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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7)]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금강산 

고려와 조선 때도 버킷리스트 1위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말로만 듣던 금강산, 꿈속에서마저 그리워해
사신들 유람 원해 조선 조정 애 먹어… 그림이라도 얻으려 애걸복걸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1734년 겨울의 금강산 전경이다. 전체적으로 원형구도 속에 맨 위의 비로봉, 중심의 만폭동 그리고 맨 아래 장안사가 수직으로 배치돼 있다. 그림 왼쪽 숲이 무성한 부드러운 토산과 왼쪽의 예리하게 뾰족한 암산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겸재는 금강산을 가장 많이 그렸고 가장 잘 그렸다. / 사진:삼성리움미술관
해발 1638m의 금강산이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니지만,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는 명성을 부인할 사람은 결코 없을 터다.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관광지로 항상 손꼽히는 곳이다. 오늘날뿐 아니라 예로부터 그랬다. 특히 삼국시대에 신라의 화랑들이 즐겨 금강산을 유람했다. 그 중에서도 술랑, 남랑, 영랑, 안상 등 네 사람의 화랑이 사선(四仙)으로 불리며 유명했다. 강원도 고성에 이들이 사흘 동안 놀고 갔다는 삼일포(三日浦)가 있고, 지금은 북한 땅인 통천에는 그들의 이름을 딴 사선봉(四仙峰)이 있다. 사선 중에서도 영랑은 영랑호와 영랑봉이라는 개인 이름을 따로 남겼다.

이후 고려와 조선 때도 생전에 가보고 싶은 곳 버킷리스트 중 1위는 늘 금강산이었다. 조선 정조 때 사재를 털어 극심한 태풍 피해를 입은 백성을 구제한 제주의 만석꾼 김만덕을 임금이 치하하며 소원을 물었더니, 금강산 구경이라고 대답했다는 얘기가 전할 정도다.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죽기 전 한번은 금강산에 올라야 한다는 속설까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금강산의 명성이 자자했다. 해외여행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던 옛날에도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말로만 듣던 금강산을 꿈속에서도 그리워했다. 그 유명한 중국 북송 때 시인 소동파가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게 내 소원(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라 말했다고 전해질 정도다. 하지만 이 말은 믿기 어렵다. 고려에 악의적이고 호전적 태도를 일관되게 고수했던 소동파가 금강산을 보고싶어 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위해 고려인으로 태어나길 바라기까지 했다는 것은 지나치다. 아마도 누군가 지어낸 말에 소동파의 이름을 갖다 붙였을 것이다. 말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도 많은 중국인이 금강산을 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과거 중국이나 일본에서 금강산 여행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지만, 운 좋게도 사신 등 국가 업무로 조선에 올 기회를 가질 수 있던 관리들은 열이면 열 모두 금강산 관광을 희망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국이나 일본 사신들이 금강산 유람을 원해 조선 조정이 애를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태종 2년(1402) 명나라에서 온 사신 온전과 양영 일행도 금강산을 가고자 했다. 두 사신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머무르고 있던 태상왕 이성계를 알현한 자리에서 금강산에 가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그들을 만류했다.

“얼음이 얼어서 가기 어려울 것이오.”

그날은 음력 10월 19일로 이미 금강산 봉우리와 계곡에는 눈이 쌓이고 얼음이 얼었을 때였다. 사신들이 겨울에 험한 산에 오르다가 행여 미끄러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칫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었기에 조선 조정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공식 사신이야 정사와 부사 두세 명이지만 수행원까지 따지면 최소 수십 명에 이르는 것이 사신 행렬이다. 요즘처럼 등산화나 아이젠이 있는 시절이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겨울 산에 오르다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못 가게 막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런데 회암사의 한 승려가 눈치 없이 사신들의 수행원에게 귀띔을 한다.

“금강산은 지금 이 계절이 가장 아름답다오.”

사신들 금강산행 희망은 조선 조정의 골칫거리

금강산의 설경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나. 이 말을 전해들은 온전과 양영은 금강산행을 고집했고 기어이 뜻을 이뤘다. 다행히 별다른 사고는 없었지만 중국 사신들 일행을 안전하게 수행하고 대접해야 하는 조선 관리들이 치러야 했을 고생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 이처럼 외국 사신들의 금강산행 희망은 조선 조정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듬해 조선을 찾은 중국 사신 황엄과 조천보, 고득 역시 금강산 구경을 원했다. 때는 음력 4월 17일이라 환상적인 꽃놀이를 즐길 수 있을 터였다. 겨울보다 위험은 덜 하겠지만 잔치 비용은 더 들 터였다. 당시 사신들과 조선 관리의 대화는 조선 조정의 고민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대들은 어째서 금강산을 보려고 하시오?”

“금강산은 모양이 불상과 같다고 하기에 보고자 하는 것이오.”

“산은 천지가 개벽할 때 이미 만들어졌고 부처는 산이 생긴 지 훨씬 뒤에 태어났는데 어찌 산이 부처를 닮을 수 있겠소.”([태종실록] 1403년 4월 17일자 기사)

일본 사신의 경우 안전과 비용 외에도 안보 문제가 따랐다. 성종 16년인 1485년 대마도주 종정국이 승려 앙지를 보내 금강산행을 청했다.

“신이 오랫동안 금강산 유점사를 우러러 예불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섬을 다스리는 정무를 맡아 귀국의 동쪽 울타리로서의 임무를 게을리 할 수 없으므로 몸소 갈 수가 없어 한스러운 일입니다. 이에 앙지화상을 특사로 삼아 소향을 보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 아뢰어 금강산 유점사에서 신을 대신해 분향할 수 있게 해주소서.”([성종실록] 1485년 10월 8일자 기사)

이에 조선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우선 “외국인에게 내지를 보여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나왔다. 승려 앙지가 조선의 정세와 지리를 파악하려는 일본의 첩자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앙지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에 가려는 것은 깊은 불심 때문이므로 막을 수 없다”는 반박도 있었다. “앙지의 여정에 회양·원주·충주를 지나게 하면 모두 험한 길이므로 우리나라를 범할 수 없다고 여길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이에 성종은 영돈녕(정1품) 이상의 고위급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했고,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등은 앙지의 금강산행을 허락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사헌부대사헌 이경동 등이 다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중국과 일본 사신들 한사코 금강산 구경 고집


▎한국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의 ‘금강’. 전통적 아름다움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려 한국의 실경 산수를 독보적 화풍으로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산은 금강산을 열 번도 넘게 다녀왔다고 한다. 이 그림 외에도 독수리 시점으로 금강산을 내려다 본 ‘천지인’, 물고기가 돼 어안렌즈로 바라본 듯 금강산을 동그랗게 표현한 ‘금강화개’ 등 다양한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 사진:가나아트센터
“앙지를 따르는 자가 많고 호송관이 있어야 하는데 지나는 고을들의 사정이 좋지 않아 비용을 부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포구에 머무르는 왜인들을 오랫동안 먹이는 데 재정을 허비함은 옳지 않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흉년이 들어 산적들이 많이 출몰하는데 행여 변이라도 당하면 왜국과 외교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모든 왜인들이 이를 본받아 잇따라 구경하기를 원하면 전하께서는 어찌 일일이 허락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외교 이외에 재정과 선례의 문제를 들어 일본 사신의 금강산행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다시 논의한 한명회 등 고위 대신들은 “이미 허락했으니 돌이키기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그러면서도 불가 의견에 일리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에 노사신과 정난종이 꾀를 냈다.

“예조로 하여금 산중에 눈이 쌓여 길이 막히고 왕래가 불가하다고 알아듣도록 설득함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왕이 교지를 예조에 내려 앙지 화상에게 이르게 했다.

“너의 도주가 우리나라에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우리도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한다. (중략) 네가 지금 도주의 청을 간절하게 아뢰었으므로 금강산을 구경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은 산길이 매우 험하고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여행하는 사람들이 사고로 죽기도 한다. 따라서 네가 금강산에 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 만일 길에서 그와 같은 환란을 겪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이런 사실을 알면서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린하면서 서로 후하게 대하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앙지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칠십이 된 노승이 어찌 대국에 다시 오겠습니까? 금강산을 구경하다가 눈 속에서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앙지의 수행원들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비록 우리 스승과 한 구덩이에서 같이 죽더라도 가서 구경하기를 바랍니다.”([성종실록] 1485년 11월 2일자 기사)

겨울철에만 금강산행을 말린 게 아니었다. 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종 9년인 1427년 명나라에서 세 명의 사신이 왔다. 이들은 오는 도중 의주 송산의 반야사를 구경하고서도 금강산 유람을 희망했다.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띤 원접사 이맹균이 보고했다.

“이번 4월 초2일에 중국 사신 창성과 백운이 최치운에게 ‘금강산을 가 보고자 하는데 경기에서 며칠이나 걸리는 길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치운이 대엿새는 잡아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이 이를 듣고 치운에게 ‘사신이 만일 다시 묻거든 길이 험난해 여름철에는 유람 다니기가 불가하다고 대답하라’고 일렀습니다.”([세종실록] 1427년 4월 8일자 기사)

“금강산 구경하다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금강산 장안사 전경. / 사진:이훈범
여름이면 산행이 겨울보다 훨씬 수월하지만 사신 일행을 수발하는 비용이 많이 들었고 농번기에 백성들을 동원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가급적 금강산행을 포기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다시는 얻지 못할 기회였기에 사신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금강산을 구경하려 했다. 창성 등 사신 역시 기어이 금강산을 유람했다. 창성이라는 자는 5년 뒤인 1432년 사신으로 왔을 때도 금강산에 다시 올랐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외국 사신들이 그토록 금강산을 보고 싶어 했을까. 중국에는 예로부터 ‘오악(五岳)을 오르면 천하에 더 이상 구경할 산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5대 산이 있다. 태산·화산·형산·항산·숭산이 그것이다. 이어 “황산을 보고나면 오악도 볼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황산이 있다. 그밖에 이백, 소동파 등 많은 시인이 노래한 여산, 보현보살의 도량이라 일컫는 아미산, 주자가 후학을 양성한 요람이던 무이산, 해발 3058m의 오대산 등이 있다.

일본이야말로 산의 나라다. 일본의 상징이자 최고봉인 후지산(3776m)을 비롯해 해발 3000m가 넘는 산이 21개, 해발 2700m가 넘는 산은 90개에 달한다. 일본 알프스라고 불리는 곳이 있을 정도다. 남북으로 길어 다양한 기후조건을 갖춘 일본 열도에는 지방마다 특색 있는 산들이 많다. 후지산 말고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이 세 곳이나 더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너도밤나무 원시림을 품고 있는 시라가미산지, 종교 성지로 이어져 온 기이산지, 높이 1000m가 넘는 산들이 40여 개에 달하는 야쿠시마가 그것이다.

그런데도 중국과 일본의 사신들이 그토록 금강산 구경을 열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임금들도 그것이 참 궁금했던 모양이다.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다 태종이 묻는다.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속언에 이르기를 중국인들은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을 보는 게 소원이라는데 정말 그러한가?”

하윤이 대답했다.

“금강산이 동국에 있다는 말이 [대장경]에 실려 있어 그런 것입니다.”

태종이 무릎을 쳤다.

“옳거니!”([태종실록] 1404년 9월 21일자 기사)

금강산이라는 명칭은 7세기 말~8세기 초 실차난타가 번역한 [팔십화엄경]에 등장한다.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는 데 예부터 보살들이 그곳에 머물렀다. 지금은 법기보살이 거처하며, 1만2000여 권속과 함께 머물며 항상 설법을 한다.”([팔십화엄경] 제45권)

불교 경전에도 등장하는 동아시아 불교 성지

법기보살은 담무갈보살이라고도 한다. 담무갈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모가타’의 음역으로, 법을 일으킨다는 뜻이므로 법기보살로 번역됐다. 금강산 1만2000봉이라는 속설은 담무갈보살이 거느리는 1만2000 권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같은 화엄경 이야기는 금강산 신앙으로 발전했고, 특히 원 간섭기에 크게 유행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인들은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금강산 보유국이라는 자부심으로 금강산 신앙을 적극 수용했다. 그것이 이웃나라에까지 퍼져 금강산은 동아시아의 불교 성지로 인식됐다.

특히 법기보살에 대한 원나라 황실의 신앙이 지극한 나머지 금강산 일대 사찰에 대한 적극적 지원으로 이어졌다. “금강산으로 향과 폐백을 가져오는 황제의 사신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고 이곡은 전한다.(이곡 [가정집] 권6 ‘금강산장안사중흥비’)

그 중에서도 표훈사는 담무갈보살이 금강산 동북편 봉우리에 머물고 있다고 해서 법기 신앙의 중심지가 됐다. 법당인 반야보전 내부에 여섯 개의 법기 보살상을 안치하고, 불상들은 모두 법당 동쪽의 법기봉을 향하게 했다. 표훈사는 원나라 영종과 태후, 태자 등이 시주해 크게 중창했으며 순제는 향로와 향합을 하사하기도 했다. 순제의 황후가 된 고려 출신의 기황후는 장안사에 크게 시주를 했다. 중국인 장인을 보내 불전을 수리하고 은으로 쓴 대장경을 하사했다.

금강산 신앙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특히 세조는 순행 중 직접 금강산에 올라 담무갈보살에 참배하기도 했다. 그해 돌아가는 사신을 통해 일본 국왕에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에서 세조는 금강산의 신묘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문(洞門)에 들어가자 서기가 뻗치고 상서로운 구름이 드리웠고, 하늘에서 사화(四花)가 내려 크기가 오동잎과 같고 감로가 뿌려서 초목이 목욕한 것 같았으며 노란 햇빛 아래 눈에 보이는 곳이 모두 금빛을 이루었는데 (중략) 명양승회를 열자 기이한 상서가 거듭 나타나고 담무갈보살이 무수한 소상을 나타냈다가 다시 대상을 나타내 그 길이가 하늘에 닿았습니다.”([세조실록] 1466년 윤3월 28일자 기사)

고려 이어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 ‘금강산 신앙’


▎1307년 고려 화원 노영이 그린 ‘담무갈지장보살현신도’. 흑칠한 나무 바탕 위에 금니(금가루를 아교에 갠 것)로 그린 그림이다. 위쪽에 담무갈보살이 서있고 그 왼쪽 아래 고려 태조 왕건이 절하고 있다. 아래쪽은 지장보살로 역시 왼쪽 아래 노영이 절하고 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중기 이후로 가면서 이 같은 금강산 신앙은 다소 수그러든다. 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이 국가 통치 질서로 받아들여지고 불교가 배척된 탓이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과학적 근거를 들어 이를 비판한다.

“나도 이 산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봉우리가 아무리 많아도 어찌 1만2000봉에 이를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이 어리석고 순진해 ‘1만2000’이란 글자만 보고 그저 봉우리 숫자로 여긴 것이다.”

이익의 비판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은 풍악이었는데 승려들이 불경의 말을 따라 금강이란 이름을 붙여놓았다. 또 불경에 8만 유순(由旬)이라고 나와 있는데, [만국전도]를 보면 ‘지구의 둘레는 9만 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어찌 8만 유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불가에서 과장하는 말에 지나지 않으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성호사설] 권2 천지문 ‘일만이천봉’)

유순은 고대 인도에서 사용된 단위였다. 1유순은 왕이 하루에 행군하는 길이로 9.5~12㎞ 정도를 말한다. ‘불가의 과장’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그만일 것을 굳이 글로 써 비판하는 것은 성호의 까칠함의 발로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성리학이 그만큼 지배 원리로서 견고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조선 후기까지 금강산 신앙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며 전승됐다. 굳이 불교적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마치 선계와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금강산은 양반 사대부 계층에게도 살아서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한양에서 400리, 금강산 여러 곳을 둘러보려면 거의 한 달을 잡아야 하는 여정이었다. 어지간히 팔자 좋은 사람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갈 수 없다면 금강산 그림이라도 한 폭 걸어놓고 틈 날 때마다 바라봐야 했다. 금강산 그림이 그렇게 많고 다양한 이유다. 17세기 말의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가 벗에게 김명국의 [금강산도]를 빌려달라고 보낸 서신에 그 간절함이 잘 표현돼 있다.

“세상 일이 잠시라도 몸을 허락지 않아 눈이 있어도 금강산을 보지 못했소. 중국인들이 이곳에 살고 싶다고 부질없이 말들 하지만 오랜 그리움 한번 이룰 법한데 여하간 다리품을 팔아 떠나야겠지만 다만 꿈속에서 신선세계를 상상한다오. 그대가 진경 그림을 얻으셨다는 소문을 들으니 보지 못했으면서도 이미 내 마음이 열리오.”

중국 사신들이 금강산 그림을 얻기 위해 어린애처럼 졸라대는 웃지 못할 촌극이 빚어지기까지 했다. 단종 3년인 1455년 도승지 신숙주가 중국 사신 정통에게 금강산 그림을 내밀었다.

“대인이 전날 수양대군에게 청한 그림입니다.”

정통이 그림을 펼쳐보며 감탄해마지 않는데, 옆에서 정사인 고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따졌다.

“나도 일찍이 수양군에게 청했는데 어찌 부사에게만 주십니까? 내가 이 그림 10여 폭을 진헌하려고 하니 사계절의 경치를 갖춰 그려주십시오.”

계급이 높은 정사를 놔두고 어찌 부사에게만 귀한 금강산 그림을 그려주느냐는 항의였다. 자신보다 정통이 더 절실하게 부탁을 한 결과였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에 신숙주가 대답했다.

“성지(聖旨)가 없으시므로 진헌할 수 없습니다. 대인이 보고 싶으시면 마땅히 전하께 아뢰겠습니다.”

진헌이란 공식 조공을 말한다. 공식 조공 품목에 없으므로 사사로이 그려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억지로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고보는 한 발 물러서 개인적 요청을 했다. 이에 대해 의정부에서 논의가 있었다. 아무리 진헌품목에 없었다고 해도 중국 외교사절 대표의 요청을 무 자르듯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양대군이 아이디어를 냈다.

“전날 고보가 신에게 ‘금강산 그림을 얻어주면 진헌하겠다’고 하길래 신이 ‘좋다’고 했습니다. 진헌할 그림 2점을 비단에 그리고 고보에게 줄 것은 종이에 그려 주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고보도 만족했을 것이다.([단종실록] 1455년 윤6월 3일자 기사)

중국 사신, 금강산 그림 얻으려 어린애처럼 졸라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금강산 문탑. 김홍도는 1788년 정조의 명을 받고 금강산과 관동팔경 일대를 여행하며 실경산수화 60점을 그렸다. 정조는 이덕무, 서유구 등에게 그림을 보고 제화시를 짓게 한 뒤 모아 〈금강사군첩〉을 펴냈다. / 사진:이훈범
금강산 그림에 대한 수요가 많으니 금강산 그림이 많이 그려진 것은 당연하다. 금강산 그림을 가장 많이 그린 사람은 겸재 정선이다. 많이 그렸을 뿐 아니라 가장 잘 그렸다. ‘금강산 화가’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36세 때 처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신묘년 풍악도첩’을 남긴 뒤 72세에 ‘해악전신첩’을 그리기까지 70여 점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내금강 전경을 조감도적 시점과 원형 구도로 압축해 표현한 [금강전도]는 여러 봉우리를 ‘ㅅ’자 모양으로 꺾어 내리는 정선 특유의 수직준법을 완성한 것으로, 후대 금강산도의 전형이 될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선이 58세에 그린 이 그림에는 자신감 넘치는 제화가 쓰여 있다.

“만이천봉 개골산의 참모습 그 누가 그릴런가/ 뭇 향기 동해 밖까지 퍼져가고 쌓인 기운 온누리에 서려 있네/ 연꽃 송이들이 뽀얀 자태 드러내고 반쪽 송백숲은 선사를 가리네/ 걸어서 찾아가도 두루 다 녀야 하니 그려서 벽에 걸고 실컷 보느니만 못하리.”

연꽃은 그림 오른쪽의 바위산에 눈이 쌓인 모습, 송백숲은 그림 왼쪽의 흙산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이 같은 비유는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조물주의 솜씨 야단스럽기도 하구나/ 날거든 뛰지 말고 섰거든 솟지 말지/ 연꽃을 꽂아놓은 듯 백옥을 묶어놓은 듯/ 동해를 박차는 듯 북극을 괴어놓은 듯.”

송강 만큼의 필력은 못 되더라도 그 어려운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선비들은 대부분 시 또는 기행문으로 값진 경험을 자랑했다. 오늘날 해외여행 사진을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에 올려 자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금강산 그림 가장 많이 그린 사람은 겸재 정선

금강산 여행의 대중화는 일제 강점기에 이뤄졌다. 그것 역시 금강산 관광을 희망하는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대에도 금강산은 외국인에게 인기를 끌었다.

“금강산에 오르는 이는 내지인은 드물고 외국인이 많다. (중략) 이곳을 구경한 서양인들은 한결같이 극찬을 한다. 금강산이 세계 제일이라는 평판이 외국인 사이에 왕성한 모양이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과 만주] 73호(1913년 8월) 기사다. 과장이 좀 있기는 하겠지만 금강산을 찾은 서양인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듬해 경원선 철도 완공 후 금강산 관광은 더욱 활성화한다. 1930년대 금강산은 “전차를 타기 5분 전까지 금강산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다”가 마음먹고 쉽게 떠날 수 있는 곳이 됐다.

“금강산행 기차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중략) 장안사역에 내려 (중략) 역 앞에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여관으로 갔다.”([금강산 유람기] 정래동)

오늘날이야 당일로도 훌쩍 다녀올 수 있는 코스이건만 분단 상황은 그 짧은 길을 막아버렸다. 북한 정권의 핵 정책으로 외국 관광객 발길도 끊겼다. 덕분에 고려 땅에 태어나서 금강산 구경하는 게 소원이라는 중국인들만 붐비지 않는 금강산의 비경을 만끽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2022년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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