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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꽃보다 아름답다 | 매출 1000대 기업 여성 CEO 21명 분석] ‘유리천장’ 깨지는 소리 제약·유통업에서 들린다 

 

조득진 기자

포브스코리아는 2017년 기준 매출액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CEO를 파악했다. 남성 위주의 척박한 경제 생태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출신과 성장, 비전을 분석해 한국 경제계에서 여성 경영인의 역할을 짚어보기 위해서다. 1000대 기업 중 여성 CEO가 있는 기업은 모두 23개로 2.3%에 불과하다. 임일순, 조선혜 CEO가 두 개 회사 대표를 겸하고 있어 사람 수는 21명으로 더 떨어진다. 일부 기업은 공동대표 체제를 갖추고 있어 실제 여성 CEO 비율은 2%가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매출액으로 보면 임일순 홈플러스·홈플러스 스토어즈 대표가 단연 선두다. 그가 대표로 있는 홈플러스스토어즈와 홈플러스가 각각 7조9456억원, 6조 6629억원 매출을 기록하면서 15조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2위는 6조5505억원을 기록한 정수정 이랜드월드 대표, 3위는 4조6784억원의 네이버 한성숙 대표다. 매출 1~3위가 모두 전문경영인이다.

4위는 면세사업 호황으로 4조114억원을 올린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다. 5위는 지오영에서 1조4082억원, 지오영네트웍스에서 7299억원을 달성한 조선혜 회장이다. 조선혜 회장은 자수성가 여성 CEO 중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했다. 지역 계열사까지 합치면 올해 매출은 3조6000억원이 예상된다. 6위는 이지선 신성이엔지 대표(9905억원), 7위는 김선희 매일유업 대표(8811억원)로 모두 오너가 CEO다. 8위 민혜정 이랜드파크 대표(6824억원)와 9위 장인아 스마일게이트엔터테인먼트 대표(5713억원)는 전문경영인, 10위 권지혜 아이에스건설 대표(5288억원)는 오너가 출신이다.

6년 전과 비교하면 여성 CEO의 숫자도 늘고 출신도 다양해졌다. 2011년 매출액 기준 국내 1000대 기업 중 여성 CEO는 8명(9개 기업)에 불과했다. 지오영과 지오영네트웍스의 조선혜 회장, 호텔신라의 이부진 대표, 푸르덴셜생명보험의 손병옥 대표, 이랜드월드의 박성경 부회장, 울트라건설의 강현정 대표, 경북광유의 박윤경 회장, 성주디앤디의 김성주 회장, 보령제약의 김은선 회장이다. 이들 중 자수성가 여성 CEO는 2명, 전문경영인이 1명이었고 나머지 5명은 오너 일가였다.

자수성가·전문경영인 여성 CEO 늘어


올해 조사된 여성 CEO 21명을 보면 자수성가 CEO 4명, 오너가 CEO 10명, 전문경영인 CEO 7명이다. 오너 일가 여성 CEO의 비중이 줄고, 자수성가·전문경영인 CEO가 크게 늘었다. 자수성가 여성 CEO를 보면 의약품 유통에서 조선혜 지오영 회장, 정영숙 비아다빈치 대표 등 두 명이 배출되어 눈에 띈다. 최승옥 기보스 틸 회장은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철강업계 대표 CEO고, 식품 수입·유통업을 하는 윤영미 하이랜드푸드 대표도 업계에선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오너가 CEO를 보면 업력이 긴 기업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삼성가의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 매일유업의 김선희 대표, 보령제약의 김은선 회장, 신라철강의 유지연 대표는 오랜 시간 축적해온 자신의 실력을 선보이면서 전문경영인 못지않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성 CEO 21명의 비즈니스 영역을 분석해보면 제약 제조·유통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혜 지오영 회장과 정영숙 비아다빈치 대표가 의약품 유통업으로 자수성가했고, 보령제약의 김은선 회장은 1986년 입사 후 30년 넘게 가업을 잇고 있다.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의 배경은 대표는 5년 넘게 한국법인 대표를 맡고 있으며, 최근 한독에 합류한 브랜드 전문가 조정열 대표는 토털헬스케어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제약업계는 ‘유리천장’이 가장 빨리 깨지고 있는 분야다. ‘신약 개발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여성 CEO 배출’이라던 국내 제약업계는 최근 ‘소유-경영’ 분리 원칙 속에 비오너 일가 전문경영인이 많아지는 추세다. 국내 제약사 전문경영인 여성 CEO 계보는 유희원 부광약품 대표부터 시작했다. JW그룹에서도 2017년 함은정 JW 바이오사이언스 대표가 등장했고, 지난 9월 초 한독이 브랜드 전문가 조정열 대표를 선임했다. 다국적 제약사에는 여성 CEO가 많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에 따르면 회원사 40곳 가운데 여성 CEO가 이끌고 있는 기업이 9곳이고, 이 중 6명이 한국인이다. 업계 관계자는 “오너경영체제로 남성 CEO를 선호하는 국내 제약사와 달리 국내 지사를 운영하는 다국적 제약사에서는 나이, 성별, 직급에 상관없이 기회와 보상이 이뤄지는 편”이라고 말했다.

유통업계에서도 전문경영인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15년 적자에 허덕이던 홈플러스에 합류한 임일순 대표는 재무부문장(CFO), 경영지원부문장(COO)을 맡아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이랜드월드의 정수정 대표도 그룹의 사업 지주회사이자 핵심 기업을 지난해 초부터 이끌고 있다. 여성친화기업을 표방하는 이랜드에선 민혜정 대표가 이랜드파크를 책임지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주요 소비주체가 여성이고 관련 상품 매출이 증가하다 보니 최근 유통업계에서는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여성 임원을 대거 발탁하고 있다”며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여성이 일하기 편한 근무환경 만들기에도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유통업계 최초로 여성 CEO를 배출한 홈플러스는 부문장급 임원 중 여성 비율이 38%, 특히 전무급 이상은 50%가 여성이다. 이랜드그룹 역시 핵심 계열사 이랜드월드(패션), 이랜드파크(호텔·레저), 이랜드리테일(유통) 등 세 곳 가운데 두 곳을 여성 CEO가 맡고 있다.

건설업계에서는 오너가 여성 CEO들이 속속 전면에 나서고 있다. 권지혜 아이에스건설 대표, 주정희 정동종합토건 대표, 김은정 스카이리빙 대표, 박소영 김해센텀 2차피에프브이 박소영 대표, 임희라 코아셋디앤씨 대표 등이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공사 입찰 후 일감을 부친이나 남자 형제가 경영하는 그룹 주력사에 넘기는 이른바 ‘페이퍼컴퍼니’ 구실만 하고 있다. 순위에 든 모 기업의 경우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보면 3500억원 매출을 기록하고 있지만 지난해 직원 임금으로 나간 비용은 7000만원에 불과했다. 1년 통신비 지출도 채 10만원이 되지 않는다.

‘페이퍼컴퍼니’거나 미등기이사 오너가


반면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리지 않아 “오너 일가가 기업 경영 전반에서 막대한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책임에서는 자유롭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 정유경 신세계 백화점 부문 총괄사장은 현재 미등기 상태다. 연봉도 공개되지 않고, 의사결정에 따른 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최근 재계 안팎에선 여성의 본성이 기업이 요구하는 경영 리더십 요건에 더 부합하다고 강조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 4차 산업혁명 시대 기업의 경쟁력인 ‘소프트 파워’에 더 가깝다는 진단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이 된 투자은행(IB) 리먼 브라더스가 ‘리먼 시스터스’였다면 위기는 없었을 것이란 유머도 있다. 남성의 무모한 공격적 경영이 결국 위기를 초래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한국에서 여성 기업인의 역할은 능력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여전히 여성이 기업하기에 녹록지 않은 여건 탓이다. 한국여성벤처협회가 지난 7월 여성 CEO 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10명 중 6명(62.3%)이 “남성 CEO에 비해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답했다. 반면 차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10명 중 2명(18.0%)에 불과했다. 부당한 차별을 경험한 분야로는 사업제휴(45.2%)가 가장 많았고 금융권 대출(14.3%), 공공기관 입찰(11.9%), 대기업 수주 및 납품(9.5%) 등이 뒤를 이었다.

여성 CEO들은 가장 큰 애로 사항으로 네트워킹 부족(29.5%)을 꼽았다. 창업뿐만 아니라 사업을 지속해나가는 데 필요한 인적 네트워킹 형성이 여전히 버겁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어 육아 및 가정 병행(26.2%), 여성에 대한 편견 및 차별(23%), 접대문화(19.7%) 등이 뒤를 이었다. 여성 CEO들이 여전히 남성 위주의 성 차별적인 경영환경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성 CEO들은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88.5%)고도 말했다. 정부가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할 정책으로는 연구개발비 우선 지원(32.2%), 공공기관 입찰 시 가산점 부여 및 확대(27.1%), 금융권 대출시 우대금리 적용(22%), 법인세 등 세금 감면(5.1%) 등을 꼽았다.

여성 임원 늘려야 CEO도 나온다


국제여성기업이사협회(CWDI)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은 이사회 여성 임원 비율이 2.4%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20개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여성가족부 자료를 봐도 매출액 기준 국내 500대 기업 전체 임원 가운데 여성 비율은 100명 중 2.7명꼴이다. 10.5명꼴인 공공부문 여성 관리직 비율과 비교해도 열악한 숫자다. 올해 5월 말 기준 코스닥 상장법인 1269개사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여성 CEO는 43명으로 전체의 2.8%에 그쳤다.

이 때문에 기업 내 견고한 유리천장을 없애려면 여성 임원할당제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성임원할당제는 상장기업(또는 일정 규모 이상의 비상장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전체 임원 중 일정 비율 이상의 여성이 포함되도록 의무화한 제도다. 노르웨이가 처음 시행했고 현재는 독일·프랑스·말레이시아·인도 등도 도입했다. 푸르덴셜생명보험 대표 출신의 손병옥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대표는 “현재 여성 임원 숫자가 많은 서유럽도 할당제 도입 이전엔 비율이 한 자릿수였다”며 “기관 투자가들이 여성이 많이 진출해 있는 기업에 투자하고 여성 임원을 많이 늘리도록 기업 의사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 조득진 기자 chodj21@joongang.co.kr

201810호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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