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 신화’를 쓴 이민화 이사장은 벤처인들이 존경하는 멘토이자 벤처업계의
전설이다. ‘배달의 민족’ 김봉진 대표는 요즘 잘나가는 현역 CEO다.
포브스코리아는 창간 13년을 맞아 한국 벤처 35년사를 조명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통해 벤처의 미래를 얘기하고 싶었다. 대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오고 간 대화는 무거웠다. 특히 관료들이 새겨들을 얘기가 많았다.
선배는 33년 전 서른둘 나이에 창업을 했다. 선배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CEO였다. 돈과 시장과 제도가 부족했던 시절, 그는 남들이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기술과 아이디어로 시장을 평정했다. 사람들은 그를 원조 벤처, 1세대 벤처인으로 부른다. 이민화(63) 창조경제 연구회 이사장이다.후배는 6년 전 서른넷에 벤처를 차렸다. 후배가 차린 회사 이름은 독특했고, 서비스는 더 특이했다. 시대의 흐름을 간파한 후배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거의 모두를 고객으로 만들었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스타가 됐다. 3세대 벤처를 대표하는 김봉진(40) 우아한 형제들 대표다.과거와 현재의 벤처업계를 상징하는 두 인물이 벤처 산업의 미래를 주제로 마주 앉았다. 대담은 2월 15일 중앙일보 6층 회의실에서 했다.
정부는 벤처 3만 개 돌파를 창조경제의 성과로 내세운다. 양적 성장만큼 질적으로도 성장했다고 보나?이 - 성장 속도로 봤을 때 창업기업이나 벤처 투자 모두 많이 늘었다. 특히 엔젤 투자가 급증했다. 벤처기업 숫자만 놓고 보면 연간 1000개씩 늘어났다. 그러나 늘어난 벤처기업 대부분은 기술신용보증기금(기보) 등에서 보증을 받아 벤처로 인증된 곳이다. 국내 벤처 중 90%가 연구개발(R&D)이나 벤처캐피털(VC) 투자가 아닌 보증·대출로 벤처가 된 곳이다. 벤처생태계가 질적으로 좋아졌다고 보기 힘들다.
보증·대출 인증 벤처가 많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이 - 정부기관은 큰 위험을 딛고 고도 성장할 수 있는 기업을 보증하지 않는다. 벤처의 성격은 고위험·고수익인데, 현 인증제도는 저위험·저수익 시스템이다. 2004년에 정부가 망하지 않을 벤처를 만들겠다며 기존 벤처인증제도를 뜯어고친 것인데, 잘못된 제도 개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배달의 민족’같은 스타기업이 거의 다 사라졌다.
김 - 우리는 장병규 대표가 설립한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에서 투자를 받아 벤처가 된 경우다. 본엔젤스에서 투자를 받고 경영 조언을 받은 것이 회사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 우아한 형제들은 2010년 김봉진 대표가 셋째 형과 함께 창업한 회사다. 음식주문·배달 애플리케이션으로 유명한 배달의 민족을 운영한다. 배달의 민족은 지난 한 해 동안 거래액 1조1900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58% 증가한 수치다. 지난 4년간의 누적 거래액은 2조 5000억원에 달한다. 2014년 말 골드먼삭스로부터 400억원을 투자 유치해 화제가 됐다.
정부의 벤처인증제도에 허점 많아벤처인증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다. 왜 바뀌지 않나?이 - 본인(정부 관료)들의 오류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겠지. 과거에 없었던 것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쉽다. 연대보증 폐지, 크라우딩 펀드 시행, 핀테크 활성화 등이 그렇다. 그러나 과거에 잘못 만든 벤처인증제를 원상 복구하는 과정은 어려워 보인다.
벤처 투자 환경은 정말 좋아졌나?김 - 엔젤투자 등 시리즈 A·B 단계의 투자 환경은 점차 좋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스타트업이 성장해 시리즈 C·D·E로 넘어가면 국내 투자를 받아 해외로 나가기 어렵고 투자처도 많지 않다. 해외 펀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 - 그런 면에서 크라우드 펀딩법 시행은 엔젤 투자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투자자가 동일 기업에 최대 200만원, 연간으로는 500만원까지만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한계가 많다.
투자자 보호 등 부작용을 우려한 조치로 볼 수 있지 않나?이 - 부작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게 벤처 정책의 문제다.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나야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김 - 결국은 규제의 문제다. 일단 해보고 문제가 생기면 규제를 만들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규제부터 만들려고 한다. 혁신적인 창업을 할 때는 위법을 하는 경우가 많다. 관련 법규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스타트업 벤처가 갖는 태생적 한계다. 이런 제도적 환경이 초반부터 벤처의 의지를 꺾는다.
이 - 선진국은 안 되는 것 빼놓고는 다 해보라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되는 것만 하라는 식이다. 이런 환경에서 새로운 창조적 사업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김 - 핀테크도 해외 사례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일동 웃음). 벤처업계에서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새로운 아이템을 정부에 제시하면 돌아오는 답이 ‘해외 사례가 있느냐?’는 것이다. 해외의 아이템을 한국에 가져오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한국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기는 어렵고 해외로 내보내기도 쉽지 않다.
이 - 청년 벤처기업가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보라고 하면 정말 잘할 것이다. 규제로 의지를 꺾어서는 안된다. 신산업 규제는 부작용이 생길 때 해도 늦지 않다.
현역 CEO인 김 대표 입장에서 바라는 규제 개혁이 있다면?김 - 대기업에 대한 규제 방식이 벤처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차등의결권제도 그런 경우다. 우리나라는 경영자가 주식을 매각해 기부를 하거나 후배들을 돕고 싶어도 경영권 문제로 지분을 팔 수가 없다. 사제를 털거나 법인명으로 돈을 기부하는 방식밖에 없다. 벤처기업에 차등의결권제를 허용하면 벤처생태계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차등의결권은 주식마다 각기 다른 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구글은 주당 의결권이 1개인 클래스A와 10개인 클래스B, 의결권이 없는 클래스C 등 다양한 주식을 발행한다. 구글 창업주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지분이 21%지만 의결권은 73%다. 선진국에는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 등 자본력이 떨어지는 기업의 경영 방어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차등의결권제를 도입한 곳이 많다.
우리나라 벤처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지적도 적지 않은데.김 - 해외로 나가기 전에 국내에서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많다. 게임업체의 경우 셧다운제 등 국내 규제에 발목이 잡혀 해외로 나갈 타이밍을 놓쳤다. 우수한 인재들만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 - 국내 벤처가 해외 현지에 진출할 때는 외환관리법 등 발목을 잡는 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본사를 해외로 옮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래서는 진짜 글로벌 벤처를 키울 수 없다. 해외 문턱을 넘는 벤처기업의 비용을 줄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스톡옵션으로 백만장자 많이 나와야벤처특별법이 2017년 일몰 된다. 폐지해야 하나, 개정해야 하나.이 - 벤처특별법은 원래 한시적으로 만든 법인데 10년이 연장된 것이다. 더 이상 연장할 명분이 없다. 법은 유지하되 애초 취지에 따라 벤처인증 기업에 대한 혜택을 줄여야 한다.
김 - 벤처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세제 혜택 등 도움이 되는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벤처는 태생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고 강하게 커야 한다고 생각한다. 10~20년 전에는 벤처 불모지였기 때문에 정부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지금은 아닐 수 있다.
이 - 20년 전에는 정부 예산 1000억원으로도 벤처 붐이 일었다. 지금은 2조원이 넘는다. 혜택이 문제가 아니다.
요즘 젊은 벤처기업가들이 모이면 어떤 얘기를 많이 하나?김 - 해외 동향 얘기를 많이 한다. 특히 중국에 대한 관심이 크다. 우리나라 벤처가 중국보다 경쟁력이 없다는데 대체로 동감한다. 또한 생존이 급하기 때문에 인력이나 자본을 모으는 문제도 늘 관심사다. 이와 함께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어 가는데도 젊은 CEO들의 관심이 대단히 많다.
이 - 가치의 공유, 정보의 공유, 이익의 공유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직원들이 기업의 참여자로 들어와 월급이 아닌 분배를 받는 시스템이 중요하다. 좋은 인재를 유치하려면 결국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그래서 스톡옵션이 중요하다. 현재 스톱옵션제는 유명무실해졌다. 스톡옵션을 비용으로 처리하는 현행 제도부터 바꿔야 한다.
김 - 좋은 인력을 모셔오기 정말 힘들다. 대기업에 다니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려면 그들 부모님까지 만나야 한다. 벤처로 가는 것을 본인도, 가족도 싫어하더라.
이 - 스톡옵션으로 백만장자 사례가 많이 나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요즘 벤처업계가 활기를 띠고 있다는 보도가 자주 나온다. 정말 그런가?이 -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2013년 이후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 투자 시장이 활성화됐고 벤처 간 네트워킹도 활발해졌다. 죽었던 벤처 창업을 되살린 것도 창조경제 정책의 성과로 볼 수 있다.
김 - 벤처 관련 세미나나 모임에 가면 정부 기관 분들이 많이 와 있다. 확실히 관심이 많아진 것 같다.
“쿠팡과 젤리버스 정말 잘한다”창조경제혁신센터에 벤처를 모아놓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이 - 바보 짓이다. 창조경제혁신센터 말고도 벤처 인큐베이터나 엑셀러레이터는 많다. 중복되는 것을 또 만들 이유가 없었다. 또한 대기업이 벤처 인큐베이터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전문 인큐베이터나 엑셀러레이터에 맡기면 된다.
능력 있는 인큐베이터나 엑셀러레이터는 충분한가.김 - 회사별로 능력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1~1.5세대 선배들이 운용하는 곳은 대체로 훌륭하다.
이 - 중요한 것은 시리얼 앙트레프레너(Serial Entrepreneur)다. 연속기업이 나오고 이들이 핵분열 하면 창업국가가 되는 것이다.
1세대 선배가 후배에게, 3세대 후배가 선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 - 개인 창업을 떠나, 벤처 생태계 전체에 씨앗이 될 수 있는 CEO가 되길 바란다. 성공 이후에도 숨지 말고 후배들의 롤 모델로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
김 - 현역 CEO로서 이해관계나 역규제 등을 걱정해 하고 싶어도 못하는 말이 많다. 현직에 있으면서 정부에 목소리를 높이기는 쉽지 않다. 이민화 선배님 같은 분들이 규제 문제나 혁신 방안을 제시해 주시면 사업을 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 벤처 정말 잘한다’ 하는 곳이 있다면 추천해 달라.이 - 쿠팡이다. 꿈을 꾸는 스케일이 다르다.
김 - 젤리버스를 추천한다. 글로벌 벤처로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진행· 정리 김태윤 기자·사진 김현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