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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0) | 최종건·최종현 SK그룹 창업회장 下 

인수·합병으로 시대의 흐름을 타다 

직물회사로 출발했지만 오일쇼크 계기로 사업 다각화, 석유사업 진출로 대기업 도약
1990년대 SK텔레콤으로 사세 확장, 최종현에서 최태원으로 경영권 승계도 순조로워


▎최태원(오른쪽) SK그룹 회장이 SK이노베이션 창립 6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아버지 최종현 선대회장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을 응시하고 있다.
미국의 듀폰사가 개발한 나일론은 실크처럼 부드러울 뿐 아니라 거미줄같이 가늘면서도 강철보다 강한 꿈의 섬유로 국내에는 1950년 6·25전쟁 때 미군 병사에 의해 최초로 소개됐다. 국내에서는 질기고 가벼우며 세탁이 간편하다는 점에서 가정주부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958년까지 국내에 시판된 나일론 제품은 거의 밀수품으로 국산은 1955년부터 태창직물에서 약간씩 생산하는 것이 전부였다.

선경직물은 1958년 12월부터 나일론 직물을 생산했다. 1959년 3월에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산업자금 1만 달러를 대부받아 설비를 도입해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 무렵 직물업계는 과잉공급으로 인한 불황에 시달렸다. 나일론 등 합섬직물 또한 외래품이 범람해서 국산 직물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최종현은 원사 메이커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65년 12월 서울상대 출신의 손길승, 이순석을 특채하는 등 인재들을 모으면서 원사공장 건설을 준비했다.

최종현이 추진해온 아세테이트공장 건설차관 지불보증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은 1966년 3월이었다. 당초 선경은 일본 데이진(帝人)과 합작해서 폴리에스터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데이진이 거절해서 대신 아세테이트원사를 제조하기로 선회했다. 아세테이트공장 건설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사업이었지만 아세테이트사업이 국제적으로 사양산업으로 낙인찍혀 국내 기업들은 진출을 꺼렸다. 최종현은 역발상으로 선경이 진출하면 독점화가 가능해 사업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아세테이트는 폴리에스터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기도 했다.

최종건, SK의 초석 놓고 48세로 타계

1966년 6월 자본금 1억원의 선경화섬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아세테이트원사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 이토추(伊藤忠)상사로부터 차관 550만 달러를 확보하고 1968년 3월 25일 수원시 정자동에 일본 데이진과 5:5 합작으로 일일 생산량 5.5t의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착공해 그해 12월 25일 완공했다.

인공섬유 가운데 천연섬유에 가장 근접한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일일 생산량 7t)은 같은 해 6월 10일 착공해서 예정공기보다 9개월 빠른 1969년 2월 10일 완공했다. 폴리에스터 공장은 일본 데이진의 협조로 건설됐는데, 공장건설 자금은 정부 보유금 694만 달러를 확보해서 조달했다. 정부는 폴리에스터 원사를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선경의 아세테이트 원사 생산능력 5.5t과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능력 7t은 국내 전체 원사 생산능력 48t의 26%에 해당한다.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와 아세테이트 원사를 동시에 생산하게 되며 국내 원사 메이커의 1인자로 부상했다. “우리가 아세테이트 공장을 짓고 폴리에스터 공장을 연달아 짓는 등 사업을 벌일 때 사회에서 다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제조업을 그렇게 한꺼번에 왕창 벌리는 것은 보통 사람의 배짱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거든. 최종건 회장은 그만큼 추진력이나 집행 의욕이 달랐던 분이에요.”(최준식 인터뷰, [최종건 창업회장의 창업이념과 기업가정신])

선경화섬에 대한 정부의 정책 변화는 주마가편이었다. 당초 정부는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선경에 폴리에스터원사 생산공장 건설을 허가했으나 원사생산이 개시되던 1969년 선경합섬이 생산하는 폴리에스터원사 전량을 국내에 시판하도록 변경했다. 국내 폴리에스터 원사 수요량이 급증한 결과 1968년 원사수입량은 1967년 대비 114% 증가한 2928t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1969년에는 수요량이 전년 대비 92%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국내 수요도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1969년 7월에는 선경화섬에서 분리해서 선경합섬을 발족시켰다. 선경의 폴리에스터 원사 ‘스카이론’은 주름이 잘 지지 않아 세탁 후 다림질과 잔손질이 불필요해 국내 소비자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선경의 화섬사업은 정상의 대기업집단으로 도약하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인 1973년 11월 15일 최종건 창업회장이 향년 48세로 타계했다. 사인은 지병인 폐암이었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기업 경영전략은 초기의 제품 차별화, 신제품 개발 등 사업단위 중심의 실천전략에서 점차 수직계열화, 시장다변화, 사업다각화 등 다양한 전략으로 변모했다. 담연 최종건 창업회장의 멀리 내다보고 새로운 사업영역을 끊임없이 개척해 온 실천의 경영전략은 오늘날 SK그룹의 비약적인 성장 발판을 마련했다.”(신용대·이창순, [담연 최종건의 기업가정신과 경영전략], [최종건 창업회장의 창업이념과 기업가정신])

최종현, 오일쇼크 위기를 기회로


▎50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장학퀴즈는 SK의 대표적 ESG경영 사례로 꼽힌다.
선경직물㈜의 최종현 사장은 1973년 11월 24일 선경화섬과 선경합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선경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했다. 평소 형의 그늘에 숨어서 밖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성품의 소유자가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다.

최종현은 당시 제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초래된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주력 계열사들에 대한 증자를 단행하며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또한 새로운 캐시카우 개발 및 기업의 위험분산 차원에서 섬유 이외의 다각화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73년에는 선경개발(관광)과 서해개발(조림), 스카이메리트(봉제), 선경유화(DMT공장), 선경석유(정유공장) 등을 설립하고 극동창고를 인수하는 한편, 영남방직 경영에 참여했다. 수출에도 주력해서 1976년에는 ㈜선경(선경직물의 후신)이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됐다.

정부는 ①수출실적 1억 달러 이상 ②15개국에 100만 달러 이상 수출 ③100만 달러 이상 수출품목 15개 이상 등, 3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업체에 한해 종합무역상사로 지정해줬다. 또한 정부는 종합무역상사를 육성하기 위해 1975년 12월 3일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하고 중소기업의 계열화를 적극 지원했다.

선경도 삼성, 현대, LG, 금호그룹처럼 종합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다각화에 주력했다. 1976년 1월 경상북도 경산에서 볼트, 너트, 톱니 등을 생산하는 자본금 10억원의 신생 공업사를 인수한 것을 필두로 6월에는 서울 남대문로의 동화빌딩을 16억810만원에 구입해서 본사사옥으로 전환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자본금 3억원의 선경기계를 선경산업의 자회사로 설립했으며, 1973년 3월에는 선경개발이 서울 광진구에 소재한 지하 4층, 지상 18층의 특급호텔인 쉐라톤워커힐(540객실)을 인수했다.

1961년 설립된 사단법인 워커힐은 1962년 국제관광공사에 인수돼 1963년 4월 호텔로 개관했다. 한국에 마땅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휴가를 떠나는 주한미군을 유치하기 위해 세운 호텔로, ‘워커힐(Walker-hil)’이라는 명칭은 초대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 때 활약한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기리는 의미로 지어졌다. 1968년에는 파라다이스 카지노 워커힐을 개장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특급 관광호텔인 워커힐호텔이 국영기업에서 민영으로 거듭난 것이다.

1976년 11월에는 자본금 1억원의 선경금속과 선경마그네틱을 각각 설립했다. 오디오 테이프 제조업체인 선경마그네틱은 당초 자본금 2억5000만원의 수원전자로 출범했었다. 또한 같은 달에 대구시 북구 노원동에 소재한 자본금 5억6000만원의 신원산업유한회사도 인수했다. 신원산업은 1969년 설립된 자전거 제조업체였는데 선경이 인수, 1977년 3월에 선경스마트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7년 8월에는 토건업체인 협우산업을 4억6000만원에 인수해서 선경종합건설로 재발족하고, 그해 12월에는 동일 업종의 삼덕산업까지 인수해서 사세를 확장했다. 달러박스로 회자되던 중동 건설특수 및 국내 부동산개발 붐에 편승하고자 건설업에 진출한 것이다.

1978년에는 전북 군산에 소재한 경성고무를 인수했다. 1936년 종업원 수 100명에 일일생산량 500족 규모로 성장한 군산 유일의 한국인 소유 고무신 제조업체였다. 초기에는 검정고무신만 생산했으나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표백기술을 적용한 흰 고무신뿐만 아니라 흑색 및 백색 운동화 등으로 제품의 다변화를 도모했다. 그 결과 해방 무렵에는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서울 이남 지역에서 최고 인기를 누릴 정도로 성장했다. 경성고무는 식민지 체제 하에서 오로지 한국 민초들의 애호품인 고무신 생산에 주력해서 민족자본으로 성장한 드문 케이스였다.

선경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수출 유망 중소기업을 연쇄적으로 인수하는 수평적 다각화에 박차를 가해서 복합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1970년 선경그룹은 삼성, 현대, 럭키, 대우, 효성, 국제, 한진, 쌍용, 한국화약에 이어 재계 10위의 재벌로 도약했다.

섬유에서 석유로 주력을 옮기다


▎최종현(왼쪽) SK그룹 선대회장의 중동 인맥은 한국이 오일쇼크를 타개하는 데 기여했다. / 사진:SK그룹
1970년대 말까지 선경의 주력은 직물사업이었다.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라 석유 수급에 사업 존폐가 달려 있었다.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1975년 1월 신년사에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해서 선경그룹을 에너지 종합화학기업으로 키우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일찍부터 중동의 국가 실권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런 인연 덕분에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에 대한 수출금지 엠바고를 풀어줬다. 한국이 원유를 수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그는 1978년 12월 제2차 오일쇼크 때에도 한국 정부를 대신해서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가 하루 5만 배럴의 석유를 한국에 공급하도록 도왔다. 당시 야마니 사우디 석유상은 최종현 회장에게 “한국이 필요한 만큼 원유를 증량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최종현은 오일쇼크 때마다 국난(國難)을 해소하는 데 공헌한 숨은 공로자였다.

1980년 초 정부는 종합무역상사들에 원유 도입을 허용하고 이에 소요되는 자금을 정부가 지원하는 내용의 석유수급 조절명령을 발동했다. 종래의 정부 베이스의 원유 도입 방식에서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효성, 현대양행, 동아건설, 대한항공, 현대건설, 코오롱, 쌍용, 삼성 등이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선경은 사우디와 장기 원유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1980년 7월 17일부터 국내 정유업계에 원유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최종현의 ‘섬유부터 석유까지’ 꿈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980년 12월에 ㈜선경이 국내 최대의 정유 공기업인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이노베이션)의 합작선인 미국 걸프사의 지분 50%와 경영권을 인수한 것이다. 유공은 1979년도 매출액이 단일 기업으로는 국내 최대일 뿐 아니라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1979년도 세계 500대 기업(미국기업 제외) 중 159위에 오른 세계적 규모의 정유업체였다. 당시 국내에는 호남정유, 쌍용정유, 현대석유, 경인에너지(SK인천석유화학) 등이 있었으나 국영인 유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장점유율 1위 기업이었다.

유공은 정부가 1962년 설립한 독점 정유업체였으나 1970년 6월 걸프(Gulf)사가 지분 50%를 인수하며 경영권을 장악했다. 유공의 민영화 방침이 공개된 것은 제5공화국 출범 직전인 1980년 10월로써, 유공의 경영 주체였던 미국의 걸프사가 그해 8월 19일 철수한 데 따른 후속조치였다.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로 경영 성과가 신통치 못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1980년 11월 28일 동력자원부가 내놓은 유공의 주식 50%(2375만1771주)의 인수기업으로 ㈜선경을 선정했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삼성과 선경, 남방개발 등 3개 후보기업들을 놓고 평가한 결과, 선경이 낙점된 것이다. 정부는 유공의 경영권을 국내기업에 넘기기로 했는데 최우선의 조건을 원유의 장기 안정적 확보 능력에 두었다. 선경의 최종현 회장은 1973년 선경석유를 설립하고 온산에 100만 평의 정유공장 부지를 확보했으나 1차 오일쇼크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의 각별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선경은 알 사우디은행에서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1억 달러의 차관을 도입해서 불하대금 671억7800만원을 상환했다. 선경은 1982년에 상호를 ㈜유공으로 변경하고 1985년 대한석유의 나머지 지분 50%마저 인수해서 선경그룹의 주력기업으로 전환시켰다.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격이어서 특히 주목됐다. 항간에는 당시 제5공화국의 2인자이자 보안사령관인 노태우의 개입으로 성사됐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해외유전 개발사업에 뛰어들어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은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는 등 인재를 유난히 아꼈다. / 사진:SK그룹
선경은 유공 인수를 계기로 국내 최대의 석유제품 판매업체인 ㈜흥국상사의 경영권도 확보했다. 흥국상사는 1965년 2월 10일 자본금 1000만원으로 설립된 개인사업체였다. 그러나 1969년 6월 걸프가 586만 달러의 현금차관을 공여하면서 전 주식의 25%를 인수하고 경영권을 확보했다. 1972년 12월 유공이 흥국상사의 전 주식을 인수해서 유공의 자회사로 만들었다. 흥국상사는 1980년 말 시점에 매출액 2104억원, 매출이익률 6.53%의 초우량기업이었다.

1982년 1월에는 자본금 10억원의 유공해운을 설립하고 그해 6월과 7월에 25만t급의 대형 유조선 ‘아나벨라’호와 ‘야스텔라’호를 파나마로부터 용선해서 취역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라드라누라항에서 원유를 선적해서 정유시설이 있는 울산항으로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아세아상선으로부터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인 ‘코리아스타’호도 용선해서 원유수송에 투입했다.

해외유전 개발사업도 이때부터 개시했다. 오일쇼크는 안정적 원유 수급을 위해서는 직접 자원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선경은 1980년 유공 인수 직후 자원기획실을 설치하고, ‘무자원 산유국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를 산유국으로 만들어 에너지 안보에 대응하겠다는 청사진이었다.

신규로 개발하는 예멘의 마리브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의 10%를 ㈜유공이 가지기로 사전에 예멘 정부와 컨소시엄 계약을 체결했다. 마리브 유전은 1985년 11월부터 개발정 시추와 생산시설 및 수출송유관 건설 등에 착수해서 1987년 12월부터 본격 생산에 돌입해 단기간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1988년 1월 20일 유공해운 소속의 ‘Y위너’호가 마리브 유전에서 생산된 개발원유 35만 배럴을 싣고 울산항에 입항했다.

그 와중에 계열기업 정리 작업도 추진했다. 1980년 9월 27일 정부는 대기업 집단의 주력기업 전문화정책을 단행, 재벌들의 문어발경영 해소를 촉구했다. 선경은 주력사업을 섬유와 석유사업에 한정하고 나머지 사업들은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그 일환으로 해외섬유의 월곡공장은 ㈜선경에서 인수하고, 동천공장은 선경마그네틱으로 넘겼다. 선경복장은 ㈜선경에서 인수했으며 경영실적이 좋지 못한 선경반도체와 선경마린은 폐업했다. 선경기계 및 선경목재와 중소기업 업종인 워커힐여행사, 워커힐교통, 선경식품, 선경유화는 매각처분하고 자본참여 형식으로 계열화했던 영남방직은 지분을 매각했다.

최종현의 마스터피스가 된 SK텔레콤


▎최종현(가운데) SK그룹 선대회장은 호흡기 곤란을 겪으면서도 한국 경제의 IMF 외환위기를 우려했고, 예견은 적중했다. / 사진:SK그룹
선경은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총 11개 기업을 정리했다. 계열기업 수가 종래 22개에서 11개로 대폭 축소되며 전두환 정부의 체면을 세워줬다. 외형적으로는 파격적이었으나 내용 면에서는 영양가 없는 사업만 골라 가지치기했던 것이다.

선경의 대박행진은 1990년대에도 계속됐는데 계기는 1994년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것이었다. 한국전기통신(KT)은 1984년에 소위 ‘삐삐’로 불리던 무선호출서비스 업무를 분리해서 자회사로 한국이동통신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1988년부터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시했는데 무선호출, 차량전화, 휴대전화 수요가 점증하는 등 전도가 매우 유망했다.

정부는 이동전화서비스사업을 경쟁 체제로 전환하기로 하고,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1991년 7월 23일 국회에서 제2이동전화 사업자 선정기준을 담은 공중전기통신법과 전기통신기본법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제2이동통신은 20세기 마지막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치부돼 선경(유공), 포항제철, 코오롱, 쌍용, 동양, 동부 등이 각축전을 벌인 결과 1992년 8월 20일 유공과 한전, GTE, 보다폰 등 총 16개 업체로 구성된 대한텔레콤이 최종 선정됐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제2이동통신의 낙찰자가 포항제철과 코오롱 등의 컨소시엄인 신세기통신으로 변경됐다. 임기 말의 노태우 대통령이 재계 전체의 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대형사업의 사업자에 자신의 사돈기업을 선정한 데 대해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반발하자 선경이 사업권 반납을 발표한 것이다. 선경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과 노태우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은 노 대통령의 취임 7개월 만인 1988년 9월 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바 있다. 현재는 이혼 소송 중이다.

경영권 분쟁 없이 최태원 체제로


▎최종현 선대회장 별세 후 SK그룹은 최태원(오른쪽 두 번째) 회장 체제로 재편됐다. 최 회장은 반도체(SK하이닉스 인수) 사업을 성공시키며 SK를 또 한 번 도약시켰다.
대신 선경은 선발기업인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해서 1997년 SK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신설 예정인 신세계통신보다 이미 영업 중인 선발기업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판단한 셈이다. 한국이동통신은 이후 1999년 신세기통신마저 인수함으로써 국내 이동통신업계의 최강자로 부상했다.

선경은 1980년대 이후 공기업인 대한석유공사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서 급속하게 덩치를 키워 삼성, 현대, LG와 함께 나란히 선두그룹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선경도 국내의 여느 재벌처럼 정치권과의 유대를 돈독히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3년 제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두환, 노태우 전임 대통령에 대한 단죄가 시작되면서 각종 비리들이 세간에 드러났다. 최종현은 전두환 대통령의 일해재단에 현대, 삼성, 대우, LG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액수인 28억원을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장남 최태원의 장인인 노태우 대통령에게 30억원을 공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종현은 1998년 8월 26일 자택인 서울 워커힐아파트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로 형인 최종건 회장의 사인과 같다. 그의 타계로 SK그룹의 경영권은 최종현의 장남인 최태원에게로 세습됐다. 최종현이 경영권에 대해 특별한 유언 없이 갑작스럽게 타계함에 따라 경영권 분쟁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영권 세습 1순위 후보자인 최종건 창업회장의 장남 최윤원이 “우리 형제 가운데 태원이가 가장 뛰어나다”며 사촌인 최태원의 손을 들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SK그룹은 8·15 해방 후에 귀속기업을 모체로 해서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한 대표적 기업이었다. 기술자 출신이자 형인 최종건이 빈손으로 일궈낸 선경직물을 미국 명문대 출신의 동생 최종현이 국내 정상의 SK그룹으로 키워낸 합작품이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10호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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