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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북한이탈주민의 날’에 탈북 청년의 삶을 엿보다 

“내가 탈북한 이유? 20대 전부를 군대에서 보낼 순 없었다” 

김도원 월간중앙 인턴기자
살기 위해 탈북은 옛말, 자유·인권·주체적 삶 찾아 결심
“10명 중 7~8명은 남한 사정 잘 알아… 한류 영향력 커”


▎경기 파주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남북한 군인들이 근무하고 있다. 분단 76주년인 2024년, 국내에는 약 3만 명의 북한이탈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7월 14일은 통일부가 정한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이다. 그만큼 ‘북한이탈주민(이하 탈북민)’ 문제는 대한민국 공동체가 비중있게 챙겨야 할 영역이 됐다. 과거에는 탈북민 하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주변인들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기자가 만난 탈북 청년들은 한국 사회에 완벽히 적응한 듯 보였다. 말투와 외모, 입맛까지, 탈북민임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대학 학점을 고민하고, 취업 준비에 골몰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이 나라의 청년들이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탈북을 택한다는 것은 옛말이다. 최근 탈북하는 젊은 층들은 생존 때문이 아니라 10년이나 되는 군복무 기간, 열악한 여성 인권을 견디지 못하고 탈북한다. 자유와 인권, 주체적인 삶을 위해 탈북길에 오른 이들이 늘고 있다.

“하나를 꼽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게 좋았다.” 기자와 만난 한 탈북 청년이 말했다. 그들이 탈북하기 전에 드라마를 통해 접한 한국은 이상향에 가까웠다. 탈북해 살고 있는 지금도 그러할까? 북한이탈주민의 날을 맞아 탈북 청년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어려서부터 한국 드라마·영화 보고 동경”


▎2014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상속자들]은 북한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 사진:SBS
6월 3일 아침,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함경도 출신 탈북민 송모 씨를 만났다. 다운펌 헤어스타일에 단정한 옷차림과 깔끔하게 정돈된 피부까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20대 남성이었다. 서울 모 대학 경영학과의 재학 중인 그는 “고등학생 때 로버트 기요사키가 쓴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고 경영학과 진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전공 강의를 들으러 학교에 간다는 그와 동행했다. “외출 준비에 1시간 정도를 쓴다. 전날과 같은 옷을 입지 못하는 병이 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옷차림에 관심이 많았다. “남한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게 아스팔트 도로다.” 그 이유도 패션에 대한 관심과 맞닿는다. “북한에서는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다녔는데도 구두가 금방 더러워지곤 했다.” 그는 고향에 아스팔트 도로를 까는 게 꿈이었다며 “여기선 이미 다 돼 있더라”고 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송씨는 군대 가기가 싫어서 탈북했다고 했다. “20대 전부를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물론 군 입대에 대한 불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집에 TV와 노트북이 있었고, 어려서부터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봤다. 그래서 남한 실상을 잘 알았고, 오고 싶어 했다.”

송씨를 우리나라로 이끈 건 2014년 드라마 [상속자들]이었다. 송씨는 이 작품의 열성 팬이었다. “드라마는 남한 상류층 고등학교를 주제로 다룬다. 내가 북한에서 ‘있는 집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더 몰입됐다. 학교에서도 말투와 대사를 따라 하는 게 유행이었다.” 그에 따르면 중국 접경지역이라면 남한 문화를 10명 중 7~8명은 다 알고 접한다. 이 때문에 부모님도 탈북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고 한다. 결국 송씨 일가는 아들의 입대 직전 두만강을 건넜다.

그의 집에서 그가 다니는 대학까지는 40여 분이 걸렸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탄 후 버스로 환승했다. 그는 “서울에선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10분이면 대중교통을 탈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비슷한 차림의 북적이는 대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캠퍼스 정문에 이르자 그는 “친구와 함께 교실에 가야 한다”며 다음에 보자고 했다. 곁에서 지켜본 송씨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6월 7일 아침, 20대 여성 탈북민 이모 씨가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보육교사를 희망하는 이씨의 취미는 운동이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러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필라테스도 해봤는데 답답해서 그만뒀다. 복싱, 등산, 러닝처럼 격한 운동이 몸에 맞더라”고 말했다. 이씨와 함께 그가 공부하는 스터디카페로 향했다. 이곳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머무르는 게 그의 일과다. “회사에 다니다가 재미없어서 퇴사했다. 아이를 좋아해서 보육교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여성의 인권이 제대로 존중되지 않는 북한의 현실을 견디다 못해 탈북했다. “어머니께서 재혼하셨다. 그런데 그 집안은 ‘여자가 무슨 공부고 대학이냐’며 내게 집안일만 강요했다. 그게 너무 싫었다.” 이씨는 홧김에 집을 나왔다. 탈북 루트를 알아봐 준다는 소문을 듣고 브로커를 찾아가니 지금이 적기라고 했다. 8월의 오후, 거센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이씨는 당시 그 험한 산속을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 기억에 없다고 했다. 주변에 펼쳐진 비안개가 북한군의 감시를 막아주기만을 바라며 죽을 힘을 다해 산을 넘으니 중국 땅이었다. “처음엔, 이제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숙식을 제공하던 중국인 집주인이 갑자기 내게 청혼해 왔다. 그때 내가 16살, 그가 46살이었다. 여기도 여성의 인권은 없구나 하고 절망했다.”

“‘여자가 무슨 공부고 대학이냐?’ 절망해 탈북 결심”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과 관련한 민간 단체 간담회에 참석한 김영호 통일부 장관. 정부는 올해부터 7월 14일을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제정했다. / 사진:연합뉴스
다행히 그 집 건너편에 조선족이 운영하는 약국이 있었다. 중국에 온 지 한 달째 되던 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틈에 도움을 청했다. “나를 태우러 차가 한 대 왔는데, 진짜 나를 구하러 왔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거기 있는 것보다는 잡히는 게 낫겠다 싶어 차를 탔다.” 다행히 이번엔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 이씨는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에 올 수 있었다. 중국에 머물 때 이씨의 유일한 안식처는 한류 드라마였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를 봤다. 대부분 가난한 여자 주인공을 상류층 남자가 사랑하고, 위기에서 구해주는 내용이었다. 그 안의 이미지가 곧 한국에서 내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래서 왔다.” 원래 이씨는 탈북이 목적이었지, 한국에 올 생각은 없었다. 드라마가 그의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현재 이씨의 가장 큰 목표는 취업이다. “일해서 번 돈으로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싶다.” 이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만족하는 건 자유다. 일 한 만큼 벌고, 할 수 있는 걸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삶이 좋다고 한다. “작년에 캄보디아에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 취업해서 더 많은 곳을 누비고 싶다.”

실명을 밝힌 김원일(28) 씨는 강원도 철원에서 레스토랑을 겸한 카페를 운영 중이다. 6월 5일 그가 알려준 주소에 이르자, 한적한 시골길에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칠해진 컨테이너들이 눈에 띄었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평일 점심시간이었는데도 손님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평소에도 이렇게 손님이 많으냐”는 질문에 그는 “사실 코로나19 시기에는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2022년 중순쯤 근처에 소이산 모노레일과 철원 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됐다. 코로나19가 진정되던 시기와 겹쳐 회복세를 맞았다.” 그가 양식 레스토랑과 카페 업종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탈북민들이 북한 음식점을 경영하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는 “비즈니스적 접근”이라고 답했다. “철원에는 맛있는 한식당이 이미 많다. 경쟁력이 있으려면 양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씨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11살 어린 나이에 우리나라에 왔다. 그래서인지 그는 “처음 왔을 땐 싫은 것도 많았다”고 했다. 한반도 최북단 도시 온성에서 살던 그에게 서울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매연과 도로에서 나는 기름 냄새 때문에 속이 안 좋았다.” 지금은 레스토랑과 카페를 운영하지만 어렸을 땐 이런 음식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김씨는 “친구들은 치킨이나 햄버거만 먹으려 했지만, 나는 냉면이나 된장찌개, 만두처럼 익숙한 음식밖에 먹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김씨는 “무작정 만들어보고, 맛보며 레시피를 조절해 갔다. 계속 하다 보니 늘었다”고 말했다.

탈북민이라는 족쇄는 뛰어넘어야 할 장벽


▎철원에서 레스토랑 겸 카페를 운영 중인 탈북 청년 김원일 씨. / 사진:김도원 인턴기자
이들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탈북민이라는 족쇄를 벗어 던지고 싶어했다. 송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탈북민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캠퍼스에 들어서자 기자에게 “수업 끝나고 보자”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연이 있었다. 6년 전, 송씨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탈북한 지 3개월이 채 안 됐을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의 적응을 “생존”이었다고 했다. 매일같이 TV에서 나오는 아나운서의 발음을 따라 하고, 신문을 소리 내 읽었다. 문제는 신조어였다. 친구들의 입에서 모르는 말이 나오면 화장실에 가는 척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익혔다. 너무 화장실을 자주 가서 친구들이 “무슨 병이라도 걸렸냐”며 놀릴 정도였다.

송씨는 그때 자신이 탈북민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이 동급생들에게 탈북민임을 밝혔다면 지금처럼 남한에 성공적으로 녹아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송씨는 장차 남한에 오게 될 탈북민 청년들에게 “조금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솔직함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를 많이 봤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을 드러내려 하지는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건 송씨만이 아니었다. 2022년 남북 하나재단에서 발표한 ‘탈북청소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편’(62.2%)이라고 답한 비율이 ‘밝히는 편’(37.8%)이라는 답의 두 배에 가까웠다.

앞서 이씨와의 대화에서도 송씨가 그런 조언을 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씨에게 “탈북민으로서 불이익을 경험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진 않다”고 답한 후 뜸을 들인 그는 “그냥 내려놓는 거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어디든 그런 게 없지는 않다. 일일이 신경 쓰자니 스트레스만 받는다.” 이씨는 전 직장에 사표를 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당시 직장에서 젊은 여성이자 탈북민은 그가 유일했다고 했다. 그곳에서의 텃세가 스트레스였다고 덧붙였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탈북했지만 남한에 정착한 이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다. 우리 사회의 따뜻한 눈길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을 향한 편견 어린 시선을 거둬들이는 게 먼저다.

- 김도원 월간중앙 인턴기자 vvayaway@naver.com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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