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엔젤 투자자를 대표하는 고영하 회장이 청바지에 청남방을 입고 나타났다. 한눈에도 상당히
메마른 몸이었다. 하지만 S.T듀퐁 셔츠로 갈아입기 위해 벗은 그의 몸은 온통 근육덩어리였다.
온화하게 웃던 그의 인터뷰도 마찬가지. 창업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우리 사회에 벼락같은 호통이었다.
▎사진 : S.T.듀퐁 클래식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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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영(이하 송 ): 의대생이었다고 들었다.
고영하(이하 고 ): 그렇다. 하지만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23살 대학생 때 7년 형을 받고 1년 1개월을 복역했다.
송: 출소 이후 복학했나?
고: 75년 출소 해 80년 3월에 복학했는데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에 연루됐다. 지명수배자로 1년간 도망 다녔다.
송: 현대사의 질곡을 2번이나 경험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창업가의 길로 들어섰나?
고: 75년 감옥에서 출소 후 학교도 못 가고 여권도 안 나오니 앞으로 살 길이 막막했다. 창업밖에 길이 없었다. 청계천에서 베어링 기계를 판매했는데 한때는 직원이 20명이 넘을 만큼 잘됐다. 하지만 지명수배자로 도망 다니다 돌아와보니 회사는 엉망이 됐다. 그래서 빚 갚으려고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송: 그러면 직장생활을 하다 창업을 하신 건가?
고: 81년부터 87년까지 회사만 4곳을 옮겨 다녔다. 그 뒤에 선거에 나갔는데 떨어졌다. 법정 선거비용을 지키며 선거를 치렀는데 한계가 있더라.
송: 그럼 정치를 그만두고 다시 창업한 건가?
고: 90년대 후반에, 99년에 창업했다. 셋톱박스 만드는 회사였다. 이후 돈을 벌어서 iptv를 서비스하는 셀런tv란 회사도 창업했다. 당시 생각으로는 인터넷으로 영화를 서비스하면 비즈니스가 될 것 같더라. 2001년 무렵이다. 기술개발은 문제가 없었는데, 가입자를 끌어 모으기 위해선 마케팅, 콘텐트 수급을 위한 자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맨 처음 KT에 제안했고 이후 KBS, MBC, SBS를 찾아가 제안했다.
송: 반응은 어땠나?
고: 방송사 관계자들이 “아직 이르다”고 하더라. 그러면 콘텐트만 달라고 제안했는데도 거절하더라. 제안이 성사됐다면 지금쯤 넷플릭스와 같은 세계적 기업이 됐을 거다. 이후에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하나로텔레콤과 인수 합병돼 하나로 미디어(하나TV)가 됐다. 당시 내가 하나로미디어 회장직을 맡았다. 매년 100만 명 이상 가입자를 모을 만큼 사업이 순조로웠다. 이후 하나로텔로콤은 2008년에 SK텔레콤으로 1조 500억에 매각됐다. 저도 그때 엑싯해 나왔다. 고벤처포럼을 만든 것도 그 무렵이다. 2007년 9월에 시작했으니 딱 1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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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벤처포럼 만들어 10년간 매달 모임송: 그때부터 매달 한번씩 10년을 모인 건가?
고: 그렇다.
송: 나 역시 4년 전쯤 고벤처포럼에서 두 번 정도 강연을 하면서 “이렇게 창업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 많나?”란 생각을 했다. 괜찮은 친구들이 꽤 많더라. 그런데 왜 지금까지 엑싯에 성공한 사례가 적은지 궁금하다. 어떤 척박한 환경 때문인지.
고: 당시엔 창업 잘못하면 신용불량자 된다. 대부분 대출을 받아서 시작하는데 단번에 성공하는 경우보단 한두 번 실패하니까. 그러니까 대부분 안전한 직업을 바라고 고시를 보거나 대기업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엔 용감한 친구들이 많다. 다만 2007년 당시에는 지금처럼 창업을 돕는 생태계가 조성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고벤처포럼을 만들었다. 그때 제가 하나로미디어 회장을 그만두고 ”앞으로 뭘 하고 살지?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다. ”젊은이들하고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이나 골프는 싫더라. 시대에 뒤떨어지기도 싫었고. 젊은이들이 나와 놀아줄 리 없으니 창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면 되겠다 싶어 7명을 모았다.
송: 당시 회장 나이는?
고: 55세였다.
송: 당시 젊은 창업자들이라면 25세~30세 정도였을 텐데. 나이가 두 배정도 차이 나는 젊은이와 어떻게 소통했나?
고: 경험이나 자금이 없으니 난 멘토링을 했다. 함께 밥 먹고 네트워킹을 도왔다.
송: 결과는 어떤가?
고: 클로(clo)라는 3차원 그래픽 의상 디자인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이 있다. 70~80억 정도 매출을 올리는데 영업이익률도 좋고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펀다라는 핀테크 회사, 그리고 쇼핑몰 마케팅 회사 한 곳도 최근 50억 정도 투자 받아 순항하고 있다.
송: 7명 중 3명은 성공한 셈이니 대단한 확률이다. 보통 1000개 중 2개 정도 성공하는 게 현실인데.
고: 그렇게 조금씩 늘어나 200~250명 정도 된다.
송: 그 사이 엔젤투자협회를 만든 건가?
고: 그렇다. 투자 생태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송: 엔젤투자협회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고: 창업해 성공한 사람들 아니겠나. 비키로 성공한 호창성 더벤처스 대표 같은 인물이 처음 참여했다.
송: 호창성 대표는 최근 소송 때문에 많이 힘든 것 같더라.
고: 좋지 않은 시그널이라고 생각한다. 공교롭게 호 대표와 기소한 검사 둘 다 서울대 출신이더라. 서울대 학생 입장에서만 봐도 창업해서 감옥 간 사람, 감옥에 넣는 사람 둘 중 누가 되고 싶겠나?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강조만 해도 그렇다. 조용히 일자리 늘려도 되는데 너무 강조하다보니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학생들에게 ‘공무원 되라’는 사인을 보내는 셈이다. 창업을 꿈꾸라는 사인을 줘야 하는데.
인성 좋은 창업가가 성공하더라송: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고: 우리 사회는 창업을 해야 미래가 있다. 석유화학, 철강, 조선이 쇠퇴했고 자동차도 미래가 어둡지 않나. 반도체, 스마트폰이 언제까지 우리를 먹여 살릴까. 미래 성장동력을 위해 지금 씨앗을 뿌려야 한다. 결론은 창업이다. 가장 우수한 인재가 창업해야 한다. 미국은 제일 똑똑한 친구들이 창업한다. 스탠포드, MIT 학생들은 ‘내가 왜 남 밑에 들어가 시키는 일 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하나? 새로운 가치,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업가 되겠다’는 기업가 정신이 충만하다. 반면 우리 젊은이들은 ‘안전’을 찾아간다.중국은 창업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북경대, 칭화대 앞에 가면 창업카페가 즐비하다. 서울대 앞엔 고시촌만 즐비한데. 두려움 없이 창업하도록 사회 안전망을 지원해야 한다. 유럽처럼 창업에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은 창업해 본 사람이 취업도 더 잘된다. 구글에선 창업 경험자를 우대한다. 우리 사회는 창업에 실패하면 그냥 신용불량자다.
송: 다시 돌아가서 엑싯한 사람들이 다시 창업을 지원하는 사례가 많지 않은 것 같다.
고: 성공한 사람이 많지 않아서다. 포브스 30대 부자를 보면 중국은 자수성가형이 97%, 미국은 64% 그리고 일본은 73%다. 한국은 23%만이 창업가다. 그래도 창업해서 성공한 권도균, 이택경, 이재웅, 김범수, 호창성 같은 인물들은 투자 생태계를 만들어 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송: 문제는 우리 창업 투자 환경은 창업과 투자 생태계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형성된 미국 실리콘밸리와 다르다는 점이다. 엔젤투자라 할지라도 지속성을 가지기 힘들지 않나?
고: 당연히 깜냥이 안 되는 투자자들도 있지만 자정작용으로 걸러지는 것 같다. 엔젤은 인내자본이다. 참고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IPO하려면 보통 12년 정도 걸린다. 기다려야 엑싯이 가능한 셈이다. 그보다 빨리 엑싯하려면 M&A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사례가 극히 드물다. 미국은 창업한 기업의 70~80%가 M&A로 엑싯한다.
송: 고회장의 투자 수익률은 얼마나 되나?
고: 50곳 정도에 투자했고 2곳은 엑싯했다. 초기엔 투자 실패가 많았다. 그 실패가 경험이 쌓이고 안목이 생기더라. 예전엔 안목 없이 직관만 가지고 투자했다. 다 틀리더라. 기술이나 겉만 보고 투자했다. 지금은 사람을 본다.
송: 사람의 어떤 부분을 보나?
고: 진정성과 인성을 본다. 지금까지는 인성이 나쁜 사람들이 돈을 벌었다. 그러니 갑질이 끊이지 않고 벌을 받는 거 아닌가. 그때문에 물질만능시대가 되어버렸다. 요즘 중고등학생에게 현금 10억 줄 테니 대신 감옥 다녀올지 물어보면 60% 이상이 가겠다고 답한다고 하더라. 이건 기성 세대의 책임이다. 경쟁만 가르쳐서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 협력이란 말을 잘 모른다. 창업은 좋은 인재를 모을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인성이 좋은 사람을 좋아한다. 결국 인성이 좋은 사람이 인재를 끌어 모은다.
송: 고벤처포럼을 통해 인재를 모았고 엔젤투자협회로 투자 생태계를 만들었다. 그 다음은 정부 지원책인 팁스(기술창업 육성 플랫폼)인가?
고: 엔젤투자자들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재원을 늘려주는 게 엔젤매칭펀드다. 팁스는 이와 좀 다르다. 우리나라 R&D예산은 18조원으로 GDP대비 세계 1위다. 하지만 아웃풋이 안 나온다. 사업화에 대한 혜안이 부족한 공무원이나 교수들이 받아가기 때문이다. 팁스는 정부가 지정한 투자자에게 투자를 받으면 7억을 지원한다. 창업가들이 대개 1~2억원 정도로 출발하는데 기술벤처의 경우 양산과정까지 가려면 마지막 고비인 데쓰밸리를 건널 돈이 모자란다. 그럴 때 기술벤처에 한해 데쓰밸리를 건널 돈을 주는 게 팁스다.
송: 팁스의 규모는 어느 정돈가?
고: 최초 30억원으로 출발해 올해는 750억 원, 내년은 900억원 정도 예상한다.
송: 현 정부 기조라면 지원금을 더 늘릴 것 같다.
고: 늘려야 한다. 이스라엘 인구가 800만명인데 1년에 기술벤처 1500개를 키워낸다. 5000만명의 한국은 300개 정도다. 이중에 팁스가 170개 정도 키워낸다. 1조원이면 기술벤처 1500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1000억원짜리 벤처 1만개 만들면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후속투자, 네트워킹, 멘토링을 하는 민간 영역의 엑셀레이터도 필요하다. 공식적으론 케이큐브벤처스, 프라이머, 본엔젤스 등 39곳이 있다.
송: 남들보다 앞선 만큼 인생을 길게 사신 것 같다.
고: 감옥 가면서부터 적응능력이 생겼다. 처음엔 감당하기 쉽지 않았는데 성숙해지더라. 즐겁게 감옥생활 했다.
송: 설마…
고: 내가 아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더라. 일반 죄수들과 칼잠을 자면서 다양한 세상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전혀 못 보던 걸 볼 수 있게 되더라. 두려움도 사라졌다.
제일 좋은 투자는 사람이다송: 셔츠에 새긴 ‘창업은 설득의 과정’은 어떤 의미인가?
고: 창업은 우선 나부터 설득해야 한다. 다음으로 동업자, 투자자, 고객을 순차적으로 설득해 나가야 한다. 설득력은 창업 후 성공에 꼭 필요한 덕목이다.
송: 설득이 아니라 억지로 우기는 사람도 많다.
고: 자기 주장만 하는 사람은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안 된다. 사고가 닫혀있으니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송: 포브스는 자산가들이 본다.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고: 재테크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예금, 부동산, 주식 중 이미 예금과 부동산은 쉽지 않다. 경제가 좋아지긴 힘드니 새로운 투자방식이 필요하다. 제일 좋은 투자는 사람이다. 그게 엔젤투자다. 자산가들이라면 사람에 투자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진행·정리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