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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4)] ‘마왕’ 신해철, 뉴 밀레니엄 시대를 노래하다 

날아라 병아리! 꿈꾸는 청춘 응원한 통쾌한 카리스마 

하이틴 스타에서 경이로운 음악 세계 펼치는 뮤지션으로 변신
젊은 세대 멘토이자 속 시원한 논객으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2024년은 ‘마왕’ 신해철(1968~2014) 사망 10주기를 맞는 해다. 신해철의 삶과 음악은 뉴 밀레니엄 시대를 열어젖히며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꿈꾸는 젊음을 보듬었다. /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내가 아주 작을 때 / 나보다 더 작던 내 친구 / 내 두 손 위에서 노래를 부르면 / 작은 방을 가득 채웠지 / 품에 안으면 따뜻한 그 느낌 / 작은 심장이 두근두근 느껴졌었어 /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 하늘을 날고 있을까 / 굿바이 얄리,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 올해도 꽃은 피는지”(넥스트, ‘날아라 병아리’, 1994)

처음으로 죽음을 보았던 1974년 봄의 기억을, 신해철은 중저음 목소리로 담담하게 노래했다. ‘날아라 병아리’는 1994년에 나온 넥스트 2집 [The Being]의 타이틀곡으로 쓰였다. 이 음반은 1990년대 최고의 명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대학가요제 출신 하이틴 스타가 시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는 상업적 성공이 어른거리는 솔로 가수의 길을 마다하고 돈 안 되는 록밴드를 결성해 경이로운 음악 세계를 펼쳤다.

노란 병아리 ‘얄리’를 품어주던 그의 따뜻한 음악은 2000년대에 진정성 있는 소신 행보로 이어진다. ‘나보다 더 작던 내 친구’, 어리고 힘없는 사람들과 동행했다. 라디오와 인터넷으로 ‘고스트스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젊은 세대의 멘토이자 인디 밴드의 창구로 활약했다. 때로는 세상과 싸우며 병아리들이 설 자리를 마련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TV토론과 선거유세에 나섰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 짝’ 응원 구호도 만들어 냈다.

신해철이 세상에 던진 질문들


▎1988년 12월 24일에 열린 MBC [대학가요제]에서 신해철은 밴드 무한궤도로 참가해 ‘그대에게’를 부르고 대상을 받았다. / 사진:MBC [대학가요제] 캡처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회 없노라고 / 그대여”(무한궤도, ‘우리 앞의 생이 끝나 갈 때’, 1989)

신해철의 음악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그는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밴드 ‘무한궤도’로 참가해 대상을 받았다. 수상곡은 아버지에게 걸릴까 봐 한밤중에 이불 뒤집어쓰고 기타와 건반을 뚱땅거려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각종 공연장과 경기장에서 전주만 흘러나와도 열광하는 노래 ‘그대에게’다. 이듬해 무한궤도 1집을 내놓으며 신해철은 ‘우리 앞의 생’에 질문을 던진다. 1991년 ‘재즈카페’에서는 ‘내 노래는 누굴 위한 걸까’ 묻는다.

질문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다. 예술가에게 호기심은 심장 박동과 같다. 그는 자신의 심장 박동에 귀 기울였고, 그 마음의 소리를 따라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 운동이 고초 끝에 결실을 거둔 1980년대를 지나 세상은 뉴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격변을 예고하고 있었다. 개성이 뚜렷한 X세대와 컴퓨터에 능한 N세대가 나타나 문화적 욕구를 뿜어내면서 대중음악의 영향력이 커져 나갔다. 신해철은 새 시대와 신인류를 노래했다.

“한 손엔 휴대전화 허리엔 삐삐차고 / 집이란 잠자는 곳 직장이란 전쟁터 / 회색빛의 빌딩들 회색빛의 하늘과 회색 얼굴의 사람들 / This is the city life / 아무런 말 없이 어디로 가는가 /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넥스트, ‘도시인’, 1993)

넥스트(N.EX.T)는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표방하며 신해철이 결성한 록밴드였다. 록밴드의 미덕은 낡은 도덕과 관습에 도전하고 금지된 욕망을 통쾌하게 대변하는 데 있다. 넥스트는 록에 테크노, 국악, 오케스트라 등을 접목하고 파격적인 시도를 거듭해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뉴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교차하는 기대와 불안을 파고들며 공감대를 넓혀나갔다.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친구가 돼주었다.

1997년 외환 위기와 연쇄 부도로 한국경제는 호된 시련을 겪었다. 이후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고용 불안을 감내해야 했고,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문제가 고질화됐다. 수많은 근로자가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를 잃었고, 수많은 가정이 경제 문제로 파탄 나 해체됐으며, 수많은 청년이 취업 대신 알바를 전전하게 됐다. 넥스트는 음악으로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남들이 뭐래도 네가 믿는 것들을 포기하려 하거나 움츠러들지 마 / 힘이 들 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 앞만 보며 날아가야 해 /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 / 변명하려 입을 열지 마 그저 웃어 버리는 거야 /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너의 날개는 펴질 거야”(넥스트, ‘해에게서 소년에게’, 1997)

여기서 소년은 남자 청소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꿈을 펼치려는 사람이다. 그래서 신해철의 음악을 듣는 어른은 소년이고, 신해철의 음악을 듣는 소년은 어른이다. 이 노래가 수록된 4집 [Lazenca :A Space Rock Opera]를 끝으로 넥스트는 잠정적으로 해체했다. 1998년 신해철은 음향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성큼 다가선 뉴 밀레니엄 시대의 음악적 청사진을 그리려 했을 것이다.

세기말은 ‘내일로 가는 문’


▎신해철은 록에 테크노, 국악, 오케스트라, 사이버펑크를 접목하는 등 새로운 음악적 실험으로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새천년은 뜻밖의 두려움을 몰고 왔다. ‘Y2K 문제’가 대두되며 2000년 1월 1일에 대재앙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초창기 컴퓨터 코드는 날짜를 두 자리로 입력(ex. 1970년은 70, 1980년은 80)했기 때문에, 1999년(99) 다음에 올 2000년(00)을 1900년(00)으로 잘못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른바 ‘밀레니엄 버그’다. 그렇게 되면 2000년 1월 1일에 컴퓨터 데이터가 날아가서 통신시스템이 마비되고,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지며, 공공서비스도 중단될 것이라고 온 세상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안 그래도 새천년이 도래하면서 세상이 멸망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이다. 이 종말론에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 보이는 밀레니엄 버그가 엮이면서 공포심이 배가됐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옛 컴퓨터 코드를 추적해 네 자리로 수정하는 데 엄청난 비용을 들였다. 덕분에 IT업체들이 호황을 누리며 떼돈을 벌었다. 물론 이렇게 총력을 기울여도 Y2K 문제가 해결돼 버그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드디어 1999년 12월 31일 밤이 지나고 2000년 1월 1일 아침이 밝았다. 정부와 기업 관계자들이 밀레니엄 버그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밤을 지새웠지만, 우려했던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지엽적인 오류와 고장이 보고됐지만,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심지어 러시아처럼 Y2K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나라들조차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세상은 전날과 다를 바 없었고 새천년은 산뜻하게 막을 올렸다.


▎2001년 4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신해철은 라디오와 인터넷에서 ‘고스트스테이션’을 진행했다. 그의 카리스마에 반한 청취자들은 ‘마왕’이라고 부르며 열렬히 따랐다. / 사진:SBS
호기심 많은 신해철도 이 시점에 꽤 흥미를 가졌던 것 같다. 그는 영국 유학 중에도 ‘크롬(Crom)’이라는 활동명으로 음반 프로젝트를 이어 나갔다. 2000년 1월에는 자신이 프로듀싱한 영화 [세기말]의 OST 앨범을 발표했다. 세기말(世紀末)은 한 세기의 끝 무렵을 일컫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도덕이 문란해지고 퇴폐적인 풍조가 일어난 유럽의 19세기 말엽을 가리킨다. 영화는 그 역사적 의미를 20세기 말 한국 사회에 투영해 도덕적 문제와 기성세대의 위선을 냉소적으로 그려냈다. 그럼 신해철은 어떤 음악적 메시지를 남겼을까?

“내일로 가는 문을 찾아 / 헤매다 지쳐 잠들어 다시 눈뜨면 / 변한 게 없는 오늘 오늘 다시 오늘 / 이렇다 말할 만한 추억도 없이 / 이대로 흘러가고 있는 내 청춘 / 안타까워도 내겐 선택이 없구나 / 느끼지 않는 법을 배운 후엔 / 눈물이야 말라 버렸지만 / 웃는 법조차 함께 잊었다네”(신해철, ‘내일로 가는 문’, 2000)

신해철은 기성세대의 타락과 부조리로 인해 선택의 기회를 상실하고 헤매는 청춘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는 질문한다. 거울에 비친 청춘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은 그 마음 때문일까, 거울 때문일까? 묵시록이나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세기말의 풍경 속에서 희망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세기말이 새 시대로 들어서는 문턱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말세’에 주눅 들지 말고 ‘내일로 가는 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마왕, 대한민국을 응원하다


▎신해철이 2014년 7월 JTBC [비정상회담] 녹화에서 ‘꿈과 현실’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통쾌한 언변으로 답답한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최고의 논객이었다. / 사진:JTBC
2001년 4월 신해철은 라디오에서 ‘고스트스테이션’ 진행을 시작한다. 노란 병아리 얄리를 품에 안던 따뜻한 마음으로 꿈꾸는 사람들과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젊은 세대의 멘토이자 인디 밴드의 창구가 돼 내일로 가는 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에 반한 청취자들은 그를 ‘마왕’이라고 부르며 열렬히 따랐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고 일어설 힘이 없고 세상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거울을 보면 나를 믿는 단 한 사람이 그 안에 있어.”

세상을 먼저 살아본 형이자, 한때 좀 놀아본 오빠로서 마왕은 청춘의 아픔에 공감하고 유쾌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업적보다 행복이 우선이라고, 타협에 길들여지지 말라고,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때로는 세상사를 논하고 거침없이 비판하기도 했다. 젊은 세대와 인디 밴드를 향한 신해철의 응원은 얼마 후 ‘거국적으로’ 확대됐다.

2002년 월드컵을 맞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스 ‘붉은악마’가 응원가 앨범 [꿈★은 이루어진다]를 내놓았다. 이 음반의 1번 트랙에 신해철이 만든 ‘Into The Arena’가 수록됐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 짝’ 응원 구호가 담긴 곡이다. 이 응원법은 2002년 월드컵에서 큰 호응을 얻으며 일약 국민 구호로 떠올랐다. 지금은 축구는 물론 모든 종목 대표팀 경기에 ‘대~한민국! 짝짝짝 짝 짝’ 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실 이 소리에는 신해철이 유학 가서 갈고 닦은 음향 엔지니어링 기법이 집약돼 있다. 그는 대학로에서 천장이 높은 극장을 빌려 울림과 파형을 분석하고 음향 설비를 세팅했다. 그리고 붉은악마 회원 500명을 모아 함성과 박수를 녹음했다. 마이크 기종을 바꿔가며 겹치게 녹음해서 소리를 펼치면 수만 명이 내는 소리처럼 들리게 했다. 서포터들이 치는 북소리도 컴퓨터로 편집해 웅장하게 나오도록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드라마틱한 순간을 완벽한 사운드로 뒷받침한 것이다. 덕분에 마치 축제와 같은 국민 응원전을 펼칠 수 있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줄 알면서도


▎2018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신해철거리’가 조성된 가운데 거리 중앙에 신해철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 사진:경기관광공사
꿈꾸는 젊음을 지켜주려면 응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과 싸워나가며 그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좋은 무기였다. 넥스트 3집 [The World]에 수록된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는 동성동본 혼인 금지를 사회적 배경으로 삼았다. 법적 문제와 주위의 반대에도 힘겹게 지켜나가는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신해철의 노래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적 논의를 끌어내는 데 이바지했다. 민법의 동성동본 혼인 금지 조항은 1997년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고 8촌 이내 근친혼을 금하는 것으로 개정됐다.

민감한 사회 이슈에 대한 의견 표명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줄 알면서도 꿋꿋하게 소신을 밝혔다. 신해철은 MBC [100분 토론]의 단골 출연자였다. 간통죄 폐지와 학교 체벌 금지 등을 재치 있으면서도 논리적으로 주장했다. 여론조사 결과 ‘비정치인 최고 논객’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답답한 국민의 속을 뻥 뚫어주는 통쾌한 논객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국회를 유해 장소로 지정하고 뉴스를 차단하는 게 좋을 것 같다. 19금이다.”(2008년 12월 18일 MBC [100분 토론] 400회 특집)

신해철은 사회적 발언을 하거나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게 다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와 사회와 음악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음악이 이상해진다고 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노무현 후보 지지 유세와 찬조 연설에 나선 것도 어찌 보면 그다운 일이었다. 한국 사회의 낡은 권위에 도전한다는 측면에서 노무현과 신해철은 ‘닮은꼴’이었다.

“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한 게 자랑인 것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죠. (유세장에서) 자신이 뜻하는 바를 현실 생활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제 마음속에서는 대단한 희망의 싹이었어요.”(신해철 유고집, [마왕 신해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다고 해서 뭔가 바라거나 하지도 않았다. 문화계의 바람 같은 것은 누가 정권을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 싸워서 얻어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시혜물’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방침을 정하자 신해철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동료들과 함께 ‘전쟁 반대와 파병 철회 촉구를 위한 대중음악인연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노래”라고 호소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그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2012년 서거 3주기에 신해철은 신곡 ‘Goodbye Mr. Trouble’을 발표했다. 작사, 작곡, 편곡, 노래, 연주, 녹음까지 오롯이 혼자서 감당한 추모곡이었다. 그 고독한 작업 과정은 인간 노무현을 대면하고 온전히 떠나보내는 그만의 탈상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대가 밉고 또 밉고 또 미워서 / 고맙다는 말 대신 미안타는 말 대신 / 그대가 남겨둔 화분에 눈물을 뿌린다 / Goodbye Mr. Trouble / 남겨진 일들은 남은 자들의 것일 뿐 / 끝까지 살겠소 / 죽어도 살겠소 / 우리 살아서 그 모든 걸 보겠소”(신해철, ‘Goodbye Mr. Trouble’, 2012)

음원차트 역주행한 ‘민물장어의 꿈’

신해철이 국내에서 활동 반경을 넓히는 동안 그의 음악은 국제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영국 유학 시절에 내놓은 앨범 〈모노크롬〉의 수록곡 ‘Machine Messiah’(1999)를 헤비메탈의 전설 주다스 프리스트가 ‘Metal Messiah’(2001)로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헤비메탈의 원조 격인 그룹이 탐낼 만큼 신해철의 음악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해철은 2004년 넥스트를 재결성하고 경이로운 음악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의욕적으로 음반과 방송을 준비하던 2014년 가을의 일이었다. “하도 욕을 많이 먹어 필시 영생할 것”이라고 장담한 바 있건만 어이없는 의료사고로 그해 10월 27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팬들의 충격과 아쉬움은 컸다. 1만5000여 명의 조문객이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을 배웅했다. 본인의 장례식장에서 틀어달라고 했던 노래 ‘민물장어의 꿈’이 각종 음원차트를 역주행하며 마왕이 떠나는 길에 울려 퍼졌다.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는 /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2002)

2024년은 고인의 10주기를 맞는 해다. 신해철의 삶과 음악은 뉴 밀레니엄 시대를 열어젖히며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꿈꾸는 젊음을 보듬었다. 그의 작업실이 자리했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는 ‘신해철거리’가 조성돼 있다. 올해는 그 길을 걸으면서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야지. “굿바이 얄리, 언젠가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줘.”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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