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우 일본 마루한 그룹 창업자 겸 대표이사 회장은 일본을 대표하는 부호 중 한 명이다. 한 회장은 재일동포가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을 거부하고 한창우로 활동해왔다.
한창우(韓昌祐, 87) 일본 마루한 그룹 창업자 겸 대표이사 회장은 일본을 대표하는 부호의 한 사람이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지난해 4월 발표한 ‘2017년 일본 50대 부호’ 명단에서 한 회장은 36억 달러의 재산으로 11위를 차지했다. 지난 2월 13일 기준 실시간 재산에선 25억 달러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일본 굴지의 부호다. 2015년 포브스는 한 회장을 42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일본 7위의 부호로 평가했다.한 회장은 독특하게도 재일동포들이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을 거부하고 한창우로 활동해왔다. 그의 자식들도 ‘한’으로 발음되는 성을 쓴다. 2011년 일본에 귀화해 일본 국적의 일본 기업인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한 회장은 국적과 무관하게 자신이 한민족임을 강조한다. 국적과 민족은 별개이며, 국적이 바뀌었다고 뿌리가 변하지는 않는다는 강한 믿음이다. 독특한 것은 귀화 뒤에도 한창우란 이름의 한자와 발음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귀화하면서 내건 조건이었다. 이를 허용하지 않으면 귀화하지 않겠다고 일본 당국을 압박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한자로 쓴 뒤 발음을 병기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한창우’로 알려졌다.한 회장이 창업하고 운영 중인 마루한은 일본 최대 파칭코 운영회사다. 마루한은 지난 10년간 일본 파칭코 문화를 확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칭코는 원래 일본에서 지저분하고 음산한 분위기의 대명사였다. 과거 한국의 성인오락실 분위기다. 일본의 전철역이나 기차역 주변에 빠지지 않고 자리 잡은 파칭코는 일본의 대표적인 성인놀이터다. 일본인의 스트레스 배출구이자 사회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심리적인 해방구로 자리 잡아왔다. 하지만 2000만 명 가까운 이용자 가운데 30% 정도가 중독증상이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오랫동안 사회의 그늘로 치부돼왔다. 경찰과 행정관청이 철저하게 규제하는 사업 분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퇴행의 거인’, ‘음지의 오락실’이었다.
마루한…일본 최대 파칭코 운영회사
▎일본 최대의 파칭코 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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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루한은 카페처럼 깔끔한 분위기에 바깥에서도 보이도록 만들어 밝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업계의 분위기를 송두리째 바꾸는 혁신의 경영 아이디어를 적용해 업계를 이끄는 선구자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젊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연인을 위한 커플 전용 좌석은 물론 젊은 부부를 위해 어린이를 맡아주는 시설까지 갖춘 점포를 늘리고 있다. 스웨덴의 세계적인 유통업체 이케아까지 벤치마킹했다. 땅값이 싸고 주변 환경이 쾌적한 교외에 수많은 주차장을 갖춘 넓은 점포들을 연이어 문을 연 것이다. 자동차를 몰고 고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용객들이 매장에서 밴 담배 냄새를 지울 수 있도록 샤워시설까지 설치하는 점포가 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파칭코를 음침한 곳에서 자기파멸적으로 몰입하는 중독성 행위가 아니라 신나게 즐기는 엔터테인먼트와 하나로 바꿔놓았다. 경쟁 업체들도 생존을 위해 마루한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마루한이 일본의 파칭코 문화를 뒤따르지 않고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놓으며 선도한 셈이다. 마루한의 브랜드 메시지인 ‘인생에 기쁨을(人生にヨロコビを)’과 ‘우리는 즐거움이 필요해(We need たのしい!!)’에 딱 들어맞는 변신이다.마루한은 현재 일본 전역에 걸쳐 310개 이상의 점포를 운영하면서 1만2505명을 고용하는 메머드 기업이다. 도쿠시마(徳島), 시나네(島根), 오키나와(沖縄) 등 3개 현을 제외하고 모든 도도부현에 점포를 내고 있다. 2017년 3월 결산 기준 연매출 1조6788억 엔, 순이익 199억 3100억 엔, 순자산 2616억 엔, 총자산 4994억 8400억 엔을 기록한 우량기업이다.1957년 5월 교토에서 찻집을 낸 것이 한 회장의 첫 공식 창업이다. 사실은 그전부터 파칭코 기기를 운영했으며 찻집 안에 파칭코 기기를 두고 영업을 함께했다. 1967년 볼링장으로 사업을 확대했으며 1972년 니시하라(西原)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마루한의 전신이다. 1988년 사명을 주식회사 마루한 코퍼레이션으로 변경했다. 마루한은 둥글다는 의미의 ‘마루(丸)’에 자신의 성인 ‘한’을 합쳐 만들었다. 마루라는 단어 자체가 볼링공이나 파칭코공, 지구, 원만함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다. 한 회장 자신의 사업과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묻어난다.1999년 사명을 ‘주식회사 마루한’으로 바꿨으며 2001년 100호점을 개업했다. 2005년 파칭코 업계 최초로 1조 엔 매출을 달성했으며 2006년 200호점의 문을 열었다. 2009년에는 2조 엔의 매출을 올려 당시 업계 2위로 9706억 엔의 매출을 올린 다이남의 2배를 넘는 실적을 보였다.마루한은 자본금 100억 엔의 비상장회사다. 창업주인 한 회장과 가족들이 전체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가족기업이다. 한 회장은 과거 상장을 목표로 도쿄증시 당국과 협의한 적이 있다. 파칭코 사업의 사회적인 공인과 사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동시에 노린 도전의 한 수였다. 하지만 증시 당국은 “(일본에선) 파칭코볼을 생산하는 제조업체가 자스닥(JASDAQ)에 상장한 예는 있지만 파칭코 영업을 하는 서비스업체는 완전히 합법화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측면이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투자자들을 보호하고 보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상장 신청을 기각했다. 재일동포들이 많이 활동하는 파칭코 산업에 대한 일본 사회의 경계심이 드러난 셈이다.마루한은 볼링장과 골프 연습장, 영화관 등도 함께 운영하면서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레저 산업에 머물지 않고 다양하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해왔다. 식품 서비스와 청소용역에도 뛰어들었으며 광고, 건축에도 진출했다. 보험에 이어 금융에도 뛰어들었다. 2008년 캄보디아에서 상업은행인 사타파나 은행(Sathapana Bank Plc)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에선 처음으로 일본 기업이 출자해 개업한 상업은행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식으로 모험적인 사업이나 지역 진출을 꺼리는 일본의 보수적인 경영 생리상 캄보디아 상업은행 투자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다. 이는 마루한을 운영하는 한 회장이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경영 형태를 잘 보여준다. 남과 달랐기에 생존과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자본금 2500억 달러 중 마루한이 85%를 부담하고 나머지 15%를 캄보디아 국내자본으로 조달했다. 현재 캄보디아에서 시장점유율 2위의 상업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까지는 한 회장이 마루한을 창업하고 키워온 과거와 현재이다.
파칭코 업계 최초 1조 엔 매출 달성지금까지 이룬 것만 해도 상당한데 한 회장은 여전히 목이 마르다. 한 회장은 나이에 상관없이 지금도 미래의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다. 20억 달러를 투입해 한국의 인천 영종도의 준설토 투기장 부지를 세계적인 해양 관광레저 명소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영종대교 주변의 준설토 투기장 약 316만㎡ 부지에 해양생태공원 등 해양레저시설, 골프장과 스포츠 파크를 비롯한 스포츠 시설과 세계한상비즈니스센터와 호텔 등 글로벌 비즈니스 지구, 인천공항 및 인천항과 연계한 복합물류단지, 교육연구 시설, 수변공원 등을 조성하는 거대 사업이다.준설토 투기장은 인천항 수심 유지를 위해 바다에서 퍼낸 준설토를 부어놓으면서 생긴 대규모 부지다. 정부는 2007년 ‘인천항 준설토 투기장 항만재개발 사업’ 지구로 고시해 민간 투자자를 모집해왔다. 한 회장은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세계한인상공인연합회 소속 해외동포 기업인이 국내에 대규모 해양리조트를 설립하기 위해 만든 ㈜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의 공동대표를 맡아 이 사업을 이끌어왔다. 한 회장은 이 사업으로 영종도에 재외동포 상공인과 모국간 교류 협력을 위한 공간 개발 목적의 ‘종합 비즈니스 레저타운’을 설립한다는 구상이다.한 회장은 2012년 9월 사업제안서를 제출했으며 2014년 실시협약 체결, 2016년 5월 사업계획 일부 변경과 실시계획 승인신청 제출에 이어 2017년 12월 사업승인을 받았다. 2018년 중 착공해 2021년 준공 예정이다.그는 숱한 역경을 딛고 일어선 오뚜기 같은 아시아의 기업인이다. 그는 밀항자이자 경제난민 출신이다. 1931년 경남 사천군 삼천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한 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7년 10월 16세의 나이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로 밀항했다. 가난을 이기려면 새로운 세계로 나가야 했다.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형이 부르자 핏줄 하나만 믿고 바다를 건넜다. 당시 일본은 전 후 혼란기였기 때문에 특별영주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16세 소년은 그때부터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했다. 생존하려면 굳건한 자립정신을 갖출 수밖에 없었다.그 뒤 호세이(法政)대 경제학부로 진학해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극심한 영양실조로 폐결핵까지 앓아 여려 차례 병원에 드나들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숱하게 오갔다. 대학 졸업 뒤에도 취업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1952년 교토(京都)에 20대의 기기를 놓고 파칭코 사업을 하던 매형의 집에서 기거하게 됐다. 한 회장과 파칭코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그는 귀국하는 매형으로부터 파칭코 기기를 인수해 직접 운영했다. 1957년 파칭코 운영으로 번 돈을 밑천으로 찻집을 열었으며 1967년에는 일본에서 볼링이 대유행을 하자 볼링장 사업도 시작했다. 사업 다각화로 파칭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심리도 작용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속한 사업 확장은 화를 불렀다. 1972년 60억 엔의 빚을 안게 된 것이다. ‘불운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뜻의 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말은 당시 한 회장에게도 적용됐다. 그런 와중에 1976년 16세이던 장남 한철(韓哲)이 미국 연수 중 요세미티 공원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지는 비운까지 맞았다. 한때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 회장은 굳센 결심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빚을 갚기 위해 다른 사업은 축소하고 본업인 파칭코업에 몰두했다. 10년에 걸친 필사적인 노력 끝에 한 회장은 끝내 빚을 다 갚을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집중화와 전문화 경영의 교훈을 얻은 것이다.먹구름이 사라지면 빛이 비치게 마련이다. 한 회장은 1980년 신형 파칭코 기계인 ‘피버’가 인기를 끌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는 ‘폭력단체원 출입금지’ 표식을 점포에 거는 등 이들의 파칭코 개입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1995년 여세를 몰아 도쿄 시장에 진출했다. 도쿄 한복판인 히비야(渋谷)구에 마루한 파칭코 타워의 문을 열었다. 2007년에는 창업 50년을 맞아 본점을 도쿄도로 옮겼다. 2004년 슬롯머신 전문점인 마루한슬롯1호점을 고베(神戶)에 개설하면서 관련 분야 사업 확대에 들어갔다. 2007년에는 카지노 사업의 문도 두들겼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사업을 더 확대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한 회장의 일생에 휴식이나 중단은 아직 없었다.
집중화·전문화 경영으로 성공 스토리한 회장은 사회공헌도 열심이다. 한 회장이 운영하는 마루한은 수익금의 1%를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에 사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1990년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16세에 세상을 떠난 아들 한철(韓哲)을 기려 2005년 ‘재단법인 한철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예술, 스포츠, 복지 등 다양한 분야의 개인과 단체에 기금을 지원하는 사업을 펴고 있다. 재일한국인 역사학사 이진희 씨를 도와 한일관계와 한반도를 연구하는 학자를 지원했다.한 회장은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기업인이다. 2013년에는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 악화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일본의 정치가들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해서 모른 척하고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독일처럼 주변국에게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그 배경에는 그의 투명한 경영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한 회장은 일본의 높은 세금에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하는 성실 납세자로 이름 높다. “일본 사람보다 2배로 노력하고 회계는 한 점도 숨김없이 정직하게 해야 하고 세금은 모두 다 납부해야 차별을 극복하고 인정받는다”라는 말을 달고 산다. 기업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 직원에게 회사의 경영 현황을 공개하고 숙지하게 해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28살 때 일본인 부인과 결혼해 5남2녀를 얻었으며 장남 한유(韓裕) 마루한 대표이사를 포함한 4자녀가 마루한에서 일한다. 한국의 경제난민으로 일본으로 밀항해 거대한 사업을 일군 한 회장은 자신의 사업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그가 걸어온 경영의 길은 아시아 경영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 채인택은…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