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송 메타바이오메드 회장은 사업에 두 번 실패하고도 보란듯이 재기했다. 지하사무실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20여년 만에 메타바이오메드는 치과용 충전재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린다.
▎파란 셔츠와 빨간 넥타이는 오석송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다. 복장 하나도 전략적으로 입을만큼 오 회장은 기업을 절박하게 키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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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콜도수 60도가 넘는 고량주를 500cc 맥주잔에 가득 채웠다. 오석송(60) 메타바이오메드 회장은 잔을 들고 건배를 청했다. 상대는 술 잘 먹기로 소문난 중국 상해 푸동의 주요 바이어였다. 2002년 오 회장은 자사가 개발한 ‘수술용 실’의 판로개척을 위해 중국시장 진출이 절박했다. 바이어가 맥주잔을 비우자 오 회장은 다시 고량주를 맥주잔에 가득 채웠다. 혀를 내두른 바이어는 “내가 졌다”며 껄껄 웃었다. 술 대결을 시작으로 관계를 맺은 바이어의 기업은 메타바이오메드의 주요 거래처 중 하나가 됐다.“한국의 이름 모를 작은 회사 CEO가 와서 대뜸 ‘거래하자’고 하니 황당했을 겁니다. 당시 제가 거래하려 했던 중국 기업들은 이미 다른 글로벌 대기업들과 거래 중이었으니까요. 중국에 있는 13개 기업을 1년에 10번도 넘게 찾았지만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고량주를 들고 3000㎞가 넘는 거리를 다녔습니다. 그때 마셨던 고량주가 1년에 100병 정도 될 겁니다. 이제 중국은 메타바이오메드 매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큰 시장입니다.”지난 5월 16일에 만난 오 회장의 첫 인상은 그가 들려주는 혹독한 시장개척 이야기와는 달리 온화했다. 멀끔한 파란색 와이셔츠와 빨간 넥타이는 강하면서 차분해보였다. 오 회장의 얘기를 들으니 회장실 한 켠에 걸린 세계지도에 눈길이 갔다. 메타바이오메드가 수출하는 세계 100여 개 국가가 표시돼 있었다.글로벌 영업망이 200여 개에 달하고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95%에 이른다. 치과용 재료와 수술용 실이 주요 제품인 강소기업 메타바이오메드는 지난해 매출 635억원, 영업이익 44억원을 달성했다. 치과용 충전재(치아에 구멍이 생기면 메우는 재료) 부문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다.사업이 승승장구했을 것 같지만 오 회장은 실패를 두 번 겪었다. 첫 실패는 1989년 미국 치과용 재료 회사인 한국슈어프로덕트 인수였다. 1988년 12월, 한국슈어프로덕트가 극심한 노사분규로 어려움을 겪자 하워드 리 전 대표는 한국법인을 접기로 결정했다. 당시 회사의 관리이사였던 오 회장은 1989년 5월 전 재산을 털어 한국슈어프로덕트를 인수했다. 회사의 부가가치와 비전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노조는 여전히 강성했고, 오 회장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가 인수한 지 3개월 만에 노조는 다시 쟁의에 돌입했다. 노조는 생각보다 거칠었다. 오 회장이 살고 있던 아파트에 찾아와 빨간색 페인트로 ‘미국의 앞잡이 오석송’이라고 쓰는가 하면, “공장에서 아이들을 재워보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오 회장은 “젊은 혈기로 그랬겠지만 가족들이 고통 받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돌이켰다.첫 번째 실패 후 그는 1990년 인도네시아에서 같은 치과용 재료로 재도전에 나섰지만 또 쓴맛을 봤다. 친지의 돈을 빌려 모은 2억8000만원으로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 세운 현지 합작회사였다. 실패 요인은 두 가지였다. 인건비가 저렴한 인도네시아 현지 직원들의 생산성이 낮았고, 어렵게 만든 치과용 재료는 글로벌 시장에서 환영 받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산이란 이유였다.두 번의 실패가 남긴 상처는 컸다. 20년 동안 벌어도 갚기 힘든 빚, 가족과 친지에게 ‘죽일 놈’이라 낙인 찍히고, 연이은 실패로 인한 좌절감 때문에 한국에 돌아온 오 회장은 우울증에 빠졌다. 삶의 의욕도 없고 미래도 불안했다.1993년 6월 어느 날 밤, 오 회장은 소주 두 병과 수면제를 들고 경기도 송추에 있는 아버지 산소로 갔다. 그가 힘들 때마다 찾던 곳이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소주를 마시다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밤새 이슬을 맞고 한기를 느꼈는지 불현듯 깼다. 그제서야 왜 이곳을 찾았는지 깨닫게 됐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공포감과 그동안 쌓인 울분에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억눌려있던 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죽기를 각오로 다시 한 번 사업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오 회장은 바닥을 쳤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소극적이었던 성격도 조금 뻔뻔해졌다. 93년 10월, 친구 7명이 모아준 5000만원으로 충북 청주 모충동에서 치과재료 회사를 재창업했다. 공장장, 구매, 경리, 마케팅, 생산관리 등 1인 5역을 하느라 24시간이 모자랐다.오 회장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봉고차에 제품을 싣고 소독하러 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해외전시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제품을 알리고 업계 트렌드를 파악했다. “식사할 땐 화장실에 자주 갈까 물도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화장실에 간 사이 부스를 방문한 바이어를 놓칠 수 있으니까요.”당시 그의 별명은 ‘오 삿갓’이었다. 1년에 3분의 1이 넘는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 방랑시인 김삿갓과 같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다. 지금까지 쌓은 항공사 마일리지가 총 350만 마일(약 563만㎞)에 이른다. 지구 140바퀴를 도는 거리다. 해외 전시회를 가도 사업에만 신경 쓰느라 그 흔한 관광 한 번 못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수십 번을 갔는데 그 유명한 코파카바나 해변은 아직도 못 가봤습니다.”동분서주하던 오 회장에게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은 첫 기회이자 전환점이 됐다. 초기부터 수출에 집중하던 터라 IMF로 원화가치가 떨어지자 가격경쟁력이 생겨 수익을 냈다. 그는 평소 전시회를 다니며 눈여겨 봤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연구소를 세우고 기술력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그때 도전한 것이 수술용 생분해성 봉합사(몸에 녹는 수술용 실) 기술이었다. 오 회장은 전북대 섬유공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이야기에 감명 받은 김학용 교수는 “수술용 생분해성 봉합사를 연구해 기초 기술이 있으니 함께 개발해 보자”고 제안했다. 당시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기업은 미국 존슨앤존슨 계열사인 에디콘, 타이코, 일본의 미쓰이, 독일의 비브라운 등 6개 회사 뿐이었다. 모두 메타바이오메드가 상대하기 힘든 글로벌 기업이었다.5%의 가능성에 도전하다기술투자를 받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투자사마다 ‘95%는 망할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오 회장은 “95% 실패보다 5% 가능성에 귀 기울였다”고 했다. 결국 정부 지원을 받은 후에야 수술용 생분해성 봉합사 기술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첫 샘플이 나오자마자 오 회장은 독일에서 열린 의료기기 전시회를 찾았다. 바이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다녔다.첫 거래는 2003년 독일 비브라운과 성사됐다. 이라크 전쟁으로 급증하는 수술용 실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비브라운이 메타바이오메드에 다시 주문했다. “전시회 때 제가 다니는 것을 눈여겨봤다고 하더군요. 노력이 첫 결실을 맺어 뿌듯했습니다.” ‘비브라운에 납품한 회사’라고 홍보할 수 있게 되자 이후 거래는 한결 수월해졌다. 품질을 인정 받은 계기가 된 것이다.오 회장이 가진 영업 전략은 ‘이미지 메이킹’이다. 사명인 ‘메타(Meta)’가 새겨진 파란 셔츠와 빨간 넥타이만 고집해 바이어들에게 자신과 회사를 각인시킨다. “빨간 넥타이는 2002년 중국 시장을 공략할 때 처음 매기 시작했어요.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 빨간색이거든요. 열정을 상징하고 기를 높여주기도 합니다. 파란 셔츠는 빨간색의 강한 기운을 차분하게 만들어줍니다. 전시회에 가면 눈에 확 띈다고 다들 좋아하죠.” (웃음)그의 또 다른 강점은 ‘센 주량’이다. 오 회장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술 마시며 대화하면 마음을 좀 더 빨리 열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공장에 있는 900명의 직원과 회식할 때 모든 테이블을 일일이 돌며 마셔도 끄떡 없을 만큼 술을 잘 마신다. 술 한 잔은 틈새시장을 뚫기 위해 바이어들과 관계를 맺는데 큰 도움이 됐다.오 회장은 계약을 성사한 후의 ‘신뢰’를 중시한다. 연구소에서 제품을 개발하면 담당자와 전시회에 반드시 동행해 고객의 이야기를 듣게 한다. 제품의 장단점을 직접 듣고 향상시키기 위해서다. 그는 이를 ‘굿파더 시스템(Good Father System)’이라고 이름 지었다. 좋은 아버지가 된 기분으로 제품을 돌보라는 뜻이다.회사가 성장한 지금도 오 회장은 해외출장을 고집한다. “CEO가 직접 가면 장점이 많습니다. 그 자리에서 의사 결정을 바로 할 수 있고 챙겨오는 정보의 질도 다릅니다. 직원들을 보내면 주요 정보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CEO와 직원은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실제로 그는 유엔미래포럼 박영숙 대표의 강의를 들으며 향후 20년 대비 계획을 세웠다. 4개의 계열사 및 해외법인을 발판으로 눈앞에 둔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하고, 체외진단분야, 홈헬스케어산업, 맞춤형 토털 의료서비스 등으로 분야를 확장해 2030년까지 매출 5조원 달성이 목표다.회사 곳곳엔 유독 돌과 소나무가 많이 보였다. 문득 명함 속 그의 이름 한자, 석송(碩松)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제 위의 형제 두 명이 허약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더군요. 그래서 아버지는 ‘너는 돌처럼 단단하고 소나무처럼 항상 푸르렀으면 좋겠다’며 제 이름을 석송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그는 실패를 반석 삼아 건실한 기업을 이뤄냈다. 이는 메타바이오메드가 백년대계를 누리길 바라는 오 회장의 바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