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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 푹 빠진 최태원 회장 

동남아 공략으로 더 큰 SK 그린다 

조득진 기자 chodj21@joongang.co.kr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말레이시아행이 잦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과 함께 남방 개척의 틀에 엮겠다는 전략이다. 2012년 공을 들이기 시작했지만 6년 동안 답보상태. 이번엔 현지 합작과 공유경제를 앞세웠다.

▎지난해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제2회 사회성과인센티브 어워드‛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3월 초에 지인들과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3월 1일 삼일절부터 시작되는 징검다리 휴일을 맞아 사흘 일정으로 남해안 여행을 떠나기로 했었다. 그러나 보름 정도를 앞두고 여행이 취소됐다. 최 회장의 지인은 “최 회장이 3월 초 말레이시아에서 귀한 손님이 오게 됐다며 양해를 구해 왔다. 최근 말레이시아 시장 개척에 공을 들이고 있어 우리 모두 사정을 이해하고 다음을 기약했다”고 전했다.

2012년 이후 답보상태, 이번엔 푸나

최태원 회장이 말레이시아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현지를 찾아 투자전문가 그룹과 만나 동남아 시장 환경과 전망, 성장 가능성을 논의한 데 이어 올해 2월엔 아예 쿠알라룸푸르에서 SK 경영진을 불러 모아 글로벌 전략회의를 진행했다. SK 경영진은 말레이시아 경제 부문 최고자문기구인 국가블루오션전략회의(NBOS)에도 참석해 현지 정부가 추진하는 블루오션 전략에 관한 설명을 듣고 SK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최 회장의 3월 초 개인 일정도 이 연장선에서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는 “최태원 회장이 글로벌 파트너링 모델을 중국에서 동남아 지역으로 확대하고 있다”며 “그룹 총매출에서 수출 비중이 50%를 넘어선 SK가 미국·중국의 수입규제 대체시장으로 동남아에 주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2월 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현지에서 열린 글로벌 전략회의에는 최 회장과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유정준 SK E&S 사장 등 SK그룹 주요 기업의 경영진이 참석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베트남 등 동남아 신흥국에서 중장기 성장 방안을 집중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남아 신흥국들은 석유·천연가스 등 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해외 투자 유치로 정보통신기술(ICT)과 연계한 4차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SK는 이 같은 흐름 속에서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등의 사업 기회가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회의에서 최 회장은 “동남아 신흥국들이 국가 주도 발전 전략을 발판으로 매년 5%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동남아 신흥국 정부와 글로벌 협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구 6억3000만 명의 아세안 신흥국에서 큰 소비 시장은 인구 2억6000만 명의 인도네시아와 9600만 명의 베트남이다. 이에 비하면 인구 3100만 명의 말레이시아는 작은 시장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사실 말레이시아만으로 단독 시장을 형성하기는 부족하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을 연결하는 지형학적 의미가 크다”며 “전략회의에서 동남아 지역본부(RHO)를 말레이시아에 설립하는 논의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RHO는 SK그룹 본사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인 자원과 역량으로 사업을 전담한다.

SK의 말레이시아 진출 노력은 2012년 강하게 추진된 바 있다. 최 회장이 나지브 라자크 총리를 접견하고 에너지, 정보통신 분야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시장 진출 속도는 시원치 않았다. 2015년 4월 선보인 온라인 쇼핑몰 ‘11street’가 대표적이다. SK플래닛이 말레이시아 이동통신사 셀콤 악시아타와 51 대 49 비율로 300억원을 출자해 세운 합작법인 셀콤플래닛이 사업을 진행하는데 2015년 258억원, 2016년 417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초기 투자비 부담 탓”이라는 게 SK 측의 설명이지만 2016년 400억원가량을 투입하고도 지난해 역시 적자를 면치 못했다. 셀콤플래닛은 최근 중국 알리바바·JD닷컴 등의 투자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지역 현안 해결로 ‘현지화’ 본격 도전

6년 만에 본격 도전하는 최 회장은 이번 현지 글로벌 전략회의에서 지역본부, 합작회사 설립을 주요 안건으로 올렸다. 중국에 진출할 때와 같은 ‘글로벌 파트너링’ 방식으로 동남아 사업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파트너링이란 SK그룹 계열사가 해외 대표기업과 파트너십을 구축한 뒤 자원과 기술, 마케팅 등에서 동반성장하도록 하는 SK그룹의 글로벌 협력모델이다. 중국 베이징에 세운 ‘SK차이나’처럼 SK그룹 본사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 자원과 역량으로 동남아에서 사업을 전담하게 된다.

우선 말레이시아 국영정유회사 페트로나스와 합작회사를 설립할 가능성이 크다. 유정준 SK E&S 대표가 최근 페트로나스 경영진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석유 가스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페트로나스는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 사이에 위치한 라피드(RAPID) 지역에 270억 달러(약 30조원) 규모의 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유 대표는 전략회의 후 “페트로나스와 신재생, 석유화학 분야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나눴다. 우리 계열사 중 한 곳이 이미 라피드 석유화학단지에 들어갈 잠재적 조인트 벤처에 관한 얘기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SK의 글로벌 파트너링은 중국에서 큰 효과를 증명했다. SK이노베이션의 화학부문 자회사 SK종합화학은 2014년 중국 최대 석유기업인 시노펙과 손잡고 35대 65의 비율로 모두 3조3000억원을 투자해 합작회사 SK중한석화를 세웠다. 최 회장은 “SK그룹이 중국에서 성장하기 위해서 중국 회사처럼 사회에 녹아들어야 한다”며 합작회사 설립을 독려했다. SK중한석화는 가동을 시작하자마자 흑자를 냈고 최근 4년 동안 매출 1조 3000억원을 올리며 SK이노베이션의 현금 창출원으로 자리했다. 가장 성공한 한국과 중국기업의 협력사례로 꼽힌다.

최 회장이 강조하는 ‘공유경제’도 현지화 전략의 하나다. 카셰어링 업체 쏘카에 투자하고 있는 SK는 쏘카와 함께 2016년 5월 말레이시아에 합작법인을 만들고 미래 모빌리티 시장에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지역 현안을 풀어 현지화에 나서겠다는 최 회장의 철학은 지난해 11월 말레이시아 방문 당시 잘 나타났다. 최 회장은 ‘동남아의 우버’로 불리는 그랩(Grab)의 앤서니 탄 대표와 회동하고 모빌리티(이동수단) 서비스와 공유경제 서비스의 미래 전망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는 강연에서 “그랩 창업자를 만나 무슨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냐고 물으니 동남아 지역 사람들의 가장 큰 사회적 고통이 뭔지를 생각했다는 답이 돌아왔다”며 “그랩의 사회적 가치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의 가장 큰 사회문제로 꼽히는 대중교통 문제를 해결하면서 현지 시장에 녹아들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최 회장은 SK 신년회에서 “혁신을 위해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함께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미 무역장벽’ 수출 동남아서 돌파


SK는 지난해 그룹 총매출(139조원) 대비 수출(75조4000억원) 비중이 54.2%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내수에서 수출기업으로 완전히 전환한 것이다. 하지만 미·중을 위시한 ‘수입규제 공세’라는 큰 파도에 직면했다. 재계 관계자는 “반덤핑, 세이프가드, 무역확장법 232조 등 트럼프발 관세 폭탄과 사드 경제 보복 등 미국과 중국에서 우리 수출품에 대한 규제가 거세다”며 “이 때문에 수출 대기업들이 일제히 동남아로 방향을 꺾고 있다”고 말했다. SK 역시 ‘미·중 대체시장’으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시장에 주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SK그룹의 편중된 수익구조도 동남아 시장 진출로 해소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SK그룹은 지난해 영업이익 20조원을 달성했지만 SK하이닉스, SK이노베이션 등 일부 계열사에 편중됐다. 올해도 반도체와 석유·화학 업종 주력 계열사들의 실적 호조에 힘입어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 시장이 SK텔레콤 등 타 계열사의 새로운 시장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 조득진 기자 chodj21@joongang.co.kr

201804호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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