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People

Home>포브스>CEO&People

제임스 레프리노 단독 인터뷰 

‘치즈의 제왕’을 만나다 

CHLOE SORVINO 포브스 기자
피자헛부터 리틀시저스, 파파존스, 도미노피자에 이르기까지, 미국 피자 체인 대부분은 동일한 회사에서 모짜렐라 치즈를 공급 받고 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은둔형 억만장자 제임스 레프리노를 만나 그가 어떻게 거대한 치즈 제국을 건설했는지 들어본다.
덴버에 위치한 레프리노 푸드(Leprino Foods) 본사, 제품을 실험하는 테스트 키친에서 치즈가 산사태처럼 쏟아져 나왔다. 레프리노 푸드는 피자헛과 파파존스, 도미노피자에 모짜렐라 치즈를 공급하는 치즈 전문업체다. 가장 먼저 쏟아진 건 가늘게 자른 저수분 모짜렐라 치즈였다. 이후 큐브 모양의 치즈와 함께 짧고 널찍하게 자른 고급 ‘아티즌’ 치즈가 쏟아졌다. 모짜렐라 치즈를 베이스로 해서 각종 향을 첨가한 치즈도 있었고, 프로볼로네 치즈와 체다 치즈, 몬터레이 잭도 있었다.

회사 요리사들이 12개 오븐에서 막 구운 테이크아웃 피자를 들고 나왔다. 뉴욕스타일의 파이도 있었고, 크러스트 속을 채운 피자도 있었다. 햄과 체다 치즈가 들어간 핫 포켓(Hot Pockets) 피자부터 스토퍼스(Stauffer’s) 라자냐, 스마트 원(Smart Ones) 지티(ziti)면도 있었다. 피자 다음으로는 간식과 함께 먹으면 좋은 큐브 치즈가 나왔다. 땅콩과 함께 먹으면 좋은 배 향 치즈가 있었고, 프레첼과 즐기면 좋은 고르곤졸라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디저트용 치즈가 나왔다. 뜨거운 도우 안에 소금 캐러멜향 모짜렐라를 넣고 시나몬 슈가를 입힌 디저트다. 1시간 뒤에는 회사가 생산하는 유당과 유장 분말(whey powder)을 담은 플라스틱 잔이 나왔다. 프로틴바와 요플레 요거트, 필스베리 토스터 스트루델(Pillsbury Toaster Strudel), 매년 수백만 명의 아기들이 먹는 분유에 들어가는 분말이다.

유제품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주방에서 2층 더 올라가면, 다크우드로 모서리를 장식하고 바닥에 흰 대리석을 깐 사무실이 나온다. 금으로 가장자리가 장식된 코린트식 기둥 사이에는 ‘치즈 공장의 윌리 웡카’라 불리는 제임스 레프리노(James Leprino)가 앉아 있었다. “(인터뷰에) 동의했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79세의 억만장자가 말했다. “사생활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요.”

정말 그렇다. 업계를 공격적으로 장악한 그는 사생활에서만큼은 유례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지난 수십 년간 사진사들을 용케 피해 다니기도 했다. 구글 이미지로 검색하면 콜로라도 억만장자인 필립 앤슈츠(Philip Anschutz)나 화장품 상속자 로날드 로더(Ronald Lauder) 등만 나올 뿐이다. 심지어 회사 웹사이트에서도 레프리노의 사진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나 60년간 회사를 경영하고 포브스 억만장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지 10년이나 지난 지금, 재산 규모가 30억 달러에 이르는 레프리노는 드디어 인터뷰에 임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덴버의 리틀 이탈리(Little Italy)에서 가족과 함께 운영했던 작은 식료품점이 세계 최고의 ‘피자 치즈(경쟁업체들은 살짝 조롱을 섞어 그의 치즈를 ‘피자 치즈’라고 부른다)’ 업체로 성장하기까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현재 레프리노 푸드는 매년 45만 3600톤 이상의 치즈를 판매하며 30억 달러의 매출을 벌어들이고 있다.

재산 규모가 30억 달러에 이르는 은둔의 자산가

레프리노에 관해선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이번 인터뷰용 사진도 거절했을 정도다. 어쨌든 그는 미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독점기업인 중 하나로 손꼽힌다. 피자 치즈 시장에서 그의 점유율은 85%에 달한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만든 듯한 신선한 맛의 모짜렐라 볼이나 피자는 과감히 손에서 놓고, 대형 피자체인 치즈 공급에만 무섭게 집중한 결과다. 틈만 나면 서로의 목을 겨누며 치열하게 경쟁하는 피자헛과 파파존스, 리틀시저스, 도미노피자 모두에 치즈를 공급하고 있을 정도다. 이들 브랜드 또한 각자가 치즈를 어디에서 구매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시장을 장악해서 얻은 이익은 많다. 덕분에 그는 평범한 낙농업자는 엄두도 못 냈을 기술 투자를 통해 50건의 특허를 출원했다. 그렇게 얻은 순수익율은 낙농업계 평균을 크게 웃도는 7%다.

손목 시계 테두리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그의 손목에서 영롱한 빛을 냈다. 레프리노는 낡아서 반질반질해진 검은 가죽지갑을 꺼내 지갑이 벌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킨 고무 밴드를 빼고 사훈을 담은 카드를 꺼냈다. 카드에는 ‘품질, 서비스, 가격, 양심’이 적혀 있었다. “직원 모두가 이 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했다”고 레프리노는 말했다. “회사가 급성장하는 동안 중요한 메시지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품질’이 가장 먼저 적힌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제품은 흉내내기 쉽다(인공화합물을 넣은 치즈 정도야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레프리노 푸드는 유제품 대기업 중 한 번도 제품 리콜을 하지 않은 드문 기업 중 하나다. 매주 월요일 11시 30분이 되면, 레프리노는 그가 가장 신임하는 경영진 스무 명과 함께 테스트 키친을 방문한다. 앞부분에서 묘사한 ‘먼데이 멜츠(Monday Melts)’ 회의를 보기 위해서다. 경영진은 전세계 40개국 300개 고객사를 위해 생산한 치즈 샘플을 테스트하고, 바로 전 주에 접수된 민원이나 고객불만을 확인한다. “내가 건성으로 임하는 게 아님을 직원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직원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진행 중인 일은 지원을 아끼지 않되,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직원이 하겠다고 하는 일을 책임 있게 마무리하도록 돕고 확인하는 게 나의 임무다.”

그가 처음부터 참견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치즈 업계 중역 다수는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레프리노가 과거 프랜차이즈 점주들을 직접 방문해 첨단기술로 생산한 자신의 치즈를 집중 홍보하는 ‘공격적’ 마케팅 유형의 리더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입을 연 사람 대부분이 그 이상을 말하지 않으려 했고, 실명 공개 동의는 더욱 받기 어려웠다. 한 피자 사업가는 거대 모짜렐라 기업의 지분 100%를 가진 레프리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엄청난 힘을 가진 남자다.”

레프리노 사무실에는 그의 뿌리를 보여주는 증표가 많았다. 어머니가 16세 때 올린 흑백 결혼식 사진이 있었고, 그가 아버지와 함께 신선한 모짜렐라 치즈를 볼로 만드는 모습을 양각으로 조각한 청동 부조도 있었다. 레프리노 푸드가 태동된 곳은 이탈리아 남부의 한 산악 마을이다. 그의 아버지 마이크 레프리노 시니어(Mike Leprino Sr.)는 1914년 16세에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이 민을 왔다. 고산 지대에 익숙했던 마이크는 덴버의 산악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별다른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고 영어로 읽고 쓸 줄도 몰랐던 그는 농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30여 년이 지난 1950년, 마이크는 드디어 자신의 농작물을 판매할 식료품점을 열었다. 이후에는 신선한 리코타 치즈와 모짜렐라 볼, 제임스의 누나 앤지가 직접 만든 라비올리 등 이탈리아 전통 식재료를 함께 판매하기 시작했다.

5남매 중 막내였던 제임스는 반 친구들이 틈만 나면 동네 피자가게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걸 눈 여겨 봤다.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자신이 경험으로 얻은 정보를 공유했다. “그 지역 피자 가게들은 매주 2.3톤의 치즈를 사들이고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공략하기 좋은 시장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1958년 대형 식료품 체인이 근처에 문을 열면서 레프리노의 식료품점은 결국 문을 닫았고, 그는 남은 615달러로 레프리노 푸드 제국을 시작했다.

이탈리아 남부 산악 마을에서 태동한 레프리노 푸드

치즈 장사를 하기 좋은 시기였다. 같은 해 피자헛 1호 매장이 캔자스 주 위치토에 문을 열었다. 1년 뒤에는 마이크와 마리안 일리치(Ilitch) 부부가 디트로이트 교외에 리틀시저스 1호점을 열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도미노피자가 미시건 주 입실랜티(Ypsilanti)에서 피자 배달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온 군인들 덕에 피자 수요가 치솟으면서 냉동 피자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2년 만에 레프리노 푸드는 지역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매주 90kg의 모짜렐라 치즈를 공급했다.

레프리노는 치즈 대량생산에 필요한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딸이 어렸고, 둘째 출산도 임박해서 대학을 다닐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위스콘신에서 치즈 공장을 운영했던 레스터 킬스메이어(Lester Kielsmeier)를 고용했다. 2차 세계대전에 공군으로 참전했다가 무사 귀환했지만, 아들이 작전 중 사망한 걸로 알았던 아버지가 치즈 공장을 팔아 버려서 구직에 나선 상태였다. “레스터를 데리고 고철 폐기장에 가서 커다란 치즈 저장통 2개를 샀다. 내가 진지하게 사업을 키우려 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레프리노는 말했다.

레프리노가 업계를 처음 뒤흔든 해는 1968년이다. 당시 피자헛은 피자에 들어가는 치즈의 양을 표준화하는 동시에 비용을 절감해줄 공급업체를 찾고 있었다. 피자헛 매장에서 5파운드의 치즈 덩어리를 잘라내는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들어가는 치즈의 양도 일정치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레프리노 푸드는 공장에서 동일한 크기로 치즈를 자른 후 냉동시켜 유통에 나섰다. 업계에서 처음 시도된 방식이었다. 피자 업체들은 이제 치즈를 주방에서 자를 필요 없이 잘라진 조각을 도우 위에 올려 놓기만 하면 됐다.

킬스메이어가 치즈를 만드는 동안 레프리노는 효율성 제고에 집중했다. 치즈가 덩어리로 굳어지고 남은 고칼슘 용액 유장(whey)은 결국 강에 버려지는데, 그 비중이 원재료의 절반에 달하는 걸 깨달은 그는 1964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는 아이들의 키 성장을 돕기 위해 유장에서 우유 단백질을 추출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5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레프리노 푸드는 유청(sweet whey) 부산물인 유당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미국 업체로 남아 있으며, 일본에서도 높은 점유율을 유지 중이다.

치즈 사업으로 돌아와 보자면, 레프리노는 피자헛을 만족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72년 매장 1000개를 돌파한 피자헛은 증시 상장에 성공했다. 전성기인 1990년대에는 피자헛이 레프리노 매출의 90%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피자헛 매장에서는 미리 잘라 놓은 모짜렐라 치즈가 녹을 때까지 오래 상온에 놔두는 경우가 있었고, 그럴 때면 치즈가 부서지는 문제점이 있었다. 고객 불만사항을 접수한 레프리노 푸드는 첫 번째 돌파구를 만들어 냈다. 치즈의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보존 미스트를 개발한 것이다. 레프리노 연구팀은 미스트를 치즈에 뿌리는 방법으로 소금 캐러멜이나 할라피뇨 등의 향을 치즈에 첨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짜렐라 치즈를 기본으로 하고 체다 치즈 미스트를 뿌린 후 오렌지 색으로 물들여 저지방 ‘체다 치즈’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이후 레프리노 푸드의 생산량은 매주 907톤으로 16배나 급증했다.

미국에서 피자의 인기가 폭발하던 때 사업을 시작해 기막힌 타이밍 효과를 누렸던 레프리노는 입지 선택에서도 운이 좋았다. 미국 중부에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1970년대 미국에서는 위스콘신과 뉴욕에서 대부분의 우유가 생산됐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서는 낙농업이 초기 단계에 있어서 우유 가격이 낮게 책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래를 내다보는 감각이 있었던 레프리노는 중개 거래에 뛰어들었다. 캘리포니아 낙농업자들과 수십 년에 걸친 장기계약을 체결해서 캘리포니아 현지에서는 시장 평균 가격보다 높게 팔고, 전국적으로는 시장 평균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하도록 협상한 것이다. 이후 20년 간 레프리노 푸드는 협동조합과도 유리한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이 협동조합이 이후 미국낙농조합(DFA)로 발전한 덕분에 레프리노는 결국 미국 최대 낙농협동조합과 장기 우유 공급계약을 확보한 셈이 됐다. 낡은 낙농 생산시설을 매입해 개조하는 작업을 함께 진행해서 우유 가공업체를 찾아야 하는 경쟁업체의 선택권을 효과적으로 제한시키기도 했다. 피자헛 치즈 구매를 총괄했던 제리 그래프(Jerry Graf)가 말했듯이, “레프리노는 언제나 한 걸음 앞서 있었다.”

레프리노가 이룬 최대 혁신은 과학과 영업의 결합

레프리노가 이룬 최대 혁신은 과학과 영업의 결합이다. 미국 4대 피자 체인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던 시기에 최신 기술을 활용해 이들 각자가 필요로 하는 바를 충족시켜준 덕택이다. 당시는 이들 4대 체인이 미국 식품산업 역사상 가장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이던 때였다.

가장 먼저 도입된 기술은 막 만든 치즈를 급속 냉동해 풍미와 맛을 잡아두는 QLC(Quality Locked Cheese) 공법이다. 1986년 QLC가 처음 도입됐을 때, 전통을 철저히 지키는 이탈리아계 이민자가 대부분이었던 레프리노의 경쟁업체들은 코웃음을 쳤다. “할머니가 전해준 레시피 피자에 그런 치즈를 올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30년간 피자업계에서 일한 베테랑 에드 짐머맨(Ed Zimmerman)은 말했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매장 수요에 맞게 특화된 공정은 일관된 품질과 확장성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특허까지 얻어내자 레프리노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됐다. 피자헛 구매 총괄이었던 그래프는 아직 성장 중이던 피자헛을 떠나 도미노피자로 가면서 레프리노를 도미노에 소개시켜줬다. 1978년 매장 200개였던 도미노피자가 1989년 5000개로 급성장하던 시기였다. 당시는 매장이 3000개가 넘는 리틀시저스 또한 ‘1판 가격에 맛있는 피자 2 판’이란 마케팅을 통해 연평균 25%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1991년에는 1985년 영업을 시작한 파파존스 피자와 독점 공급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레프리노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이들 업체 모두와 계약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각 브랜드에 납품하는 생산공정을 독립시켜 각자의 요구 조건과 피드백에 맞춘 생산을 했기 때문이다. “모든 고객이 우리의 유일한 손님인 것처럼 정성을 다한다”고 펩시 경영진으로 있다가 6년 전 레프리노에 합류해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마이크 더킨(Mike Durkin) 사장은 말했다. “도미노피자 앞에서는 파파존스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이건 모든 고객사에 해당되는 원칙”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도미노피자는 1996년 독점 공급계약에 동의했는데, 계약서는 1장 밖에 되지 않았다. “악수에 가까운 계약이었다”고 도미노피자 공급망 부사장이었던 마이클 수아넷(Michael Soignet)은 말했다.

피자헛이 온도가 높은 컨베이어 오븐을 도입하자, 레프리노 푸드는 더 높은 온도에서도 치즈가 타지 않도록 제조 공식을 바꾸었다. 배달 위주의 도미노피자가 매장을 확대하자 레프리노 수석 치즈메이커인 레스터 킬스메이어는 배달 후에도 오븐에서 막 꺼낸 모양과 맛을 유지하도록 치즈를 개발했다. 새로운 첨가제를 넣은 치즈를 선보였을 때 파파존스가 이전 치즈가 더 좋다고 이를 거부한 적이 있다. 이때 레프리노는 비판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레프리노는 회사 특허와 사업에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파파존스 창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존 슈내터(John Schnatter)가 말했다. “그에게 아주 의미가 크다는 뜻이다. 새로운 치즈가 별로라고 하니까 그는 마치 자신이 공격을 당한 것처럼 상처를 받았다.” 그 후 약 두 달이 지나서야 레프리노는 파파존스에 공급하는 치즈를 이전 것으로 바꾸었다. “레프리노가 나를 찾아와서 ‘파운드당 비용이 3센트 더 들 겁니다’라고 말했다.”

가격은 레프리노의 최대 경쟁우위다. 피자 생산비용에서 치즈가 무려 40%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는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레프리노는 규모를 확보해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이렇게 얻은 경쟁우위로 다시 규모를 확장했다. 이는 다시 비용 절감을 위한 기술 혁신으로 이어져 대부분 소규모 영세기업이었던 경쟁업체들은 기술적인 면에서 레프리노를 따라갈 수 없었고, 특허 소송에서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식품사업의 외양을 한 바이오테크 기업이라 할 수 있다”고 짐머맨은 말했다.

딱 맞는 설명이다. 1990년대 킬스메이어는 생산 마지막 단계에서 미스트를 치즈에 뿌려줄 때 치즈가 변하는 걸 보고 초기 단계에서 들어가는 첨가제가 치즈 방울이 올라오는 정도나 갈색으로 익는 정도, 치즈 몇 조각이 도우 위에 올라가야 적절한지 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킬스메이어는 치즈 숙성기간을 14일에서 4시간으로 대폭 줄이는 제조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덕분에 회사는 생산능력을 수 배 늘리는 동시에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추는 성과를 이루었다.

두 딸 테리와 지나에 지분 배분 예정

“레스터가 나를 부자로 만들어줬다”고 레프리노는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지분을 하나도 나눠주지 않은 건 의외다. 레프리노가 갑부가 되는 동안, 2012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며 일에 열중했던 킬스메이어는 그저 아주 높은 연봉에 만족해야 했다.

제임스 레프리노는 억만장자의 삶이 안겨주는 화려함을 크게 티 내지 않으며 살았다. 물론, 회사 이름으로 전용기 3대 정도는 있다. 걸프스트림 G450과 봄바디어 제트기, 1980년 통근형 비행기다. 덴버의 부유한 교외지역 인디언 힐스에는 침실 11개를 갖춘 저택이 있고, 애리조나 주 스콧데일에는 740㎡ 면적의 휴가용 별장이 있다. 그러나 레프리노는 수리공을 부르기보다 직접 망치를 들고 나서는 유형이다. 공장에서 지게차를 운전한 경험도 있고, 콜로라도 저택을 건설할 때에는 직접 불도저를 몰고 나무를 밀어 터를 닦기도 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그는 매주 일요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익명으로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한다. 이민가정 2세로 자란 그는 죽을 때까지 은퇴하지 않을 생각이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성공을 이루었다”고 그는 말한다.

레프리노의 경영권 승계 계획은 단순하다. 두 딸 테리(57)와 지나(55)에게 지분을 배분할 계획이다. 두 딸은 수 년 전부터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지만, 일상적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딸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기업을 경영하며 스트레스 받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레프리노는 말했다. 일단 지금은 미국에서 최대한 많은 피자에 레프리노 치즈를 올리는 것이 목표다. 아시아와 유럽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 글란비아 치즈와는 합작사를 세웠다.)

미국 피자 시장에서 5위를 차지하는 즉석 조리용 피자 파파머피스(Papa Murphy’s)도 눈 여겨 보고 있다. 파파머피스 공동창업자 로버트 그레이엄(Robert Graham)은 레프리노가 계약 체결을 위해 3번 이상 사람을 보내 회사의 앞선 기술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도 가정용 오븐에서 구워지는 우리 피자와는 잘 맞지 않았다”고 그레이엄은 말했다. “수분 함량 때문에 치즈 밑으로 보였던 소스가 다 말라 버렸다.” 그래도 레프리노 경영진은 꿋꿋이 영업을 계속 하는 중이다.

묑스테르(Muenster) 치즈를 피자에 함께 넣는 리틀시저스의 경우 레프리노가 아닌 다른 업체를 통해서도 치즈를 조달하지만, 마이크 더킨 레프리노 사장은 리틀시저스 또한 곧 독점계약으로 돌아설 거라 예상했다. “더 많은 걸 원하냐고? 그렇다.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소비자에 직접 판매하는 소매제품 ‘어센트’ 출시

레프리노는 신시장 개척에도 적극적이다. 6억 달러를 투자한 콜로라도 주 그릴리(Greeley) 공장은 냉동피자 브랜드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2.5파운드 덩어리의 ‘리본치즈’를 생산할 수 있는 전문 설비를 갖추고 있다. 최신 트렌드를 이용한 상품 개발을 위해 사내에 ‘혁신 스튜디오’를 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개발한 제품 중 하나가 바로 바치오(Bacio, 이탈리아어로 ‘키스’란 뜻)다. 전통적 방식을 따라 만든 고급 피자(artisanal pizza) 유행에 맞춰 버팔로 우유를 가미한 모짜렐라 치즈다. 바치오는 레프리노 푸드 제품 중 최고가를 자랑하지만, 성장률은 가장 높다.

레프리노는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자에 직접 판매하는 소매제품도 출시했다. 유청 단백질 분말 제품 어센트(Ascent)다. 그릴리 생산시설에는 아예 어센트 전용 생산동이 있다. 일반 치즈 공정의 부산물로 유청 단백질을 생산하긴 하지만, 어센트에 사용되는 유청은 생우유를 바로 여과해서 만들기 때문에 근육 회복을 돕는 주요 단백질과 비타민 성분이 파괴되지 않는다. 레프리노는 현재 66억 달러 규모로 성장 중인 미국 단백질 보조제 시장에서 차별화된 생산공정을 가진 어센트가 우위를 점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어센트 생산팀에 가면 회사의 뿌리를 알려줄 역사적 증표가 많다. 생산팀 바로 아래에는 사업을 시작할 때 사용했던 치즈 공장의 하역 선창 및 창고가 있다. “여기에서 문을 열었던 첫 날을 기억한다”고 어센트 출시를 감독한 마이크 아놀드는 말했다. “짐 레프리노는 이곳으로 걸어 들어오며 ‘옛날 생각 나네’라고 말했다.” 영세업체로 조각 난 단백질 시장 또한 레프리노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다.

[박스기사] 피자 이야기 - 세계 3위 피자 체인 파파존스로 억만장자가 된 존 슈내터 이야기

피자로 억만장자가 되는 길이 모짜렐라 치즈로 한정된 건 아니다. 자기 이름보다 ‘파파 존’으로 더 잘 알려진 존 슈내터 또한 올해 초 억만장자 클럽에 입장했다. 파파존스 창업자이자 CEO인 그는 지난 1년간 회사 주가가 40% 급등하면서 재산 규모를 10억 달러로 불릴 수 있었다. “무일푼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일푼보다 더한 마이너스 상태였다. 그때의 어려움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항상 감사하게 된다”고 회사 지분 26%를 보유한 슈내터는 말했다.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난 슈내터(오른쪽)는 15살이 됐을 때 록키스 서브 펍(Rocky’s Sub Pub)에서 접시닦이로 일을 시작해 피자를 만드는 자리까지 승진했다. 번 돈을 열심히 저축해서 가장 먼저 산 건 1971년형 쉐보레 카마로 Z28이었다. 1983년 대학 졸업 후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믹스 라운지(Mick’s Lounge) 바에서 일했지만, 가게는 얼마 안 가 파산했다. 슈내터는 카마로를 2800달러에 팔아서 그 돈으로 빚 일부를 청산했다. “1년에 5만 달러 버는 게 소원이었다”고 슈내터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 정도면 여자친구를 데리고 쇼핑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차를 팔고 남은 돈으로는 피자 장비를 사서 믹스 라운지의 청소도구함에 설치해 피자를 만들었다.

믹스 라운지는 결국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1985년에는 인디애나 주 제퍼슨빌에서 파파존스 1호 매장을 열었다. 회사가 내세운 슬로건은 “더 좋은 재료, 더 좋은 피자”였고, 이는 즉각 반향을 일으켰다. 6년 만에 100호 점이 문을 열었고, 파파존스는 레프리노 푸드와 독점 치즈 계약을 체결했다. 1993년에는 상장을 했고, 주가는 이후 30배 상승했다. 지금 파파존스는 45개국에 5000여 개 매장을 두고 있다. 그래도 카마로는 잊지 못했던 걸까. 파파존스는 슈내터의 애마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25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었다.

“주변 사람들은 오래 전 폐차장에서 고철이 됐을 거라며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래도 왠지 그 차가 아직 달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슈내터는 말했다. 보상금이 효과를 발휘한 걸까. 2009년 차는 다시 ‘파파’의 품으로 돌아왔다.

- CHLOE SORVINO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images/sph164x220.jpg
201708호 (2017.07.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