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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럭셔리 산업의 리더들(8) 권기찬 웨어펀 인터내셔널 회장 

“명품다운 DNA 지녀야만 진정한 명품” 

오승일 기자
웨어펀 인터내셔널 권기찬 회장은 한국 명품 산업의 토대를 마련한 선구자다. “명품 비즈니스는 단순히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지닌 가치와 문화를 함께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를 만나 한국 럭셔리 시장의 발전 방향을 모색해봤다.

▎사진 전문 갤러리 옐로우코너에서 포즈를 취한 권기찬 회장.
한국 명품 업계의 대부, 럭셔리 비즈니스의 산증인, 명품 시장의 개척자, 한국 패션 산업의 숨은 조력자…. 권기찬 웨어펀 인터내셔널 회장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화려한 수식어가 증명하듯 권 회장은 지난 30년간 국내 명품 시장을 선도해온 퍼브트무버다. 1986년 명품 수입·유통사 웨어펀 인터내셔널을 설립한 권 회장은 독일 명품 브랜드 아이그너를 시작으로 겐조·베르사체·소니아 리키엘·지안프랑코 페레·콜롬보·아이스버그·체루티 등 해외 유수의 패션 브랜드 30여 개를 국내에 소개하며 한국 명품 비즈니스의 기초를 닦았다.

지난 3월 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권 회장은 “명품이란 고상하고 존귀한 것”이라며 “대중이 설레는 마음으로 동경하며 매혹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만 명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명품은 역시 명품다운 DNA를 갖고 있어야 해요. 오랜 세월 축적된 전통과 역사성이 그것이죠. 뛰어난 기술, 장인정신, 양질의 재료, 남과 차별화되고 눈길을 끌 수 있는 독창적인 디자인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수식하는 스토리가 녹아 있어야 해요. 거기에 예술성까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완전한 명품의 조건을 갖추게 되는 거죠.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정체성도 명품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빼놓을 수 없겠네요.”

1980년대 초, 30대 중반이던 권 회장은 한 대형 건설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는 패션 사업 진출을 꾀하고 있었고, 그에게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만한 해외 브랜드를 찾아보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권 회장은 1년에 30회 가까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미국 등지로 출장을 다녔고, 이때부터 해외 명품에 조금씩 눈뜨게 됐다. 당시 해외에는 자신의 의상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서구인들에게 옷은 단순한 패션을 넘어 하나의 문화였다. 미션을 위해 해외를 오가던 권 회장은 월급을 모아 발렌티노, 지방시, 랑방 같은 명품 옷을 사 입으며 그들의 문화를 익혔다. 이후 회사에서 추진하던 패션 프로젝트는 불발에 그쳤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 정부가 1980년대 중반부터 해외 고가품의 수입 자유화 조치를 시행한 것이다.

권 회장은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 명품 패션 브랜드 아이그너와 첫 번째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다. 소위 ‘보따리상’들이 밀수로 들여온 외국 브랜드 제품이 국내에 조금씩 유통되던 시기였다. 권 회장은 아이그너에 이어 겐조, 소니아 리키엘, 베르사체 같은 유명 브랜드를 줄줄이 들여왔다. “그때 제 나이가 서른다섯 살이었어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한국에서도 중산층이 돈을 모아 명품을 사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죠.”

남다른 혜안 지닌 명품 산업 1세대


▎2007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오페라 갤러리에서 열린 오프닝 행사 장면.
사업 초기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권 회장이 들여온 브랜드들은 국내 유명 백화점과 면세점에 진출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창업 5년 만에 매출은 20억원을 넘어섰고 2000년 200억원, 2006년 500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권 회장은 한·불 경제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2006년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기 사장을 받았다. 2013년에는 웨어펀 인터내셔널의 자회사인 오페라 갤러리 코리아와 더블유 앤 펀(W&Fun) 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면서 이탈리아의 미술과 공연을 소개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 기사장을 수여했다. 2008년 무역의 날에는 대통령 표창도 수상했다. 그가 들여온 브랜드들이 국내 패션 비즈니스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덕분이었다. 권 회장은 “해외 유명 브랜드를 들여온 것은 단순히 돈벌이만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 높은 문화를 전파한 것”이라며 “이를 시작으로 우리 명품 시장에는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30년 전 처음으로 해외 브랜드를 국내 시장에 소개할 때만 해도 명품다운 애티튜드를 갖춘 브랜드들이 대접받는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최근에는 폭넓은 인지도와 함께 큰 성과를 보여주는 신생 브랜드도 명품의 반열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신생 브랜드라도 글로벌 마케팅을 활발히 하고 세계 각국의 명품 거리에 입점해서 명성을 얻으면 역사성이나 명품 DNA가 없어도 명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인데요. 오랜 세월 명품의 가치와 함께 문화까지 경험한 저로서는 사실 안타까운 마음이에요. 이런 신생 브랜드들이 명품으로 불리는 것은 전통적인 명품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 같거든요.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역사와 전통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브랜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끌로에나 톰 브라운, 스텔라 매카트니나 몽클레어 같은 브랜드들이 좋은 사례죠. 천재성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와 마케터들이 자본의 힘을 이용해 새로운 명품을 탄생시키고 있는 이런 사례들을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프라다나 돌체 앤 가바나도 제가 처음 명품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는 시장에 존재하지 않았던 브랜드들이에요.”

패션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를 무렵이던 1990년대 초반, 권 회장의 눈앞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바로 서구 상류층이 즐기던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이었다. 유럽의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친분을 쌓게 되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권 회장을 오페라 극장이나 갤러리로 안내했다. 냉혹한 패션 비즈니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그에게 유럽의 선진 예술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스트레스가 말끔히 해소되는 걸 느꼈다. 그때부터 권 회장은 문화 경영을 구상했다. 그는 “모두가 오로지 성공만 바라보며 뛸 때였지만 예술을 즐길 줄 알아야 진정한 일류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며 “남다른 창의성이나 앞서가는 시민의식도 모두 수준 높은 문화적 소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변에서 ‘옷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누구보다 옷을 좋아해 시작한 일인데도 창업한 지 3년 정도 지나고 나니 ‘내가 왜 이 일을 할까?’라는 고민이 생기더군요. 제가 들여온 옷을 입고 즐거워하는 고객들을 보면서 사업하는 기쁨을 느끼던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선진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었어요. 오페라 갤러리를 만들어 해외 유명 그림을 소개하고,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만들어 공연 사업을 시작한 이유도 문화와 예술이 우리 사회를 정서적으로 윤택하고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어요.”

예술 경영으로 선진 문화 정착에 이바지


지난 2014년 사진 전문 갤러리 옐로우코너를 설립해 문화·예술 비즈니스를 이어가고 있는 권 회장은 앞으로 한국 명품 시장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국가 경제가 현저하게 후퇴하지 않는 한 명품 산업의 성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커펠트는 ‘지갑이 허락하는 것만 원하는 삶처럼 따분한 삶이 또 있을까요?’라며 대중의 욕망을 자극했어요. 우리나라에서 명품은 희소성이나 고상함, 역사성 같은 가치보다 남들이 인정하는 것을 명품으로 대접하려는 경향이 강하죠. 소비자나 사용자가 명품을 결정하지 않고 유통업체가 결정하는 것도 우리만의 특징이에요. 경제성장률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팽창해온 것도 우리 명품 산업만의 차별점인데 2010년 7~8조원 규모였던 시장이 최근 14조원으로 커진 것이 좋은 증거죠. 전 세계 명품 시장에서 4~5위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시장은 앞으로도 더욱 커질 거예요. 물론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 패턴이 바뀌고 있고, 소득을 통한 소비의 재분배가 이뤄지면서 언제까지 성장이 지속될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20년 전 이탈리아 남성들은 소득의 60% 이상을 의류 구매에 지출했지만 지금은 15% 이하로 떨어졌다고 해요. 우리나라도 명품 구매보다 외식에 지출을 더 늘리고 여행이나 취미 활동에 더 많은 돈을 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여기에 너도나도 명품에 열광하는 트렌드도 점차 사라지는 추세여서 정체성이 확실하고 두드러진 가치를 유지하는 브랜드들과 달리 어중간한 브랜드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봅니다.”

- 오승일 기자 osi71@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201804호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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