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는 세상을 뜨면서도 아들 걱정을 많이 해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했다. 황태자인 유선(劉禪)은 17세에 불과했다. 본래 황족이라 해도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난 유비는 아들을 보호해 줄 유력한 일가 친족이 없었다. 라이벌인 조조나 손권은 집안의 유력자들이 새 황제를 둘러싸고 보호한 것과 대조적이다. 유비가 형제처럼 믿고 의지한 관우·장비는 이미 죽었다. 황태자 유선은 나이가 어린 데다 성격이 온순해 난세를 헤쳐나가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유비는 임종에 즈음해 황태자 유선에게 유언을 남긴다. 자신을 반성하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자상함이 가득 배어 있다. “나의 병은 처음엔 단순한 설사로 생각했으나 이젠 합병증까지 생겨 회복이 어렵게 됐다. 인생 50이면 짧다고 할 수 없는데 나는 60을 넘기고도 몇 년 더 살았다. 한도 없고 후회도 없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너희 어린 형제들이다. 신하들은 황태자의 재능이 뛰어나다 하는데, 사실이라면 그보다 더 다행이 없겠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다. 악행은 아무리 작아도 저질러서는 안 되고, 선행은 아무리 작아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현명하고 덕이 있어야 한다. 나는 덕이 부족했다.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서(漢書)·예기(禮記)·제자백가(諸子百家)·신자(申子)·상군서(商君書) 같은 옛 글을 부지런히 익혀 본받도록 하라. 더욱 노력해 힘쓰길 간곡히 당부한다.” 유비다운 제왕학(帝王學)의 전수다. 유비가 스스로 부덕했다고 말한 데서 유비의 겸손을 엿볼 수 있다. 또 법가적인 책들을 천거해 시대의 흐름에 맞는 통치를 당부하고 있다.
유비의 후계 포석은 평소의 인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조조는 임종 때 아들들에게 사마의(司馬懿)를 경계토록 신신당부한다. 사마의가 위나라의 기둥으로서 큰 공을 세웠지만 끝까지 안심을 못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위나라의 군사력은 같은 집안인 조씨와 하후(夏候)씨가 장악했다. 사마의는 조조의 손자인 명제(明帝) 때 반란 혐의로 삭탈관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견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위나라 조조의 후손은 사마의에게 나라를 뺏기고 만다. 손권도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육손(陸遜)을 핍박해 죽음으로 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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