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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7)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신자유주의’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보수주의의 아이콘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20세기 최고의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를 단 두 명 꼽아 달라고 요구하면, 많은 이들이 하이에크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고 답할 것이다. 양대 산맥의 최고봉들이다. 하이에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이에크는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 혁명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보수주의의 아이콘’이다.
어쩌면 죽었다가 부활하고 부활했다가 다시 죽는 게 모든 역사적 인물들의 숙명이다. “500~600년마다 한 번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 불을 피워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이집트 신화의 불사조처럼 말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도 불사조다. 하이에크는 로널드 레이건 (1911~2004)과 마거릿 대처(1925~2013)의 신자유주의 혁명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 망각과 열광 사이를 오간 하이에크의 삶에는 어떤 논란이 있었을까?

2010년 3월2일, 미국의 유명 보수 논객이며 TV·라디오 호스트인 글렌 벡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여러분 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정의에 대해 설교한다면 그 교회를 떠나라. 사회정의는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에서 쓰는 용어다.” ‘미 공화당의 사실상의 지도자’라고도 불린 글렌 벡은 왜 그런 ‘황당한’ 주장을 했을까.

놀랍게도 글렌 벡이 한 말의 뿌리는 “사회정의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고 말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였다. 석 달 후인 2010년 6월8일 벡은 한시간 동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Road to Serfdom)』(1944)을 강력하게 홍보했다. 반응이 놀라웠다.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10만 부가 팔리며 아마존 1위 자리를 차지했다. 1944년에 있었던 일의 재연이었다. 언론인 헨리 해즐릿이 1944년 9월24일 뉴욕타임스에 쓴 서평이 돌풍을 몰고왔다. 서평에서 해즐릿은 『노예의 길』을 “우리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 “모든 진지한 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읽어야 할 책”이라고 극찬했다.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당시 800만 부가 팔리던 ‘리더스다이제스트’는 1945년 4월 『노예의 길』의 요약본을 실었다.

『노예의 길』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자유진영의 두 지도자. 레이건-대처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하이에크였다.(왼쪽)
이처럼 하이에크가 미국에서 주기적으로 부상하는 이유는 ‘큰 정부’에 대한 보수 국민·유권자의 두려움 때문이다. 2010년의 하이에크 열풍의 배경에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의료개혁이 있다. 이런 식의 논리가 상당수 사람들을 설득한다. 오바마는 사회주의자다.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큰 정부가 필요한 의료개혁을 하려고 한다. 의료개혁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다.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미국은 망한다.

학자로서 하이에크는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 비판적인 일각에서 보는 하이에크는 ‘이데올로그’다. 경제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이에크가 공부한 오스트리아 빈(Wien, Vienna)은 스웨덴 스톡홀름과 영국 케임브리지와 더불어 당시 세계 경제학의 3대 중심이었다. 하지만 하이에크에게 경제학 학위는 없다. 그는 빈대학에서 법학박사·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실 하이에크 스스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노예의 길』을 “정치적인 책”이라고 했다. 하이에크는 정보경제학, 비교경제체제론, 경기변동이론, 자본이론, 사회과학방법론, 인식론, 과학철학, 인지심리학 등 분야에서 생명력 있는 성과를 남겼다. 1985년까지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 시카고대는 『하이에크 전집』을 발간하고 있다. 총 19권 중에 현재 17권까지 나왔다.

『노예의 길』은 런던정경대(LSE) 교수일 때 썼다. 집필 동기는 나치즘의 부상이었다. 당시 통설과 달리 하이에크에게 나치즘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가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그 논리적 귀결이었다. 또 그때 영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파시즘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반응’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이에크의 시각에서는 나치즘 또한 사회주의의 일종이었다. 당시 자유세계는 전체주의인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반대했다. 하지만 팽배한 분위기는 ‘정부의 계획은 좋은 것, 정부의 개입이 없는 경쟁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만들었다.

경제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인 접근에 사회는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하이에크는 사회민주주의까지 전체주의의 범주에 넣어버렸다. 정부의 계획은 개인주의를 짓눌러 결국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닦는다고 본 것이다. 일단 계획이라는 정부의 개입이 시작되면 끝이 없다. 거짓말이 더 많은 거짓말을 낳듯이···. 경제계획을 세울 정책 결정자들은 필요한 정보가 없다. 정보는 현장의 개개인에게 있다. 일종의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인 시장이 계획 사회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게 하이에크의 확신이다.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 사회적으로는 선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봤다. 하이에크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계획이라는 국가의 행동이 더 나쁜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후 정부들은 공통적으로 완전 고용과 가난 퇴치를 추구했다. 케인스 혁명의 여파로 하이에크는 설 땅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시당하는 존재였다. 1974년 군나르 뮈르달(1898~1987)과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을 무렵에는 거의 잊힌 존재였다. 하이에크는 웬만한 하버드·매사추세츠공과대(MIT) 경제학과 학생들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80년대 초에는 ‘꼴통’들이나 읽는 책을 쓴 ‘극우’ 경제학자였다.

레이건·대처 시대에 화려하게 부활


▎하이에크는 과부가 된 '첫사랑' 헬레네와 1950년에 재혼했다. 1978년 한국을 방문한 하이에크와 그의 아내 헬레네.
하이에크는 레이건·대처 시대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대처는 옥스퍼드대 학부생일 때 이미 『노예의 길』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1975년 대처는 서류가방에서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The Constitution of Liberty)』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우리가 믿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레이건 또한 하이에크를 자신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2, 3명 중 한명으로 꼽았다. 하이에크는 소련·동구권 붕괴에도 기여했다. 『노예의 길』, 『자유헌정론』은 반정부 운동가들의 바이블이었다. 하이에크의 저작들이 지하에서 불법유통된 것이다. 보수주의의 아이콘인 하이에크지만, 그 자신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가 경제학에 입문한 동기는 12개의 언어가 사용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민족주의의 폐해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육군 포병연대 소속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다. 그의 목표는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 여건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1960년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에세이에서 보수주의가 변화하는 인간 현실에 적응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국제주의자인 그는 보수주의에 내재된 민족주의·제국주의 성향에도 반대했다.

하이에크가 모든 종류의 정부 개입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광범위한 사회복지가 필요하다고 봤다. 특히 정부가 노동시간을 제한해야 하며 의무 의료보험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 정부 개입이 경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마지노선이었다. 또한 그는 정부의 경제계획에 대한 반대와 자유방임 도그마를 구분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정부가 할 일은 법과 제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자리 문제는? 하이에크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부가 할 일은 직접 나서서 일자리 창출 계획을 만드는 게 아니다. 정부가 할 일은 일자리가 많이 창출될 환경을 법과 제도의 발전을 통해 조성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행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시장경제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했다. 집단주의(Collectivism)는 결국 실패한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와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됐다. 하이에크는 케인스 경제학과 사회주의 경제학과 싸워 이기는데 10~20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39명의 경제학자들을 조직해 1947년 몽펠르랭회(Mont Pelerin Society) 창립을 주도했다. 자유주의의 본진(本陣)이라고 할 만한 이 모임은 범대서양 네트워크로 발전했고 8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성격은 어땠을까. 신사였다. 열린 대화를 좋아했지만 감정적인 논쟁은 싫어했다. 케인스와도 사이 좋게 지냈다. 케인스는 『노예의 길』이 “위엄 있는 책”이라며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나는 사실상 책 전체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이에크는 애서가·다독가였다. 모든 종류의 책을 읽었다. 사망 당시 그의 서재에는 4000권의 책이 있었다. 겸손한 사람이었다. 1974년 12월10일 노벨상 수상 연회에서 “만약 노벨경제학상을 만들 때 자신의 의견을 물었다면 반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는 그가 누려서는 안 되는 권위를 갖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생각해본 문제에 대해서도 한 말씀하는 게 공적인 의무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일종의 경제학 버전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인 ‘겸손 선서(an oath of humility’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에게 부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연회 스피치는 영국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1842~1924)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말이다. “사회과학자들은 대중에게 인정받는 것을 반드시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들에 대해 좋게 말할 때 악(惡)이 그들과 함께한다.”

조상들은 빈으로 이주한 보헤미아 출신이었다. 학자와 관료를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외할아버지도 학자였고, 의사인 아버지는 빈대학에서 파트타임으로 식물학 강사를 했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하이에크의 이종사촌이었다. 하이에크는 훗날 자신의 철학과 방법이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1926년 베르타 마리아 폰 프리취(1901~1960)와 결혼했다. 원래는 사촌인 헬레네 비터리히(1900~1996)를 좋아했다. 청혼할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헬레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다. 하이에크는 헬레네와 이미지가 비슷한 첫째 부인과 결혼했다. 하이에크는 자식 둘을 낳은 첫번째 부인과 1949년 이혼하고 과부가 된 헬레네와 1950년에 재혼했다.

이종사촌인 비트겐슈타인의 영향 받아


▎하이에크를 유명하게 만든 『노예의 길』과 국내 번역서. 하이에크는 80년대 초에는 ‘꼴통’들이나 읽는 책을 쓴 ‘극우’ 경제학자로 인식됐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다각도의 시도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하이에크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문이 있을 정도다. 사실 하이에크의 종교는 보수층 중에서 종교를 중시하는 그룹에게 중요한 문제다. 하이에크의 집안은 명목상 가톨릭이었다. 하이에크 또한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결혼도 성당에서 했다. 하지만 그는 15살 때부터 불가지론자가 됐다. 한 인터뷰에서 ‘신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신(神)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 못했다. 법을 유지하는 데 신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신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신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말할 수 없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예상한대로 가톨릭 장례절차에 따라 묻혔다.

일각에서는 2007~2008년의 금융붕괴나 양극화 등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린다. 신자유주의의 아이콘인 하이에크 또한 단골 타깃이다. 그가 살아 있다면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를 공격했을 수도 있다. 공격 받은 샌더스는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인 매사추세츠공과대(MIT)대 폴 새뮤얼슨(1915~2009) 교수의 하이에크 평가를 인용할 수 있다. 새뮤얼슨 교수는 이렇게 물었다. “하이에크의 주장에 따르면 스웨덴은 가장 ‘사회주의적’인 나라다. 그가 예상한 ‘호러 캠프’가 스웨덴에 있는가.”

빅데이터·인공지능(AI) 시대에도 하이에크는 불사조로 남을 것인가. 하이에크가 계획에 반대한 주요 근거는 정부의 정보부족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인간도 사회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을 이끄는 모든 지식을 이해할 수 없다.” AI가 개개인의 모든 정보를 알고,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하이에크가 추락하고 케인스가 부상할 것인가.

[박스기사] 하이에크의 말말말

● 우리는, 우리가 한 일들이 대부분 큰 바보짓이었다고 깨닫기 전까지 보다 현명하게 성장할 수 없다.
●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경제학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 사회정의란, 국가가 각양각색의 각기 다른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을 불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과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 자유의 의미는 개인이 기회와 ‘선택이라는 부담’을 향유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자유는 또한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 자유와 책임은 불가분(不可分)이다.
● 정치적 자유 없는 경제적 자유는 있어도 경제적 자유 없는 정치적 자유는 없다.
● 우리가 경제적으로 추구하는 바를 통제 받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통제 받는 것이다.
● 악을 행하려는 사람들보다는, 악을 강압적으로 근절하겠다는 사람들이 보다 많은 해악과 고통의 원인이다.
● 정치에서는 인간쓰레기들이 정상까지 올라간다.
● 성자 같은 외골수 이상주의자와 광신적인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종종 한 발자국에 불과하다.
● 이익 충돌을 둘러싼 전투의 승패는 대중의 투표로 결판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승패는 보통 극소수 서클들의 아이디어 싸움에서 훨씬 전에 결정된다.

하이에크의 인생

1899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빈에서 출생
1917~18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8년: 빈대학 입학
1923년: 빈대학 법학·정치학박사
1931~50년: 런던정경대(LSE)교수
1944년: 『노예의 길』 출간
1950~62년: 시카고대 교수
1960년: 『자유헌정론』 출간
1969~77년: 잘츠부르크대 교수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1991년: 조지 H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대통령 자유의 메달’ 수상
199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별세

김환영 -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708호 (2017.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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