게 만들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격자식 전시룸이 코우시마도다. 좁은 새장이나 감옥을 연상하면 된다. 일본 유곽이 아시아로 확산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이른바 ‘가라유키(唐行き)’로 불리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가라(唐)‘는 외국이란 의미다. 외국에 가는 원정 매춘 여성이 가라유키다. 19세기 말 일본은 인구 폭발 시대에 접어든다. 사람값이 동물보다 못하던 시기, 돈을 벌기 위해 10대 소녀들이 외국으로 떠났다. 바다로 연결된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가 비즈니스 터전이다. 주된 손님은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서방 식민지 경영자와 군인들이다. 다만, 돈만 주면 현지인도 받아들였다. 당시 가라유키 1인당 하루 평균 20명 정도의 손님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해외 원정 매춘은 1920년 정부가 출국을 금지할 때까지 지속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군대는 가라유키 여성을 ‘애국낭자군(愛国娘子軍)’으로 찬미하기도 했다. 이들을 통해 현지 정보를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일본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유곽문화를 다시 아시아 전체에 퍼뜨린다. 종군위안부는 전쟁 중 일본군에게 주어진 섹스 도구였다. 20세기 말까지 아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던 쇼윈도 매춘은 140여 년 전 일본 가라유키에서 시작해 1940년대 종군위안부를 통해 현지화한다. 캄보디아 프놈펜은 에도 유곽문화를 기초로 한 가라유키와 종군위안부 흔적이 남은 최후·최대의 무대다.
국가가 지정한 공창 지역 ‘유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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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 통한 세금 확보가 출발점신앙과 종교 영역은 필자가 주목한 부분이자 요시와라의 하이라이트다. 속(俗)의 세상에 표류하던 수천 명 유죠들의 성(聖)에 관한 부분이다. 세상에 매춘을 행복하게, 자발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루이뷔통 가방을 위해 자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매춘은 궁핍한 생활과 어두운 환경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불법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인간에게 남은 최후 생존 수단으로서의 매춘이다. 에도 시대 유죠 대부분은 돈에 팔려온 거의 노예 같은 존재였다. ‘집단화·규격화·지역화’를 특징으로 하는 유곽세계에서 거의 기계처럼 일하는 ‘하루살이 나방’과 비슷했다. 기본적으로 요시와라 유죠는 10대와 20대 초에 한한다. 대략 20대 중반을 넘어서는 순간 매춘 도구로서의 생명도 끝났다. 성병으로 인한 병사(病死)도 흔했고, 결국 어린 유죠를 돕는 일만 남아있었다. 돈을 벌어 자유의 몸으로 요시와라에서 벗어나는 유죠는 극히 드물었다. 하루에 손님 20여 명을 상대한다고 해도 버는 돈의 상당수는 의류·음식·화장품 구입에 쓰였다. 업주에게 빌린 돈을 갚고, 부모에게 송금하기에도 벅찼다. 돈과 자유를 얻었다고 해도 얼굴을 내밀고 떳떳이 살아가기 어려웠다. 결혼을 할 수 없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외톨이 늙은 인생이 유죠의 숙명이었다.에도 당시 법이지만, 유죠 고용주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규칙을 어기거나 마음에 안 들 경우 고문이나 살해를 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 일본 시대극에 자주 등장하지만, 요시와라에서 벌어지는 억울한 죽음이 비일비재했다. 업소 주인은 물론 술에 취해 손님에게 대들다가 맞아죽은 여성도 많았다. 주인 허락 없이 나갈 수 없는 밀폐된 공간이 유곽이다. 에도 건물은 목재와 다다미(畳)로 이뤄져 있다. 도시 전체를 덮은 화재가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불이 나도 주인이 풀어주지 않았다.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심적·육체적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유죠들의 야반도주가 비일비재했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살아간 요시와라 유죠가 화재의 주된 희생자였다.성(聖)으로서의 절(寺)과 진자(神社)는 그 같은 하루살이 나방을 위한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다. 에도 시대 당시 요시와라 주변에는 수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 업주를 위한 곳도 있었지만, 요시와라 유죠도 들러 자신의 행복과 부모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1945년 전쟁 직후부터 본격화한 도쿄 개발로 인해 수많은 사찰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요시와라 유죠들의 한을 달래준 곳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지난 7월 초 필자가 찾아간 죠깐지(浄閑寺)는 요시와라 유죠의 흔적이 서린 대표적인 곳이다. 연고자 없이 죽은 유죠들의 시신을 집단 매장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매춘 여성의 안식처 절(寺)과 진자(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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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갈 데 없던 영혼들의 안식처 죠깐지17세에 팔려온 와까무라사끼는 유죠 서열 1위인 오이란(花魁)에 올라선다. 유죠 계급 사회의 최고봉 자리로, 요시와라 외부 판촉용 얼굴이 바로 오이란이다. 일본 영화나 문화 기록물에 나오지만, 어린 아이들을 앞에 세운 채 50㎝ 높이의 구두를 신고 천천히 앞으로 행진하는 여성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현란한 기모노(着物)와 머리 장식품으로 모두의 시선을 그러모으는 유곽의 특급 간판이다. 오이란은 주기적으로 유곽 주변을 돌면서 손님을 끌어들인 인물이다. 21세기 아이돌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인기 최고봉의 오이란은 모든 유죠의 꿈이었다. 돈을 벌면서 좋은 남자를 만나거나 권력자의 눈에 들어 결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유곽의 원칙이지만, 남자가 유죠를 밖으로 빼낼 경우 매매대금이 필요하다. 업자와 협의를 통해 돈을 지불할 경우 유죠의 해방이 가능하다. 오이란에 오른 와까무라사끼를 풀어주겠다는 남자가 줄을 섰다. 그러나 와까무라사끼는 돈이 아닌 사랑을 택했다. 22세 되던 해 자기가 좋아하는 청년과 결혼하기 위해 돈을 모은 뒤 요시와라를 영원히 뜰 결심을 한다. 와까무라사끼는 그러나 요시와라를 떠나기 5일 전 저세상으로 간다. 술에 취한 남성의 칼에 찔려 즉사한 것이다. 주변 모두가 와까무라사끼의 새 출발을 축하하던 때 맞이한 비극이다. 죠깐지 무덤은 애석한 죽음을 슬퍼한 당시 유죠와 업소가 돈을 모아 만든 것이다. 와까무라사끼 무덤은 사찰 본당 왼쪽에 특별히 들어서 있다. 높이 1m 정도의 비문 주변이 물에 흠뻑 젖어있다. 불교 예법이지만, 무덤 주변에 물을 뿌리는 것이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것으로 통한다. 물에 젖은 무덤일수록 방문객이 많다고 볼 수 있다.와까무라사끼 영혼을 달랜 뒤, 뒤쪽의 유죠 위령비에 한 번 더 들렀다. 잊고 스쳐지나갔던 위령비 근처 비문 하나를 보기 위해서다. ‘살아 있을 때는 고생으로, 죽어서는 죠깐지(生れては苦界, 死しては浄閑寺).’ 메이지 초기에 탄생한 요시와라는 물론 유곽 역사 전체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유명한 시 구절이다. 살아서 못 누렸던 평화와 자유를 죽은 뒤 성(聖)의 공간 죠깐지에서 비로소 체득한다는 의미다.요시와라 유곽은 21세기 일본인들의 역사 체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곽이라고 비난하거나 멀리하지 않는다. 싫든 좋든 모두의 기억이자 유산이다. 도쿄 사찰 아사쿠사에 들른다면 걸어서 15분 거리인 요시와라에 가보길 권한다. 곳곳에 영업 중인 소프란드를 관찰하면서 유곽의 공기를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유곽 문화의 흐름은 물론 근대화 이전 여성 수난사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