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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PRENEUR - 성공하고 싶다면 과거 영광은 잊자 

 

글 이용성 포브스코리아 기자 사진 오상민 기자
박종범 영산그룹 회장은 오스트리아 빈을 본거지로 삼아 연매출 1조원대 규모의 자동차 관련 사업을 14개국에서 펼치는 재외동포 기업인이다.



한번 성공을 맛본 사람이 실패를 경험하고 다시 일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잊고 새 마음으로 시작하는 데 잘나갔던 시절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훼방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빈에 본사를 둔 영산그룹을 이끌고 있는 박종범(56) 회장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1996년 기아자동차 상사부문의 현지 법인장으로 파견돼 오스트리아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한국의 외환위기로 1999년 기아차가 현대자동차에 인수 합병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고국행 비행기표 대신 사표를 선택했다.

지난 10월 세계한상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박 회장을 광주에서 만났다. 요즘 우리 기업들이 회사 이름을 외래어로 많이 짓지만 박 회장은 고향인 전남의 영산강에서 회사 이름을 따왔다. 그만큼 고향과 조국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는 42세에 외국에 남기로 결심하며 두 가지를 마음먹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아차 법인장의 배지를 마음 속에서 떼는 것, 자동차를 잊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현지 기업인들이 나와 어울린 건 인간 박종범이 아니라 기아차 법인장이라는 직위 때문이었거든요. 게다가 회사 소속이 아닌 개인이 처음부터 규모가 큰 자동차 관련 사업을 한다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업 아이템을 놓고 고민하던 그가 시작한 사업은 사탕포장용 필름 생산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 서유럽 선진국은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 틈새 시장인 동유럽을 선택했다. 당시 많은 국영기업이 사기업으로 바뀌는 와중이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삼성과 LG 등 국내 대기업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시장을 찾던 중 우크라이나의 대형 사탕공장을 발견했어요. 여직원 한 명을 데리고 시작해서 운 좋게 25만 달러어치 사탕 포장비닐 주문을 수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탕 봉지로 시작해 이후에는 카메라 필름, 포장지, 원목용 PVC 필름 등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든 다양한 포장지를 생산·판매했다. 박 회장은 “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포장지와 필름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처음으로 컨테이너 6개 분량을 주문받고 기뻤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25만 달러 중 10%가 내 몫으로 떨어졌어요.”

사업 시작 후 1년이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었나 싶었을 때 큰 위기가 찾아왔다. 생산시설에 문제가 생겨 165만 달러어치의 클레임을 맞은 것. 자취를 감춘 공장장을 대신해 박 회장이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아야 할 상황이었다.

불량제품 중에서도 쓸 만한 것을 일일이 골라내고 사정을 봐달라고 간청해 클레임 액수를 50만 달러까지 낮췄다. “2년 안에 갚겠다는 약속하고 월별로 작성한 상환 일정을 늘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 금액을 모두 값을 때까지 매일 2시간 정도밖에 못 잘 정도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창업 9년만에 매출 1조원 돌파

애초 약속한 상환기간이 반년가량 늦춰지긴 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2004년 마침내 채무를 전액 갚았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빚을 정리한 덕에 박 회장에 대한 우크라이나 거래공장의 신뢰는 오히려 이전보다 두터워졌다. 우크라이나 측 바이어는 “전공이 원래 자동차 아니냐”며 우크라이나 자동차 관련 회사를 소개해줬다. 마침 국내 자동차 회사의 동구권 수출이 본격화되던 시기여서 기회가 보였다.

박 회장은 한국 자동차를 해체한 후 부품 상태로 들여와 완성차로 만드는 ‘넉다운(knock down)’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회사에 자동차를 공급했다. 부품 상태로 수입하면 관세가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자금력이 약한 동유럽 바이어들을 위해 오스트리아 금융권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차를 담보로 박 회장이 신용장을 개설해 자금지원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수출 창구 역할을 하게 됐다. “동유럽 바이어들이 한국 자동차를 많이 구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줬으니 수출에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때부터 영산그룹의 성장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엔진오일·부동액 등 자동차 관련 물품도 취급했고 슬로바키아와 러시아를 비롯 아프리카 말리와 전북 전주에 자동차 조립 공장을 세웠다. 설립 9년만인 2008년에는 연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자동차 조립·판매뿐 아니라 타이어와 휠을 비롯한 차량 부품, 산업용 장갑 등을 판매한다. 또 한국의 귀뚜라미 보일러 제품을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등에 독점 공급한다. 현재 14개국 26개의 관련 사업장에서 1000여 명의 직원이 일한다.

하지만 박 회장은 지금까지의 성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1년에 출장일이 220일이 넘고 비행기 타는 횟수가 월 20회가 넘는 등 열정이 청년 사업가 못지 않다. 최근에는 말리·세네갈·기니 등 아프리카 지역을 집중 공략하면서 관련 지역 출장이 잦아졌다. 사흘간 광주에 머무는 중에도 말리 정부로부터 군용 트럭 연 500대(약 6000만 달러)와 덤프 트럭 250대(5000만 달러)를 수주했다.

박 회장은 유럽에서 사업에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무엇보다 ‘신뢰’ 쌓을 것을 당부했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표되는 기회의 땅 미국과 달리 복지 수준이 높고 보수적인 유럽에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잘 짜여진 사회인만큼 갑자기 떼돈 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세금을 많이 내야하고 인건비가 높아요. 근로자의 휴가가 길어서 사업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나마 내가 사업을 시작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동유럽의 상황이 좀 나았죠.”

유럽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는 후배 사업가에게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원칙에 따라 접근하라”고 조언한다. “얼렁뚱땅하는 마음가짐으로는 유럽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 나라 규정에 맞게 원칙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생각으로 품질과 납기일을 지키며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해요. 유럽인의 믿음을 얻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신뢰가 생기면 웬만해선 거래선을 바꾸지 않습니다.”

현재 유럽한인총연합회장직을 겸하는 박 회장은 오스트리아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현지 한인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빈에 개관한 한인문화회관 건립에도 큰 힘을 보탰다. 당시 개관식에서는 하인츠 피셔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참석해 개관선언을 할 정도로 현지 관심이 뜨거웠다.

박 회장은 도서 보급을 통한 한인과 한국문화 제고에도 열심이다. 오스트리아 한인의 50년 이민사를 우리말로 펴낸 『오스트리아 속의 한국인(Die Geschichte der Koreaner in Osterreich)』과 한식의 24가지 조리법을 담은 한식요리책 『한식(Koreanische Kuche/ Metatran Verlag)』이 지난해 오스트리아에서 출간되는데 앞장섰다(두 권 모두 오스트리아한인연합회 펴냄).

한국어와 독일어가 병기된 『한식』은 러시아·스페인·체코·루마니아·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서 현지 언어로 출판됐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오스트리아 연방정부로부터 금성훈장을, 우리나라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박 회장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선택도, 가장 잘한 선택도 오스트리아에 남기로 한 일이었다고 했다. 개인적인 성공은 물론이고 조국을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제2의 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빈은 자연재해도 거의 없고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살기 좋은 도시입니다. 외국인에게 친절해요. 이곳에서 사업하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오스트리아 정부와 국민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때 오스트리아로 건너간 박 회장의 두 아들은 오스트리아 영주권을 갖고 있지만 모두 한국군에 자원 입대해 군복무를 마쳤다. 비엔나공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큰 아들 건영(28) 씨와 런던정경대에서 법학을 공부한 둘째 건호(26) 중 첫째가 가업을 이을 것 같다고 했다.

201312호 (201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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