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캄은 한국(Korea)과 ‘전투’를 뜻하는 독일어(Kampf)를 합성해 지은 이름이다.
‘전투하듯 영업하는 한국 기업’이란 뜻이다. 쟁쟁한 대기업들을 제치고 정부로부터 ‘신산업
기술력을 갖춘 글로벌 히든챔피언’으로 인정받은 비결을 들어보았다.
▎홍지준 코캄 회장. 타고난 영업맨이자 엔지니어 기질을 가진 홍 회장은 코캄을 ‘신산업 기술력을 갖춘 글로벌 히든챔피언’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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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7일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가 충남 논산의 한 중소기업 공장을 찾았다. 유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고부가가치 신기술에 기반을 둔 신산업 육성을 향한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한 시점”이라며 “신산업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이 글로벌 히든챔피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부총리의 발언만 부각됐지만, 이 중소기업은 부총리의 방문으로 자연스럽게 ‘신산업 기술력을 갖춘 글로벌 히든챔피언’으로 인정받은 셈이 됐다.이 중소기업의 이름은 코캄(Kokam), 리튬폴리머 배터리를 만드는 회사다. 지난해 800억원 매출에 56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신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리튬 배터리라 하면 대기업인 LG화학과 삼성SDI도 있을 텐데, 경제부총리가 왜 이 기업을 찾았을까.
솔라 임펄스2의 지구 한 바퀴 비행의 숨은 주역코캄은 지난 7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수도 아부다비에서 들려온 세계적 뉴스 속에도 살짝 숨어있었다. 7월 26일(현지시간) 새벽 UAE 아부다비 공항에 비행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양 날개의 길이가 72m에 이르는 이 비행기의 이름은 솔라 임펄스2. 기름 한 방울 쓰지 않고 오로지 태양광 에너지로만 나는 비행기다. 스위스에서 만든 이 비행기는 지난해 3월 아부다비를 떠난 지 1년 4개월 만에 출발지로 돌아왔다. 태양에너지로만 지구 한 바퀴 도는 세계 최초의 여행이었다. 솔라 임펄스2는 그간 아부다비를 출발해 동쪽으로 오만과 인도, 중국, 미국 하와이, 피닉스, 뉴욕, 유럽을 거쳐 다시 아부다비에 돌아왔다. 총 비행거리는 3만8000km. 물론 한 번도 땅에 착륙하지 않고 지구 한 바퀴를 돈 건 아니다. 전체 여정을 17개 구간으로 나눠 짧게는 하루, 길게는 3~4일 밤낮을 날았다. 위기도 있었다. 여정 중 가장 긴 구간인 일본 나고야~하와이 일정이었다. 솔라 임펄스2 계기판의 배터리 표시등에 빨간불이 켜졌다. 가야할 길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배터리의 온도가 섭씨 50도 이상으로 올라가가 시작했다. 엔지니어들 사이에 애초 예정된 일정대로 하와이~샌프란시스코 일정을 강행할 경우 위험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결국 하와이에서 보름을 체류하다 한국에서 새 배터리를 가져와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스위스의 솔라 임펄스2가 긴 여정을 마치고 아부다비 공항에 내려앉는 순간, 지구 반대편 한국 땅에서 감격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코캄의 홍지준(60) 회장이었다. 솔라 임펄스2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배터리가 바로 코캄의 리튬폴리머 2차 전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태양광 비행기에 태양전지만 있다면 빛이 없는 밤에는 날 수 없다. 태양전지가 생산한 전기를 모아두는 배터리가 있어야 빛이 없는 밤에도 하늘을 날 수 있다. 세계 주요 외신들은 솔라 임펄스와 두 명의 조종사들의 지구 일주 성공을 일제히 보도했다. 하지만 정작 태양광 비행기가 어떻게 태양빛이 없는 밤을 지새워 날았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난 20일 경기도 수원의 코캄 본사에서 만난 홍 회장은 그날의 기분을 이렇게 기억했다. “솔라 임펄스2의 성공은 우리 배터리의 성공인 만큼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 배터리 얘기를 하지 않아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했지요.”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리튬폴리머 배터리의 원조
▎코캄의 리튬폴리머 2차 전지를 장착하고 지구 한바퀴 일주에 성공한 솔라 임펄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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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소기업이 만든 배터리가 어떻게 세계 최초로 지구 한바퀴를 돈 스위스 태양광 비행기에 장착될 수 있었을까. 시장조사기관 B3가 밝힌 지난해 3분기 보고서에 나온 전기차 배터리 시장 ‘톱10’(시장 점유율 기준)에 한국 기업이라고는 LG화학(2위)과 삼성SDI(5위) 뿐이었다. 다만, 또 다른 시장조사업체 ‘내비건트리서치’가 지난해 6월 내놓은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 경쟁력 보고서를 보면 살짝 힌트가 보인다. 1위 LG화학에 이어 삼성SDI-비야디(중국) 다음으로 ‘코캄’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여기서 경쟁력이란 시장진출 전략과 생산전략·기술력·판매력·마케팅·유통·품질·신뢰도·가격 등 12개 항목을 평가한 결과다. 마케팅과 전략 등에 열세일 수밖에 없는 한국 중소기업 코캄이 글로벌 대기업들과 종합적인 평가에서 경쟁해 4위에 올랐다는 건, 전체 항목의 평균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다. 홍 회장은 그게 바로 기술력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한다.사실 코캄은 전기자동차와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리튬폴리머 배터리의 원조 회사다. 홍 회장은 1998년, 남들은 IMF 외환위기로 고초를 겪느라 정신이 없을 때, 리튬폴리머 배터리를 생각해냈다. 리륨폴리머 배터리가 단지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단순 리튬이온 배터리가 최첨단이었던 시절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액체 상태의 전해액을 단단한 금속재질로 감싼 형태다. 때문에 전해액이 흐르거나 폭발할 위험이 있다. 이와 달리 리튬폴리머 배터리는 리튬이온과 원리는 같지만 전해질을 젤 형태의 고분자로 바꾸고, 단단한 금속 대신 과자봉지 같은 파우치를 쓴다. 덕분에 리튬이온보다 안전하고, 에너지 효율도 더 높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제조가 가능하고 무게도 더 가볍다. 단점이라면 리튬이온보다 가격이 다소 비싸다는 것이다. 개발은 쉽지 않았다. 홍 회장은 “7년간 악전고투 끝에 독자기술로 리튬폴리머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받았다”고 말했다.리튬폴리머 배터리의 시작은 리모트콘트롤(RC) 비행기용이었다. 비행기마다 모양이 다르고 무게도 다른 데다, 강력한 힘이 필요하니 리튬폴리머 배터리가 제격이었다. 성공은 뜻하지 않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2004년 RC 비행기용 배터리가 기체 본체와 잘 맞지 않는 바람에 리튬폴리머 파우치를 비정상적으로 얇게 만들었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 영업용 배터리 샘플을 뿌려가며 홍보하러 다닐 때였는데, 웬걸, 얇은 파우치의 배터리를 쓴 RC비행기가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얇은 파우치에서 기존 배터리보다 40배나 많은 힘이 뿜어져 나온 덕분이었다. 당시 RC비행기는 대부분 가솔린 엔진을 쓰던 때였다. 그 이후 매니아들 사이에 코캄 배터리 소문이 쫙 퍼졌다. 이후 3년 만에 RC비행기 시장에서 엔진이 사라지고 코캄 배터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코캄 성공 신화의 시작이었다. 외국 RC비행기 매니아들은 중에는 관련 산업의 전문 엔지니어들이 많았다. 이들이 소문을 내기 시작하니 세계 곳곳에서 대리점을 내겠다는 이들이 코캄을 찾아왔다.강력한 힘을 내는 배터리가 있다는 소문 퍼지자 외국의 군(軍)에서 먼저 코캄을 찾아왔다. 성능 하나만큼은 세계최고 수준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2008년 이미 미국과 영국·독일 등의 해군이 잠수함 등 무기체계 추진체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한국군도 이내 따라왔다. 2008년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장거리 대잠어뢰 ‘홍상어’를 개발할 때 얘기다. ADD는 막판에 배터리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국내 대기업이 만든 배터리를 어뢰 추진체로 쓰고 있었는데,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배터리의 성능이 뚝 떨어졌다. 어느 날 ADD 연구원 한 명이 소문을 듣고 코캄을 찾아왔다.홍 회장은 “수원까지 네 번이나 찾아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눈 딱 감고 ‘1주일 안에 해결해주겠다’고 공언을 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미 미 해군 잠수함에서 코캄 배터리를 쓰고 있던 시절이었기에 홍 회장은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홍상어에 맞는 배터리를 만들어 실험했더니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어뢰에 리튬폴리머 배터리를 쓴 건 그때가 세계 최초였다. 2012년에는 영화 타이타닉의 감독 제임스 캐머런이 1인 잠수정 ‘딥시 챌린저’에 코캄 배터리를 탑재해 깊이 1만863m의 마리아나 해구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쯤 되니 왜 스위스의 태양광 비행기 솔라임펄스2가 코캄 배터리를 썼는지 이해가 됐다.뭐든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재능 같은 것은 없는 걸까. 홍 회장의 엔지니어 겸 사업가 기질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았다. 그는 6.25 전쟁 뒤 황해도에서 피난을 내려온 사람들이 몰려 살았다는 피난민 정착촌 ‘인천 석바위’ 출신이다. 홍 회장의 부친은 전후 인천 시내에서 당시만 해도 신산업이었던 나일론 양말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불티나게 팔리던 나일론 양말공장은 그러나 부친이 결핵에 걸려 쓰러지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 병상에서 다시 일어선 부친은 빈털터리로 석바위로 들어가 앙고라토끼 사육을 시작했다. 토끼털로 원사(原絲)와 옷감을 만들어 팔아보겠다는 계획이었다. 홍 회장은“그 시절 아버지가 제직기를 만들기 위해서 기계제작소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셨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일을 나가시면서도 막내둥이였던 내 손을 꼭 잡고 다니시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앙고라토끼 원사도 당시 정부 규제로 토끼털 시장이 막히면서 무산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던 홍 회장의 부친은 홍 회장이 12살이 되던 해에 빚더미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NASA 우주선과 인공위성 등에 배터리 공급
▎코캄의 리튬폴리머 배터리를 사용한 대잠어뢰 ‘홍상어’의 축소모형. /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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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홍 회장의 고학(苦學)이 시작됐다. 모친은 두부장사로, 홍 회장은 과외수업으로 생활비를 마련해 겨우 고교를 마쳤다. 두뇌가 명석했던 홍 회장은 다행히 서울대 화학교육학과에 합격했다. “나일론 양말공장을 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공선택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홍 회장은 기억했다. 1979년 졸업 후 첫 직장이 ㈜효성의 모태 기업인 동양나일론이었던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국내 최고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덕분에 그는 입사하자마자 회사가 울산에 건설하고 있던 폴리에스터 합성 공장에 배치됐다. 동양나이론이 79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페트병이 당시 홍 대리의 손에서 나왔다. 이후 현대전자의 미국 실리콘밸리 지사를 거쳐, 리커만코리아라는 독일계 무역회사에서 기계 엔지니어링 영업을 했다. 기술을 바탕으로 한 영업은 요즘 말로 ‘대박’이었다. 리커만코리아 연간 판매량의 65%를 혼자 해치웠다.홍 회장은 “그때 내가 세일즈에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며 “그때 내 연봉이 지금 대치동 은마아파트 10채 값은 됐다”고 말했다. 10년 직장생활을 끝으로 89년 창업에 나선 계기였다. 그는 산업용 기계를 수입·수출하는 무역회사 코캄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코캄(Kokam)은 ‘Korea’와 ‘전투’를 뜻하는 독일어 ‘Kampf’를 합성해 지은 이름이다. ‘전투하듯 영업하는 한국기업’이란 뜻이란다.산업용 기계 무역업을 하다보니 엔지니어 기질이 발동했다. 그것이 1998년 코캄 배터리의 시작이었다. 코캄은 이제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선과 인공위성, 구글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저장시스템(ESS) 등에도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배터리 판매를 넘어 설계와 운영 소프트웨어, 시공까지 한 번에 턴키 방식으로 공급하는 ESS 솔루션 사업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가 진행하는 주파수조정용 ESS 구축 사업에 36㎿ 규모의 ESS 배터리를 공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2014년 한전 시범사업으로 서안성변전소에 16㎿를 수주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에는 신김제와 신충주 변전소에 각각 24㎿, 16㎿ 배터리를 공급했다. 올해는 미국과 유럽에서 각각 15㎿, 30㎿ ESS 배터리를 수출하는 등 글로벌 시장을 다각도로 공략하고 있다. 코캄이 그간 한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브라질 뉴질랜드 노르웨이 등지에서 수주한 ESS 프로젝트는 총 152㎿에 달한다. 덕분에 지난해에는 800억원 매출에 38억원의 당기순익을 올렸다. 전체 매출의 80%를 해외에서 건져 올린 기록이었다. 글로벌 대기업인 LG화학과 삼성SDI가 배터리 부문에서 아직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실적이다. 홍 회장은 “ESS 프로젝트 전체의 수주가 지난해보다 50% 이상 늘어나 내년부터 연매출이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