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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0)] 울산 아전 이예가 당상관 외교관 된 사연 

왜구에 끌려간 상사 구하려 몰래 승선 

은그릇으로 로비해 피랍자 목숨 구하고 송환 이끌어
납치된 어머니 찾다 일본 전문 외교관의 길로 들어서


▎일본 대마도 원통사 입구에 있는 이예 공적비. 2005년 충숙공 이예 선양회와 학성 이씨 문중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원통사는 1408년 대마도주 소 사다시케가 세운 절로, 소 사다시케 사망 때 이예가 원통사를 찾아 조문한 기록이 있다. / 사진:이훈범
조선이 건국된 지 6년째인 1397년 1월, 대마도인 비구로고가 왜인 3000명을 이끌고 오늘날 울산인 울주에 상륙해 투항 의사를 밝혔다.

울주의 지주사 이은(李殷)은 비구로고 등 왜인 지도부를 관아로 초대해 후하게 접대하고 식량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는데, 이를 본 동래의 중 하나가 왜인들에게 “조선 관군이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양동작전을 펼치려 한다”고 모함했다.

이에 놀라고 분노한 왜인들이 급히 배로 돌아가면서 이은 등을 볼모로 끌고 갔다. 이때 울주의 다른 아전들은 모두 상사야 어찌되건 나 몰라라 달아나 숨었다.

그런데 관아에서 사용하던 은제 그릇과 술잔을 챙겨서 왜적의 후미선에 숨어든 아전이 있었다. 울주 관아의 기관(記官)으로 있던 스물네 살 청년 이예였다.

이예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판으로 올라와 신분을 밝히고 상사인 이은을 모실 수 있도록 같은 배에 타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예의 정성에 감동한 왜인들이 승선을 허락했지만, 대마도에 가까워지면서 이은 등을 죽여 없애자는 의견이 비등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왜인들은 이예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이은을 대하는 태도에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깍듯이 예절을 지키는 것을 보고 진정으로 감동했다.

“이 사람은 진짜 조선의 관리다. 이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예 역시 가지고 온 은그릇을 비구로고에게 바쳐 그의 마음을 샀다. 그렇게 이은과 이예 일행은 목숨을 부지하고 대마도 화전포에 유치됐다. 이예는 그곳에 도착한 지 한 달째부터 비밀리에 배를 준비해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 박인귀가 포로 송환 협상에 성공해 이듬해 2월 이은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울주 지주사 송환 이뤄내며 신분 상승

말이 쉽지, 이예의 대담한 행동은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왜구 소굴이던 대마도로 자진해 들어간다는 것은 제 발로 사지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어지간한 용기와 과단성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뇌물용 은그릇을 챙겨간 것도 뛰어난 기지가 아닐 수 없다.

왜구들은 조금이라도 값이 나가는 물건을 얻기 위해서라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해적이었다. 그들에게 뇌물로 바친 은그릇은 시장 가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자신은 물론 다른 포로들의 목숨까지 살린 지혜였다.

조정에서도 이를 높이 사 이예와 동료 아전의 향역을 면제해주고 관직을 내려줬다. 이예가 중인 신분에서 양반 계급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으며, 향후의 눈부신 활약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예는 일견 무모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용기를 어떻게 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비극적 가족사와도 관련이 있다.

고려 말 공민왕 때인 1373년 울주에서 태어난 이예는 어린 시절을 줄곧 울주에서 보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는 고려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다. 중앙정부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했고, 그 틈을 탄 왜구의 침탈이 극성을 부리던 때였다.

특히 바다와 맞닿아 있고 일본과 가까운 울주는 수시로 출몰하는 왜구들로 인해 백성들의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급기야 이예가 여덟 살 때인 1385년에는 울주에 상륙한 왜구들에 의해 이예의 어머니가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외교 무대 데뷔전부터 맹활약


▎이예의 공적을 기록한 부비. 일본 대마도 원통사 이예 공적비 옆에 자리해 있다. / 사진:이훈범
망해가는 고려 정부는 끌려간 백성들을 되찾아올 힘과 의지가 없었다. 이예는 어머니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에 항상 어머니를 되찾아 오겠다는 결심을 간직하고 살았고, 늘 대마도로 건너갈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이예에게 지주사 이은의 피랍은 역설적으로 천우신조의 기회로 다가왔을 수 있다. 이예는 대마도에 유치돼 있는 동안에도 온갖 수를 써서 어머니의 소재를 확인하려고 노력했을 게 분명하다.

비록 어머니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그의 강한 의지가 탈출 계획까지 세우는 등 살아서 귀국할 수 있는 바탕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목격한 피랍 조선인들의 비참한 처지가 이예로 하여금 평생을 포로 송환에 바치게 만든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것은 정종 때인 1400년 이예가 일본을 방문하는 회례사 일행에 합류하기를 조정에 청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다시 한 번 대마도에 가 어머니를 찾겠다는 일념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예의 존재는 아직 미미할 뿐이었다. 중앙 조정에서는 그의 이름조차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은이 포로로 잡혀갈 당시의 [태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이예로 제대로 기록됐으나, 이듬해 포상할 때의 [태조실록]에는 이예가 ‘이도’라고 잘못 나온다.

“울주의 아전 이도와 박언의 향역을 면제하였다. 왜적이 울주 지주사 이은을 잡아가매, 도와 언이 따라가서 대마도에 이르러 살려냈었다.”(1398년 1월 3일자 기사)

하지만 이예는 첫 대마도 파견 때부터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한다. 이예의 졸기에 나오는 당시 활약상을 보자.

“(이예는) 경진년에 조정에 청하여 회례사 윤명을 따라서 일본의 삼도(三島)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찾았는데, 집집마다 수색하였으나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처음에 대마도에 가니 도주가 어떤 사건을 핑계로 윤명을 잡아 두고 보내지 않았다. 예가 대신 예물을 가지고 일기도(一岐島)의 도주 지좌전(志佐殿)에게 바치고 사로잡힌 사람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청했으며 또 도적질을 금하게 했다.”

일본의 삼도란 대마도와 일기도 두 섬과 본토 나가사키현의 송포 지역을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 거제도에서 동남쪽으로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이들 지역은 인구가 적고 농토가 척박해 농사를 짓기 어려워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본토에서 식량을 구입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따라서 주민들이 해적질로 눈을 돌려 중국과 한반도 연안을 침탈하는 왜구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고려 말부터 ‘삼도왜구’란 말이 등장한 이유다.

이예는 어머니를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외교 사절로 데뷔한 첫째 사행에서 포로를 돌려보내고 노략질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왜구로부터 받아내는 맹활약을 펼쳤다. 그것도 수족이 묶인 회례사를 대신해 이뤄낸 공적이었다.

44년 동안 40여 회 일본에 파견

이예는 이를 계기로 외교적 수완을 인정받았으며, 향후 조선의 대일 외교, 특히 대마도 전문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다. 외교관으로서 이예의 활약은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이예는 이듬해인 1401년 일기도에 사신으로 가 처음으로 조선인 포로 50명을 찾아온다. 이것은 이예의 후손들이 펴낸 [학파선생실기]에 나오는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예의 첫 포로 송환 공적은 1406년이다.

“일본 회례관 이예가 피로되었던 남녀 70여 명을 구해 돌아왔다.”([태종실록] 1406년 윤7월 3일자 기사)

한 줄짜리 기사지만 이때 이예가 회례관(回禮官)이라는 직책에 임명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전기 조정에서는 일본에 회례사·보빙사(報聘使)·통신사·회례관·통신관·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한 명칭의 사절을 파견했다. 그중에서 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공식 외교사절을 일컫는다.

회례사는 막부장군이 사신을 보냈을 경우 그 회답의 목적으로 파견한 사절이며, 보빙사는 일본이 선물 등을 보냈을 때 답례로 파견하는 사절을 말한다. 통신관이나 회례관은 일반적으로 통신사와 회례사보다 한 단계 낮은 직급의 외교사절이다.

경차관은 중앙정부의 필요에 따라 특수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관직이다. 중국의 흠차관에 상응하는 것으로, 공경할 ‘흠(欽)’자와 동의어인 공경할 ‘경(敬)’자를 붙여 지은 직책이다.

경차관이 파견된 것은 태조 때인 1396년 8월 전라·경상·충청 지방의 왜구 소탕을 목적으로 파견한 것이 처음이다. 회례사의 경우 원래 막부장군에게만 파견한 사절이었지만, 나중에는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대내전(大內殿)·일기도주·대마도주 등에게도 파견했다.

이예는 회례관과 회례사, 통신사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직책을 맞아 첫 외교사행이던 1400년부터 마지막 사행이던 1443년까지 44년 동안 40여 회나 조선의 공식 외교사절로 일본에 파견됐다. 이예는 그 기간 동안 700명 가까운 조선 포로를 되찾아왔다.

그러한 활약은 이예의 수완과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태종과 세종 등 조선 초기에 백성의 안녕을 염려하는 영명한 군주들이 이어졌던 덕분이기도 하다.

태종 16년인 1416년 1월, 오늘날 오키나와인 유구국(琉球國)에 왜구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노비로 팔려나간 조선 백성이 많다는 말을 들은 태종은 이예를 유구에 보내 피로인들을 쇄환하도록 명한다. 그러자 호조 판서 황희가 반대를 한다.

“유구국은 수로가 험하고 멀며 사람을 보내면 번거롭고 비용도 대단히 많이 드니 파견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그러자 태종이 꾸짖는다.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정은 본래 귀천에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그대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 그렇게 잡혀간 자가 있다면 그대가 번거롭거나 비용이 드는 것을 따지겠는가?”

황희가 고개를 들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통신관으로 유구국에 파견된 이예는 6개월 만인 7월 23일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다.

“전 호군 이예가 돌아왔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구에서 잡혀가서 유구국에 팔려 넘어간 44명을 찾아왔다. 그중 전언충이라는 자는 경상도 함창현 사람인데 을해년(1395) 14세 나이에 잡혀 팔려갔다가 이제 돌아오니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뒤늦게 상을 치르려 하자 임금이 불쌍히 여겨 겹옷 두 벌, 홑옷 한 벌, 정오승포 10필과 쌀과 콩 15석을 하사했다.”

태종은 대마도 정벌 때 왜구에 잡힌 군사들도 나몰라라 하지 않는다. 정벌이 끝나고 얼마 후 세종이 수강궁(오늘날 창경궁 자리)에 행차해, 상왕(태종)에 문안을 드리고 술자리를 차렸다.

유정현, 박은, 이원, 변계량, 허조, 조말생, 신상 등이 자리에 함께했다. 상왕이 신하들에게 묻는다.

“전일 대마도를 정벌했을 때 갑사 5~6인이 왜적에 사로잡혀 돌아오지 못했소. 도도웅와(都都熊瓦)의 사자가 돌아갈 때, 그들을 돌려보내라고 일러 보냈소?”

태종과 달리 외교적 해법 선호한 세종


▎조선통신사행렬도. 통신사는 조선 시대 국왕이 일본의 실권자인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양국 간 정상외교 사절단을 일컫는다.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파견된 사례는 고려 우왕 1년인 1375년이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신하들은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눈치를 봤다. 조말생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러보내지 않은 줄로 아옵니다.”

상왕은 혀를 차며 곧바로 진무 홍사석을 보내 사신을 쫓아가 일러주라고 명했다.([세종실록] 1419년 10월 26일자 기사)

대마도를 정벌하고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2차 정벌까지 계획했던 태종과 달리 세종은 외교적인 해결을 선호한다. 도도웅와는 대마도주인 소 사다모리(宗貞盛)를 일컫는다.

그는 1418년 부친 소 사다시케(宗貞茂)가 죽은 뒤 도주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사실상 해적들의 수괴인 도만호 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반도 연안에 대한 왜구들의 노략질이 다시 꿈틀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외교적 해결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일본 전문가 이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왜구의 한반도 해안 침탈이 빈번해지자 단속을 촉구하기 위해 이예를 파견하기로 하고 그를 부른다. 세종은 이예에게 대마도에 몇 번이나 갔었냐고 묻고, 이예가 열여섯 번이라고 대답하자 갓과 신발을 하사하며 당부한다.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그대에게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

당시의 외교란 황제가 다스리는 세계의 중심인 중국과 나머지 변방이라는 위계질서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었기에 대단히 단순했다. 따라서 전문적 지식보다는 인격과 교양이 외교관의 자질로 우선시됐다.

대 중국 외교에 주로 유교적 교양과 학문적 깊이가 있고 시문에 능한 인물을 발탁해 보낸 이유가 그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일회성이나 단발성으로 이뤄졌다.

반면, 대 일본 외교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중앙집권화가 이뤄지지 않은 일본의 경우 실질적 권한은 없더라도 엄연한 군주인 덴노(天皇)라는 존재가 있고, 실질적 지배자인 쇼군(將軍), 지역 영주 다이묘(大名) 등이 서로 복잡한 권력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와 일기도만 해도 도주는 물론 도만호 등 다양한 실력자가 권력을 나눠 갖고 있었다. 따라서 대 일본 외교의 핵심인 왜구 통제를 위해서는 이 다양한 실력자들과 개별적 접촉이 이뤄져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들 꺼리는 대마도 사절 마다 않은 이예


▎조선통신사행렬도 중 정사 가마 부분.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태종이 대마도를 정벌하면서 왜구 진압 외에 다른 목적이 없음을 설명하는 사절을 본토의 실력자들에게 파견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렇게 권력관계가 복잡할수록 그러한 사정에 정통한 인물이 필요한데, 조선의 관료들은 대부분 일본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었다.

일본에 대한 사절 파견은 일회성 행사로 그쳤고, 같은 사람이 두 번 이상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일본을 피상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심층적 정보를 획득하기란 불가능했다.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는 귀화한 왜인이나 대마도의 실력자들이 파견한 사절들뿐이었다. 하지만 귀화 왜인들은 일본 정세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위나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대마도 사절도 대마도의 실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에 맞게 윤색한 본토 사정만을 전달하는 사례가 많았다. 게다가 당시 일본과의 접촉 창구였던 대마도의 왜인들은 외교라는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신을 가두고 협박하거나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대신들은 그래서 일본 사행을 꺼리고 가급적 사절로 발탁되지 않기 위해 몸을 뺐다. 세종이 이예를 보내면서 미안해한 이유도 그것이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 험하고 위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두 발 벗고 나서주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세종은 그런 이예를 굳게 신뢰했다. 노고를 위로하며 특별한 선물을 내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예조에서 일본국 회례사와 부사에게 비단 겹옷 한 벌씩을 지어주기를 청하자 이예에게는 목면 겹옷 두 벌을 더 지어주라고 명했다.”([세종실록] 1424년 1월 14일자 기사)

이예는 43년의 공직 생활 중 처벌받은 기록이 없다. 자신이 아닌 상사나 부하의 잘못으로 탄핵을 받은 경우가 세 번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세종은 불문에 부쳐 이예를 보호했다.

한번은 이예가 회례부사로서 회례정사인 직제학 박희중을 수행해 교토에 파견됐다. 그런데 박희중이 귀국하면서 중국인 하나를 숨겨와 조정에 보고도 없이 자기 집에서 종으로 부렸다.

이예, 공직자로서 윤리의식도 투철


▎울산시에 있는 이예의 묘비명 탁본.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나중에 사실이 발각돼 사헌부가 처벌을 상소했지만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1년에 걸친 고행의 사행길을 다녀온 공을 고려한 조치였다. 그러자 다음날 사건의 불똥이 이예에게 튀었다. 사간원에서 다시 박희중의 처벌을 청하면서 이예도 함께 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희중이) 이예 등에게 자기 욕심대로 처신하도록 본받게 하였으니 이는 시정의 무리도 차마 하지 못할 일이거늘, (중략)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속였으니 어찌 용서할 죄이겠습니까. 미세한 공로를 따지기 전에 오직 사법적 판단에 의거해 명백히 죄를 물어 뒷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하시고, 이예 등의 죄도 역시 법에 의해 시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세종실록] 1424년 3월 26일자 기사)

그러자 세종도 어쩔 수 없이 직제학 박희중의 관직을 삭탈했다. 하지만 이예 등에게는 여전히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한 번은 이예 일행을 수행한 통역관이 공금을 횡령한 사건도 있었다. 통역관 윤인보가 귀국하면서 시가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금을 사온 것이다. 뒤로 리베이트를 챙겼음이 분명했다.

이에 형조에서 윤인보의 처벌을 청하면서 지휘 감독 책임을 물어 이예에게도 태 40대를 구형했다. 세종은 윤인보의 처벌은 형조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면서 이번에도 이예의 죄는 논하지 못하게 했다.

상사나 부하의 부정 외에도 이예 자신의 외교적 판단이 논란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예는 1443년 대마도 체찰사로 파견된 마지막 사행에서 제주도 해안을 약탈한 왜구 13명을 체포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의 친척이 몇 명 있었다.

소는 그들이 죽음을 당할 것을 우려해 그들을 제외시키기를 바랐다. 이예는 “단지 도둑질한 사유를 물으려 할 뿐”이라고 설득해 13명 전원을 압송했다. 조선을 노략질한 왜구들을 끌고 간 사례는 수없이 많았지만, 조선 조정은 대마도와의 관계를 고려해 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예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마도주의 부탁으로 서성이라는 중국인 한 명을 함께 데려오면서 문제가 꼬였다.

서성은 왜구들에 피랍된 중국 군인으로, 일본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골치 아픈 존재였다. 조선이 일본과의 외교행위를 비밀리에 한 것은 아니더라도 일일이 명나라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트집을 잡을 구실이 될 수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격론 끝에 서성을 중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왜구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제주도를 침탈하기 전 중국 연안에서도 노략질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 서성과 함께 왜구 13명 전원을 중국으로 압송해야 하게 돼버린 것이다.

그러자 이예가 압송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며 반대 의견을 냈다.

“지난번 왜구들을 체포했을 때 대마도주가 왜구를 죽이려 해서 신이 ‘지금 죽이고 보내지 않으면 조선에서는 그대가 다른 죄인을 죽이고 거짓으로 일컫는다 할 것이다. 수대로 모두 보내면 그대의 정성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마도주가 신의 말을 따르면서 ‘본토의 법은 백 사람이 도둑질을 해도 주모자만 죽이는데 내가 보내더라도 모두 죽이지는 마시오’라고 두 번이나 청했습니다. 이에 신이 ‘어찌 모두 죽이겠는가’라고 대답했는데 한 사람도 대마도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후일에 변고가 생길 것이 염려되옵니다.”

무한 신뢰 ‘이예 지킴이’ 자처한 세종

세종은 이를 이예의 실수라고 규정한다.

“국가의 뜻을 제멋대로 짐작해 ‘어찌 모두 죽일 것인가’라고 단언한 것과 당초 복명할 때 말을 하지 않다가 문제가 되니 이제 와서 고한다.”

하지만 세종은 이번에도 이예의 죄를 묻지 않는다. 이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대마도주가 왜구 전원 압송을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정상을 참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신하들이 이예의 치죄를 요구하고 나올까봐 임금이 미리 자신의 뜻을 밝혀 마무리하도록 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예가) 실수한 것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예의 말이 그러니 대신들이 알지 않을 수 없고 대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고칠 수 없는 것이다. 후일에 대마도주가 만일 묻거든 ‘그대가 서성을 보내서 서성이 명나라에 보고했고 명나라에서 왜구 전원을 압송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보냈다’고 대답하는 것이 어떠한가.”([세종실록] 1444년 2월 5일자 기사)

이미 끝난 일이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고 향후 대책이나 논의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이예에 대한 임금의 신뢰와 애정이 크다는 사실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사실 이예의 ‘실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그것을 문제 삼는 신하들이 없었다. 오히려 성공적인 외교 사례로 평가된다.

조선 중기 때 문신 신흠도 임진왜란의 병화를 겪고도 일본에 대한 대비가 소홀하다고 통탄하는 글 [비왜설(備倭說)]에서 이예의 압송을 성공 사례로 기술하고 있다. 왜가 신라 때부터 우리의 근심거리가 돼왔는데도 불과 몇 번 왜인의 침략을 물리친 사례를 가지고 자만하고 안일에 빠져 있다고 개탄하며 자각을 촉구하는 글이다. 결론은 역시 인사다.

“개혁의 방안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다. 오직 뇌물을 바치는 장수를 기용하지 않으면 되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맡기지 않으면 되고, 총애를 받는 사람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된다.”([상촌집] 제34권)

한마디로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잘 대처할 수 있는 이예 같은 전문가를 중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서 일본 전문 외교관 이예의 활약을 살펴보겠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310호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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