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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포 아시아CGI애니메이션센터 이사장 

“한국 애니메이션의 중국 진출 길잡이 역할 하겠다” 

서귀포시=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애니메이션 불모지로 통했던 제주도에 최신 제작시설이 갖춰진 애니메이션센터가 건립됐다. 지난 5월 19일 개관한 아시아CGI애니메이션센터다. 이 센터 건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정극포 초대 이사장을 만나 센터의 역할과 마래를 들어봤다.

▎ACA센터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정극포 이사장은 “ACA센터는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중국 진출을 적극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1992년 어느 날 저녁, 당시 영화감독으로 유명했던 이규형 씨가 SBS에서 PD로 활동하던 후배를 모임에 초대했다. 후배가 가보니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부회장, 김준식 계몽사 대표, 이규형 감독이 열띤 토론을 벌이며 술자리를 하고 있었던 것.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네 사람 모두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당시 이 감독은 스포츠 신문에 농구 관련 만화를 연재 중이었는데, 이 감독의 작품을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자는 데까지 이야기까지 진전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술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후배 PD에게 집중됐다. 당시 개국한 지 얼마 안되는 SBS에서 PD로 일하고 있던 이 감독의 후배에게 제작 프로듀서 자리를 맡기자는 제안이 나왔다. 멀쩡하게 방송국 PD로 일하는, 그것도 개국한지 얼마 안되는 방송국의 핵심 인재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함께 만들자고 했으니 그 후배 PD가 난감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 후배는 왠일인지 덥석 제안을 받아들인다.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중앙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광고 일을 하고 싶어서 일본 와세다대학교 대학원에서 광고를 전공했던 후배는 순간의 이 선택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술자리에 모인 4명의 인사들이 의기투합해 도전을 결정한 애니메이션 제작비는 총 25억원. 당시 보통의 영화 제작비보다는 규모가 컸다. 그 후배는 준비하는 3년 동안 애니메이션 기획부터 배급까지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전국의 극장에 ‘헝그리베스트 5’라는 애니메이션이 개봉됐다.

결론적으로 그 작품은 쫄딱(?) 망했다. 전국에서 애니메이션을 관람한 사람은 5만 명에 그쳤다. 제작비 25억원은 당연히 회수하지 못했다. 3년 동안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어려움을 절실하게 깨닫는,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었다. 제작 프로듀서를 맡았던 그 후배의 입에서 “이제 애니메이션은 지긋지긋하다”는 한탄이 나왔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났다. 애니메이션이 지겹다는 그 후배는 지금도 여전히 애니메이션 업계를 지키고 있다. 그 20여 년 동안 2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30편의 TV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지금은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그런 그가 요즘은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중국 진출을 돕는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지난 5월 19일 제주도 서귀포시에 개관한 아시아CGI애니메이션센터(ACA센터) 이사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글로벌화를 돕고 있는 이는 정극포(56) ACA센터 이사장이다. 그는 “센터가 개관한지 2개월이 지나면서 알찬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ACA센터는 미래부와 제주도가 50억원씩 투자해 제주도에 설립한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 애니메이션 센터다. CGI 애니메이션은 컴퓨터를 이용해 만든 애니메이션을 말한다. 제주도는 부지를 제공했고, 미래부는 센터에 필요한 기자재를 지원했다. ACA센터는 발전이 멈춘 서귀포시 구도심 개발의 중심 역할도 맡게 된다. 서귀포시는 ACA센터를 중심으로 생태공원 조성과 애니메이션 테마거리를 만들 계획이다.

서울 제작업체 3곳, ACA센터에 입주


▎제주도 서귀포시 구도심에 있는 2층 규모 건물 2동으로 이뤄진 ACA센터는 최신식 기자재가 갖춰져 있다.
민간자율주도형으로 운영되는 ACA센터의 규모는 총면적 2338㎡, 2층 건물 2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해 12월 개관 예정이었지만 시설장비 구축과 건축 일정이 지연되면서 5개월이나 연기됐다. 내부 시설에 대해 정 이사장은 “어떤 애니메이션센터보다 시설은 최고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춘천애니메이션센터, 서울남산애니메이션센터, 광주CGI센터,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국만화영상 진흥원 같은 애니메이션센터가 있다. ACA센터만큼 최신 기자재가 구비된 곳은 없는 상황이다. ACA센터에는 CG작업실이 2곳이 있고, 영상편집실, 음향제작실, 모션캡쳐실이 자리잡고 있다. 애니메이션 프리 프로덕션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CGI 애니메이션의 전 과정을 이곳에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다.

이곳에 입주할 기업을 위한 사무실이 5곳(입주 기업이 많아지면 더 확장할 계획)이 마련됐고, 서울에서 내려온 작업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게스트룸도 6곳이 있다. 뛰어난 시설과 제주도라는 지역적 매력이 더해져 로커스, 달고나 엔터테인먼트, 테드월드 같은 애니메이션 유명 제작업체가 ACA센터 입주를 계약했다.

ACA센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요즘 CJ CGV가 ‘ScreenX’라는 이름으로 건설 중인 3면 스크린 영화를 볼 수 있는 다면영상실이다. 30여 좌석이 구비된 조그마한 상영관이지만, 최신 기술로 촬영된 영상을 볼 수 있다. ACA센터 관계자는 “지역 주민을 위해 정기적으로 3면 스크린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며 “CGV의 협조를 얻어서 다양한 영화를 주민들에게 소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면 스크린과 좌우 벽면에 영상이 펼쳐지면 3D 안경 없이도 3D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외에도 교육실과 세미나실, 회의실, 휴게실 등이 2개동 센터 곳곳에 있다.

애니메이션과 제주도,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제주도에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는 업체도 2~3곳 밖에 없다. 제주대학교와 제주한라대학에도 애니메이션 제작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학과는 없다. 다만 멀티미디어 디자인전공, 방송영상과 같은 유사 학과에서 애니메이션 수업을 하고 있는 상황. 제주도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 인력이나 시설을 찾기 어려운 것. 이런 상황에서 ACA센터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린 이유가 있다. 정 이사장은 “제주도는 무비자, 무관세 정책을 통해 외국인의 출입국과 무역업이 자유롭다”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이 중국과 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제주가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중국 기업 19곳 한·중협력 프로젝트 가입


▎ACA센터 가동 2층에 있는 CGI 제작실.
여타 애니메이션센터는 제작 지원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ACA센터는 애니메이션의 유통을 강조한다. 특히 중국 시장을 노리는 애니메이션 업계를 지원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 중국 시장에 대한 전문성 같은 노하우를 키워내는 게 내 역할”이라고 정 이사장은 설명했다.

ACA센터의 역할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GAP(Global Animation Partners)라는 이름의 한·중협력 프로젝트다. GAP는 중국에서 통할 수 있는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발굴하고, 파일럿(견본 프로그램) 제작 지원을 하고, 투자와 배급 및 유통까지 맡게 된다. ACA센터는 한중애니메이션 유통 플랫폼 역할을 한다.

“ACA센터의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 파일럿 영상은 ACA센터에서 제작하고, GAP 쇼케이스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미디어 기업에게 선보이게 된다. 여기서 선정된 작품은 투자 및 유통, 배급망 연결 등을 통해 한국과 중국에 선보이게 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GAP가 놀라운 것은 여기에 참여한 기업들 면면 때문이다. 중국 최대 애니메이션 TV인 찐잉카툰위성TV, 중국 온라인 비디오채널 업계 선두인 아이치이, 텐센트가 전액 출자해 설립한 텐센트픽처스, 중국 최대 애니메이션 그룹 알파엔터테인먼트, 중국을 대표하는 완구사인 링동과 스타젯 등 애니메이션 관련 기업 19곳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CGV, EBS, SK브로드밴드, 센트럴투자파트너스, SV인베스트먼트 등 8개사가 소속되어 있다.

정 이사장은 “GAP에 대한 관심이 높다. 투자사가 벌써부터 500억원의 투자재원을 모았고, 좋은 작품에는 투자를 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GAP 공동위원장은 ACA센터의 정 이사장과 찐잉카툰위성TV가 맡게 된다.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는 중국 진출에 공을 들였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중국 미디어 사업자와 개별적인 논의와 협상을 진행한 탓에 계약이 갑자기 중단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 ACA센터와 GAP가 작품의 중국 진출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움을 주기 때문에 창작자들은 작품 제작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중국일까. 정 이사장은 “디즈니와 드림웍스가 지배하는 애니메이션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면서 “세계 최대시장 중 하나인 중국과 손을 잡고 아시아에서 우리만의 리그를 만들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ACA센터의 독특한 설립 목적은 중국 진출을 노리는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도 주목하고 있다. 이런 중요한 역할을 정 이사장이 맡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중국과 일본에 진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 이사장의 직함은 또 하나 있다. 지앤지엔터테인먼트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업체의 대표 직함이다.

‘헝그리베스트5’의 처절한 실패를 겪은 후 그는 일본 대중문화를 수입하는 에이전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의 최대 광고제작사인 로봇과 한국의 계몽사가 조인트 벤처로 만든 로봇코리아에서 기획실장 직을 맡았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고, IMF라는 파도를 맞으면서 투자를 했던 계몽사가 부도를 맞게 된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많이 고민했다. 방송국으로 돌아가기에는 나이가 많았고, 제일 잘하는 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로봇코리아를 그만두고 그가 한 일은 일본에서 준비 중이던 3세대 아톰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로봇코리아 일을 하면서 일본 기업을 알게 됐고, 그쪽에서 도움을 요청해서 참여하게 됐다”고 정 이사장은 설명했다.

‘꼬마 신선 타오’ 중국 TV에 방영 성공

이 일을 마친 후 2000년 지앤지엔터테인먼트라는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한국 시장만 고집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한국과 일본에 스튜디오를 함께 설립했다. 오래 전부터 해외 시장 진출 노하우를 쌓을 수 있던 것. 정 이사장이 2003년 아톰의 한국 사업권을 따낸 것도 일본 진출 시도를 먼저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톰 한국 사업권은 지앤지엔터테인먼트와 정 이사장의 이름을 업계에 알리게 된 계기였다. “1년 동안 캐릭터 사업, 뮤지컬, 모바일 게임 등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몇 년이 지나니까 아톰에 대한 인기가 시들어 너무 미안해서 판권을 반납했다”고 했다. 2006년 TV에 방영된 ‘라라의 스타일기’, 2007년 작품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단편 애니메이션 등은 일본과 공동제작한 작품들이다.

2007년부터 중국 시장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중국 상하이 미디어그룹 산하의 모션매직디지털엔터테인먼트와 400만 달러를 투자해 제작한 3D 애니메이션 ‘꼬마 신선 타오’가 그 시작이었다. “내가 제작에 참여해 만든 애니메이션이 중국 TV에 처음 방영된 작품이 ‘꼬마 신선 타오’다”라고 정 이사장은 자랑했다. “프랑스 칸에서 열린 애니메이션 행사에 부스를 마련했는데 그때 중국 업체 관계자와 인연을 맺었다”고 덧붙였다.

2007년 중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이후 다양한 경험을 했다. 계약서까지 썼는데도 일방적으로 중국 기업이 파기하는 황당한 경우도 겪어야만 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은 중국 시장에 대한 노하우를 쌓는데 도움이 됐다. ACA센터를 운영하는 초대 이사장으로 일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앤지엔터테인먼트는 일본과 중국에 지사를 두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스튜디오로 유명하다.

“ACA센터 이사장을 맡을 때 업계에서 지앤지엔터테인먼트만 좋게 된 것 아니냐는 우려를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는 것도 벅차고 해서 지앤지엔터테인먼트 일은 줄일 계획이다”고 정 이사장은 밝혔다. 지앤지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을 마무리하면 신규 작업은 하지 않을 계획이다.

2011년부터 제주도에 애니메이션센터를 건립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정 이사장은 정치권과 지자체를 설득하면서 사업을 추진해왔다. 그것이 ACA센터 건립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가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 이사장은 “ACA센터를 세계 10대 애니메이션 제작 센터로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ACA센터는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중국 진출을 돕는 일 뿐만 아니라 지역에 뿌리내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도 벌이고 있다. 대학생과 미취업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CGI 아카데미’,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서귀포 아카데미’, 누구나 참여 가능한 ‘애니 창의 캠프’ 과정을 마련했다. CGI 아카데미 사업은 제주대학교와 협력해 3D모델링부터 렌더링을 포함한 CGI 애니메이션 교육 프로그램 ‘3D 콘텐트 제작트랙’ 과정으로 진행 중이다. 애니 창의캠프는 4개의 사업으로 계획되어 진행 중이다. 7월부터 진행 중인 전문 성우 교육 과정 ‘보이스 탤런트’는 10명 모집에 20명이 모여들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8월에는 제주도 내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2박3일 과정의 ‘청소년 애니창작 캠프’도 계획되어 있다.

정 이사장은 “ACA센터는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성장을 위해 정부가 재원을 투자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발전하는 데 센터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 서귀포시=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201608호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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