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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 (38) 순천 용산, 아름다운 순천만국가정원에서 

 

순수한 깨복쟁이 시절 친구가 최고다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기가 막히고 귀가 막히는 사연을 산더미처럼 쌓으며 정신없이 살다가, 아름답게 익어가는 나이인 환갑이 다 되어 깨복쟁이 친구들과 만나는 날. 50여 년 전, 장성 백암골 장성댐과 황룡강의 운치와 기를 듬뿍 받고 자랐던 그 코흘리개들이 순천시 황정면 죽창리 첩첩산중에 자리한 산장에 하나둘씩 모여 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옛날 한 떨기 수선화처럼 수수하던 그 깨복쟁이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이야기를 한 보따리 가슴에 싸들고 먼 길을 달려갔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병풍을 두르고 감나무, 밤나무, 배나무, 조롱박에 야생화가 꽃대궐을 이룬 그림 같은 집에 도착하자 파란 잔디 위에 삼겹살이 지글지글 노릇노릇 성대한 만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하늘엔 은은하게 달빛이 비치고 계곡의 시냇물은 졸졸졸 앙상블의 세레나데를 부르는데, 타오르는 모닥불은 허물없이 만난 친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 옛 이야기로 무르익어가자 50여 년 세월을 거슬러 너도 나도 어릴 적 그 얼굴로 되살아났다. 이 순간만큼은 으리으리한 건물에 고뇌에 찬 회장님도, 소를 키우는 목동도, 식당의 사모님도, 물건 파는 사장님도, 하루하루 모가지를 저당 잡혀 사는 샐러리맨도, 시장터 아줌마와 아저씨도, 그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로서의 멍에를 다 벗어 던지고 코흘리개 동심으로 돌아가 어깨동무를 하고 엉덩이로 자기 이름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신기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마음만 이팔청춘이 아니라 시들어 가는 육체도 젊은 청춘처럼 다 새파래지는 듯했다.


누가 봐도 순수하고 여리여리한 도순이가 자기 마을을 못 지나가게 길목을 잡고 텃세를 부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느새 아련한 초등학교 시절 앙증맞은 도순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소풍 가서 장기자랑을 하던 때 구슬픈 목소리로 ‘울어라 기타줄아’를 부르던 그 모습, 운동회 때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목청껏 ‘이겨라 이겨라’를 외쳐대고는 달리기 하다 넘어져 온몸으로 결승선에 골인하던 모습. 저 멀리 구산마을 구심재 높은 산에 올라 바위옷 이끼를 따오면서 힘들어하던 얼굴, 4학년 고고한 악바리 임옥란 담임선생님에게 수업종이 울렸는데도 일부러 늦게 들어왔다고 뒤지게 매 맞던 모습. 엄격하고 무서웠던 2학년 오현석 담임선생님은 본인의 친딸이 숙제 안 하고 까분다고 눈보라 치는 한겨울에 운동장 연설대 위에 무릎을 꿇리고 손을 번쩍 들게 하는 벌을 줬었다. 하굣길에 하천을 따라 집에 가면서 물고기 잡고 동무들과 낫치기 하고 멱을 감다 3번이나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났던 추억 속 그 무시무시한 장면들도 생각났다.

초등학교 5~6학년 때는 남중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신작로를 함께 걸었었다. 술고래 양용해 담임선생님과 황룡강 뚝방길을 걸으며 조개를 잡던 기억.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황룡강은 금방이라도 넘칠 듯 넘실대곤 했다.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쉬어가는 정거장인 승만이 집에서 삼년고개 놀이와 닭싸움을 하던 파릇파릇하고 씩씩한 개구쟁이 때 그 모습도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12번째 내 생일날 골키퍼를 하다 축구화에 눈을 얻어맞아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었던 그 모습까지…… 어느 해였을까. 학교 앞 고속도로 터널 아래 물이 가득 찼던 장마철. 예쁜 여학생을 등에 업고 건너던 그때, 생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향기와 가슴 설렘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추억 속을 헤매다 어느새 비몽사몽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깨어나 물어보니 노래하고 춤추며 밤을 하얗게 새운 친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 그렇게 그날 친구들은 인생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았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8시, 우리는 세계적인 명소로 자리 잡은 순천만국가정원을 찾아 관람했다. 이국적이고 멋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연 속에 세계 각국의 여러 정원이 잘 어우러져 인공미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끽하던 우리에게 안타깝게도 작별할 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점심으로 인근 식당에서 맛있게 메기탕을 먹고는 너도나도 먼 거리까지 운전할 생각에 하나둘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게 세상 이치라고 하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마음 맞는 좋은 친구들과 더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일까? 아쉽고 아쉬웠다.

나는 순천 인근에 사는 몇몇 친구들을 꼬드겨 순천만 넓은 갈대밭을 가로질러 습지 끝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용산 전망대를 오르기 시작했다. 용산은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동쪽에 있는 높이 77m의 낮은 산으로 마치 용이 순천 도심을 향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용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용머리산’이라고 불렀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순천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다섯 마리 용 중 한 마리가 여수 여자만(汝自灣)으로 빠져나가자, 그 용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조례저수지(호수)를 조성했다고 한다. 여자만으로 빠져나갔던 용이 도심을 향해 오던 길에 순천만의 경치가 아름다워 머물렀기에 용의 머리 방향이 도심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용산을 오르며 어릴 적부터 속이 깊어 친구라기보다 누이 같은 숙이 친구가 들려준 잔잔한 인생 이야기가 감동을 줬다. 시부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였다고 했다. “참, 네가 교양 있고 어질구나… 내 딸이 되어줄래.” 그 한마디에 숙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혼을 결심했단다. 숙이는 7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살 먹은 남동생을 돌보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하게 되면서 초등학교 입학이 늦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꿋꿋하게 이겨내며 주경야독에 정진해 학문과 교양이 남달랐는데, 안목이 높으신 예비 시어머니가 단번에 그것을 알아보신 것이다. 그렇게 시어머니와 마음이 맞아 평생을 며느리가 아닌 딸로서 친하게 지냈지만 숙이도 사람인지라 이상과 꿈과 목표가 다른 남편과는 갈등도 겪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극정성 어르신을 돌보고 신앙심으로 그 어려움을 다 극복해 지금은 아들딸 시집 장가 잘 보내고 행복하게, 자유롭게 살고 있다며 엷은 미소를 띤다. 현모양처의 표본이라고 할까, 세상의 번뇌에서 해탈해 웃음 짓는, 부처님 같은 예수님 같은 미소였다.

그렇게 오순도순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용산 꼭대기 전망대였다. 내 눈 앞에 드넓은 순천만 갈대밭이 가없이 펼쳐졌다. 그지없이 아름답다는 순천만 9경의 한 자락이다. 순천만 1경이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30리 순천만 갈대길이다. (참고로 순천만 2경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S자 갯골, 3경은 바다의 검은 속살, 갯벌, 4경은 둥글게 둥글게, 원형 갈대군락, 5경은 대대포구 새벽안개, 순천만 무진, 6경은 순천만 겨울 진객, 흑두루미, 7경은 갯벌 속에 빠진 해, 와온 해넘이, 8경은 소원을 빌어봐, 화포 해돋이, 9경은 순천만의 화려한 미소, 칠면초라고 한다.)


용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남해 바다가 파랗게 넘실넘실,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린다. 고개를 15도쯤 돌리자 넓은 순천 습지가 아늑하고 평화롭게 펼쳐진다.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답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순천만 갈대……. 내 기억 속의 그 연약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키 큰 갈대가 아니다. 다들 고만고만 천진난만했던 우리 어린 시절처럼, 그저 평범한 풀로만 보인다. 모양과 생김새도 논에 심어진 벼와 비슷하다. 하지만 똑같이 보이는 그 속에 참으로 오묘하고 심오한 세상만사의 진리가 숨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만물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어느 구름 속에 비가 들어 있는지 모른다. 자랄 때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 성숙하고 원숙함이 무르익으면 개개인이 가진 본연의 천성이 뚜렷이 나타나는 법이다. 지금은 새파란 저 갈대들도 자연에 순응하고 하늘의 이치에 맞게 성장하여 소박한 갈대로 무르익다가 시들어 가고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갈대는 자기 속에 귀한 것을 품고 키워서 어떤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남다른 의지와 도전으로 이겨내어 그만의 멋스럽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꽃피우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향기 나는 갈대가 오늘 친구들을 용산 전망대로 안내해 준 멋진 친구, 숙이가 아닐까!

드넓은 순천만 갈대밭을 가슴에 담은 뒤 우리는 전망대를 천천히 내려와 순천만이 바라다 보이는 2층 카페에 앉았다. 다시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옛 이야기와 세상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장북초등학교 30회 동창들의 1박 2일 아름다운 여행이 순천만 석양처럼 저물어 갔다. 행복한 날이었다. 역쉬! 순수했던 시절 깨복쟁이 초등학교 친구들이 최고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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