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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삼국지로 본 사람 경영’(1) 제갈량 

몸을 낮추고 온 힘을 기울이니 책사(策士에서 역사의 의인(義人)으로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여류(余流) 삼국지』저자
제갈량(諸葛亮, 184~234)은 조직 내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 줄 알았다. 그는 당당하게 주군에게 요구하고, 계략을 쓸 때도 주군에게 알려가며 자기 자리를 만들었다. 이는 실로 여전히 크게 성공하는 2인자 신하들이 갖추는 전략이며 경쟁력이다

▎제갈량이 자신의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한 말은 바로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몸을 낮추고 온 힘을 기울이니 죽어서야 끝이 나리라)’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살았다.
유비와의 관계에서는 ‘절대 주군’의 원칙을 깨지 않은 제갈량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예스맨’은 아니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 줄 알았다. 대부분의 예스맨은 앞에서 주군의 눈을 속이는 한편으론 뒷구멍으로 사리를 챙기고, 조직 내에서 자기 자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상사나 동료와 부딪치거나 갈등을 일으키기 쉬운데 비해 제갈량은 당당하게 주군에게 요구하고, 계략을 쓸 때도 주군에게 알리고 자기 자리를 만들었다. 이는 실로 여전히 크게 성공하는 2인자 신하들이 갖추는 전략이며 경쟁력이다.

제갈량은 융중 초려로 찾아온 유비에게 천하삼분책을 건의한 뒤, 당시의 형세를 설명하고 구체적인 계책을 논하며 말한다. “북쪽은 천시(天時)를 얻은 조조에게, 남쪽은 지리(地利)를 손에 넣은 손권에게 양보하십시오.” 현덕은 두 사람이 천시와 지리를 얻었다는 말에 한숨을 쉬며 신세 한탄을 한다. 이때 제갈량은 말한다. “장군께서는 그들이 얻지 못한 인화(人和)를 이미 얻었습니다. 셋은 가히 패업을 달성하는 기본 요소라 하겠으며 그 셋 중 어느 하나를 얻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는 주군인 유비가 미처 깨닫지 못한 그의 핵심 역량을 일깨워주고, 그 역량을 바탕으로 성취해야 할 구체적인 계책을 일러줌으로써 유비에게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바로 유비가 천금을 주고도 스카우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또 그는 주군과 신하가 모두 형님·아우님 하는 1차적 공동체의 성격이 강한 유비의 집단에서 나이로 치자면 아버지뻘 되는 유·관·장 삼형제 사이에서 유비의 아랫자리, 다른 사람들의 윗자리에 자기 자리를 확보한다. 먼저 관우와 장비는 내내 제갈량을 못마땅해 한다. 나이도 젊고 허우대도 훤칠하고 다소 까칠한 그를 큰 형님인 유비가 스승 모시듯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기색은 여기 저기에서 표출된다. 그러다 드디어 조조의 맹장 하후돈이 조조의 명을 받아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신야로 출병한다. 박망파 전투다. 이때까지 1차 공동체 같은 집단을 꾸리는 데 이골이 난 유비는 제갈량을 모셔와 놓고도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뻔뻔한 경쟁력 하나로 이제까지 버텨온 유비는 공명을 그저 선생으로 모실 뿐 자리를 만들어준 것도 아니고, 애매한 1차 집단의 스승 정도로 섞어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자 유비는 먼저 관우와 장비를 불러 의논한다. 그러자 이들이 “공명에게 시켜보라”고 삐죽거린다. 이에 유비는 아우들을 달래고 다시 제갈량을 불러들여 상의한다. 제갈량은 틈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유비에게 모든 군사 통솔 권한을 자신에게 일임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유비의 칼과 도장을 받아 이를 앞에 세워두고 모든 장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이에 관우와 장비가 비아냥거리자 “명령을 어기는 자는 누구라도 목을 벨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리고 그의 전략에 따라 박망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많은 『삼국지』해설서들은 박망파 전투는 유비가 제갈량을 영입하기 전에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전투가 아니었더라도 그가 어찌됐건 이 1차적 공동체 같은 집단에서 삼촌이나 아버지뻘 되는 장수들을 꼼짝 못하게 자기 휘하에 두고 명령하는 체계를 잡았다는 건 분명하다.

물론 당시 문관과 무관의 신분 차는 실로 큰 것이어서 무관이 문관의 지휘를 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유비의 조직은 아주 독특한 1차적 공동체였다는 점에서 제갈량이 나름의 방식으로 모든 용병의 권한을 장악하며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는 점은 나름의 분투를 거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직 내에서 자기 자리 굳히고 실리도 챙겨

이 세력의 2인자였던 관우와의 경쟁관계는 그 후에도 얼핏 보인다. 한 예로 적벽싸움 당시 용병을 하면서 제갈량은 관우를 제외하려고 한다. 그 이유가 조조를 잡아야 할 마지막 관문인 화용도에 보내려 하였으나 관우가 조조의 은혜를 생각하여 놓아줄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관우에게 말해 그를 격동시킨다. 결국 관우의 군령장까지 받고 화용도로 출정시키지만, 제갈량의 진짜 속셈은 화용도에서 조조를 살려 보낼 사람으로 관우를 낙점했던 것이다. 집도 절도 없는 유비에게 땅을 마련해주려면, 손권에게서 빼앗아야 하므로 뒤에 조조가 버텨주어야만 한다고 이미 계책이 서 있던 터였다. 그러면서 그는 군령장을 받아 관우의 기를 죽이고, 확실히 자신이 경쟁 우위에 서게 된다. 이때, 유비가 “관우는 의기 때문에 조조를 놓아줄 것”이라고 걱정하자 “천문을 보니 조조는 아직 죽을 운이 아닌지라 관우에게 은혜를 갚고 마음의 빚을 청산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관우를 궁지에 몰아 자기 자리를 굳히는 동시에 실리까지 챙긴 것이다.

제갈량의 또 다른 핵심 경쟁력은 바로 그런 2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남용하거나 경쟁자를 핍박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예로 익주를 얻는 데 일등공신이 된 원래 촉땅의 모사 법정을 처리한 사례를 들 수 있다. 법정은 유비가 촉을 정벌한 후 촉군 태수에 오르고 신정부 개국공신으로 기세를 올렸다. 그런데 그는 작은 은혜도 잊지 않고 갚았지만, 작은 원한도 참지 않고 보복하는 소인배의 기질이 있었다. 이에 누군가 공명에게 이 같은 법정의 횡포를 고하며 경계하라고 일러준다. 그에게 공명이 말한다.

“지난날 우리 주공께서 어렵게 형주를 지키면서 북으로는 조조를 막고, 동으로는 손권을 꺼려하시다가, 마침내 법정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켜 날개를 활짝 펴게 되시었소. 이렇듯 주공께서 남의 압제를 받지 않게 된 데에 법정의 공이 컸는데, 그 정도 작은 일도 뜻대로 못하게 해서야 되겠소?”

물론 당시 외인부대로 촉을 점령한 유비와 공명 무리에겐 내부의 협조자가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다는 점도 있었지만, 법정이 현덕과 죽이 잘 맞아 현덕이 그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갈량은 이처럼 주군이 사랑하는 부하들의 경우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정도의 악행은 눈감아주고 조용히 통제해 가며 주군이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줬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의인의 탄생


▎‘삼고초려’를 형상화한 그림. 제갈량은 자신을 찾아온 유비에게 천하삼분책을 건의해 유비가 천금을 주고 스카우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넷째로 유비가 죽은 후 어리석은 황제를 보필하면서도 내려놓지 않았던 ‘한실(漢室) 부흥’에 대한 헌신은 제갈량을 신하나 책사의 자리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한 의인(義人)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진정 그의 꿈이었는지, 아니면 외인부대로 촉땅을 차지한 그들 세력을 지탱해주는 명분이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단지 위선이라 하기엔 그가 죽을 때까지 보여준 고군분투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말도 오래하면 신념이 되고, 위선도 오래 하면 진정성이 되는 법. 어쨌든 그의 한실부흥의 기치는 결코 위선적이거나 가볍지 않았다.

그는 ‘한실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 집단의 대의명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 많던 ‘망한 한(漢)나라’의 신하 중 끝까지 고군분투함으로써 촉한이라는 작은 괴뢰국가를 위대한 국가, 후대 백성들에게서는 삼국 중 정통 국가로 인정받는 경지까지 끌어올린다. 신하론의 관점에서 보면, 제갈량은 신하가 군주보다 낮은 자리가 아님을 몸소 증명하였다.

황제보다도 높은 권위를 지녔던 막강한 2인자가 자신을 모진 환경으로 내모는 것은 찾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 한나라를 부흥하겠다며 오직 홀로 고군분투한다는 것도 어찌 보면 황당한 일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비가 죽고 3년 동안 부지런히 내치를 다져놓은 뒤,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 먼저 동쪽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고, 남만을 정벌해 남쪽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6차례나 기산으로 진출해 장안을 노리다 결국 전지(戰地)에서 병들어 죽는다. 하지만 그의 출병이 오직 ‘한실부흥’이라는 수구적인 대의명분에만 매달려 행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의 후(後)출사표에선 강대한 이웃나라와 변경을 맞댄 작은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고심이 담겨 있다. 이런 내용이다.

<전략>

강성한 역적이 우리와 경계를 맞대고 있으니 백성이 궁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어도 지금 대사를 그만둘 수는 없는 형국입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지키고 있으나 나아가 싸우나 드는 노고와 비용이 같은데도 속히 도모하지 않고, 오직 한 주의 땅에 처박혀 다만 적과 대치하고만 있는 것은 어인 까닭입니까.

무릇 천하의 일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옛날에 선제께서 초땅에서 패하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이제 천하는 평정되었노라고 좋아했사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는 동으로 오월과 손을 잡고, 서로 파촉을 취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쳐서 하후연의 목을 베셨사옵니다. 이는 바로 조조의 실수였습니다. 촉으로서는 이를 통해 한나라 대업이 이루어질 듯했사오나 동오가 맹약을 어겨 관우를 꺾고, 선제께서 자귀에서 패하시고, 조비가 황제를 참칭했사옵니다. 천하의 일은 이처럼 예측조차 하기 어렵사옵니다. 신은 다만 몸을 바쳐 정성을 다해 오로지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할 뿐이옵니다. 일의 성패와 이해(利害)는 신의 소견으로는 능히 예견할 수 없습니다.


또 나중에 손권이 황제를 자칭하고 나서 다시 촉에 동맹을 맺고 자신들에게 사자를 보내줄 것을 청하자 촉 조정에선 판단을 하지 못하고 제갈량에게 묻는다. 제갈량은 촉주에게 즉시 손권에게 축하사절을 보내고 동맹을 맺으라고 권한다. 그가 오직 한실의 유(劉)씨 만을 황제로 인정하는 수구적 명분론자였다면 할 수 없었던 실리적 선택이었다. 그는 단지 삼국 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촉을 유지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촉한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데 헌신한 신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최고의 경쟁력은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유비를 만났다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운이었다면 최고의 운은 유비의 모사 중 가장 오래 살아남았고, 건국 후 왕실이 안정되기 전에 유비가 죽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유비·관우·장비 등 창업 1세대가 모두 죽고,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며 그가 쳐부수어야 할 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점도 그가 다른 건국공신들과 달리 안정된 조정의 신하로서 업적을 이루고 죽을 수 있는 행운을 안겨다 준 것이었다.

최고의 경쟁력은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

원래 킹메이커 건국공신은 조정이 안정되는 와중에 죽임을 당하거나 죽지 않으면 떠나야 하는 것이다. 한고조 유방의 최고 모사인 건국공신 장자방이 한나라 수립 후엔 조정을 떠나 정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대 공신 한신은 남아서 땅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가 유방에게 죽임을 당한다.

또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越) 나라 왕 구천(句踐)을 도와 오나라를 멸하고 월나라를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범려(范蠡)는 월구천이 맹주가 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월나라를 떠난다. 그는 어려움을 함께 한 군주와 복록을 함께 누릴 수 없다는 이치를 일찍이 깨달은 것이다. 그가 건국공신 친구이자 월의 대부였던 문종에게 ‘토사구팽(兎死拘烹)’이라는 편지를 보내 떠날 것을 충고한 것은 유명한 고사다. 결국 떠나지 못했던 문종은 구천의 의심을 받아 자결한다.

이렇게 킹메이커는 왕을 세우곤 떠나야 한다. 뒤에 떨어질 떡고물까지 챙기려 들다가는 인생이 지저분하고 구차해지며, 대개는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노자가 말했듯이 “공을 세우고 명성을 얻으면 떠나야 한다”는 이치다. 그게 권력가 주변의 속성이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사에서도 이런 이치를 어겨 구차한 인생들을 여러 차례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제갈량은 자신의 군주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후임 왕은 어리고 아둔했으며, 외인부대로 들어가 남의 나라를 점령했던 지배층의 세력은 두텁지 않아 구심점이 필요했고, 통일과업은 그 뒤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갈량이 오래도록 집권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킹메이커 건국공신이 왕조 수립 후 안정 시기까지도 오래 집권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이러한 행운까지 겹쳐 『삼국지』를 비롯해 역사상 그처럼 극적인 성장세를 구가한 인물은 없다. 초야에 묻힌 포의(布衣)의 선비로, 역시 제 땅 한 뼘 못 가진 도망치는 영웅 유비를 모시고, 동분서주하여 한(漢)나라의 적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황제를 선포한다. 그리고 건국 공신으로는 드물게 죽는 순간까지 안정된 조정의 승상을 맡아 신하로써 봉사한 사례를 역사에 남긴다. 가장 위대한 중국의 재상을 꼽으라면 누구나 으레 제갈량을 꼽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처럼 건국부터 안정기까지 2인자 자리를 유지한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생전 했던 말 중 자신의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한 말은 바로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몸을 낮추고 온 힘을 기울이니 죽어서야 끝이 나리라)’라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청렴하게 살았다. 신하로서 그의 삶은 이처럼 고단함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박스기사] 제갈량의 맞수는?

제갈량은 젊어서는 맞수라 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동오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도, 손권의 장자방 노숙도 그의 맞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인생 말년에 강적 사마의(司馬懿)를 만난다. 사마의는 제갈량에 맞서 싸우지 않고 버티는 질긴 면모로 끝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던 제갈량을 극복한다. 북벌에 나선 제갈량은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사마의와 대치하던 중 병사한다. 제갈량까지 극복한 그 질기고 독특한 사마의가 쿠데타에 성공하고, 진나라 왕조를 여는 기초를 닦은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또 제갈량은 촉한의 개국공신인 한편으론, 실질적으로 진나라를 여는 일등공신으로도 꼽힐 만하다. 황제와 조정 중신들의 의심과 모해를 받아 관직을 빼앗기고 고향에 처박혀 있던 사마의를 다시 끌어내 명성을 쌓게 해준 것이 바로 제갈량이었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다룰 ‘삼국지로 본 사람경영’ 두 번째 인물은 바로 사마의다.

양선희 -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 ‘양선희의 시시각각’을 연재하는 중이다. 2011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품집으로『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 미디어)『, 카페 만우절』(나남)『5월의 파리를 사랑해』(문예중앙) 등이 있다.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 ‘양선희의 시시각각’을 연재하는 중이다. 2011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품집으로『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 미디어)『, 카페 만우절』(나남)『5월의 파리를 사랑해』(문예중앙) 등이 있다.

201608호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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