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배우가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는지 그는 통쾌한 한 방을 날렸다. 저예산 영화 [미쓰백]으로 한지민은 그동안 연기자로 쌓아온 필모그래피에 정점을 찍었다. 여우주연상 5관왕을 석권했다. ‘천사’ 이미지였던 이 배우는 불의에 맞서 싸울 줄 아는 멋진 ‘전사’가 돼 넓은 연기 폭을 증명했다. 지금 한지민은 17년 연기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한지민은 “김혜자 배우님과 오드리 헵번을 존경한다”며 “삶과 사랑, 나눔, 실천하는 모습을 닮고 싶다”고 했다. / 사진:BH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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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옆에 있을게. 지켜줄게.”아동학대 실상을 고발한 영화 [미쓰백]에서 백상아(한지민)가 집에서 학대당하던 초등학생 김지은(김시아)에게 하는 이 말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배우 한지민(38)의 ‘변신’이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외모도 거칠었다. 영화에서 담배를 물고 걸쭉한 욕을 뱉고 거친 행동을 하는 모습은 ‘노력’ 아니면 불가능해 보인다.사실 한지민의 연기 변신이 처음은 아니다. 2011년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한객주는 조선 상단을 주름잡던 상인으로 사건의 열쇠를 쥔 인물이었다.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차도녀로 분해 이전과 다른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밀정]에서는 실존 인물 의열단원 연계순을 연기했다. [역린]에선 정조(현빈)의 젊은 할머니 정성왕후로 분했다. 여기선 심지어 ‘악역’이었다.그럼에도 평소 한지민에 붙는 수식어는 ‘동공미인’, ‘아름다운 요정’, ‘여신’, ‘천사’, ‘착한 배우’ 등이다. 드라마 [올인]에서 겨우 한 살 차이 났던 송혜교의 중학교 시절 아역으로 데뷔해 줄곧 ‘보호해주고 싶은’ 청초하고 가녀린 이미지를 굳혀왔다. 한지민은 포브스코리아 인터뷰에서 “배우라면 누구나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을 것”이라며 “작품을 선택하고 연기할 때 이미지나 수식어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미쓰백]은 마치 변신을 위해 내공을 쌓던 한지민의 잠재력이 터진 결과물과도 같다. 아동학대라는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며 원숙함을 보여준 한지민에게 호평이 쏟아졌다. 청룡영화상, 런던 동아시아영화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영화제작가협회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등을 휩쓸며 한국의 ‘대배우’ 반열에 올랐다. 최근 발표된 백상예술대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포브스코리아 파워 셀럽으로 선정된 그가 배우 부문 1위를 차지한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이돌 그룹이 쟁쟁히 버티는 파워 셀럽 10위권 안으로 진입해 영향력을 입증했다. “미약하게라도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제도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어요.” [미쓰백]에서 배역에 대한 몰입도가 유독 컸다. “백상아라는 캐릭터는 감정적으로 바닥까지 치닫고 부딪히는 장면이 많아 어려웠어요. 영화가 끝난 지금도 백상아를 떠올리면 아픈 감정과 마음이 먼저 떠올라요.”‘올해의 영화’로 꼽힌 [미쓰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배우 김혜자와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41년 차이가 나는 ‘젊은 혜자’로 분했다. 그는 “실제 제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배우는 김혜자 배우님과 오드리 헵번”이라며 “배우로서 그들의 삶과 사랑, 나눔, 실천을 닮고 싶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꾸준히 브랜드 평판이 높았던 배우여서인지 그를 향한 환호는 더 뜨겁다. 작품 안팎에서 ‘선한 영향력’의 상징이 된 이미지가 현실과 맞닿아 있어 더 시너지를 낸다.한지민은 작품활동과 선행이 직결되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2007년 [경성스캔들]에서 독립투사 조마자 역할로 분했는데 촬영 중 위안부 할머니 복지시설인 나눔의 집에 2000만원을 기부했다. 추모공원인 ‘기억의 터’ 홍보대사도 맡았다. 최근엔 위안부 할머니들의 관부재판을 다룬 [허스토리]에 특별출연을 하기도 했다. [미쓰백] 작품을 마친 후엔 보건복지부 아동학대 예방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선행이 앞서는 배우소외 장르에도 관심을 가졌다. 2011년 EBS [지식채널 e]에서는 봉사 내용을 다룬 프로그램 제작에도 참여했다. 장애인과 고령자를 위해 화면 해설과 한글 자막을 넣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로 만든 일본 영화 [엔딩노트] 작업에도 참여했다. 2017년엔 저시력 장애인을 위한 VR 시각보조 앱을 알리는 단편영화 [두 개의 빛:릴루미노]에 출연했다. 또 노희경 작가와 필리핀 오지마을 알라원에서 함께한 봉사활동을 담은 책 『우리 벌써 친구가 됐어요』인 세 전액과 출판사 수익 일부를 기부했다.‘기부 천사’로 알려진 그에게 봉사활동을 하는 동기는 딱히 없다. 실천이 몸에 밴 듯했다. 한지민은 “주변에 진정 어린 시선으로 공감하며 사회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라는 모법적인 답을 내놨다.이런 행보는 학부 전공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여대에서 사회사업학(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는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고등학생 때 고아원 봉사를 갔다가 “어차피 오늘 오고 안 올 거잖아요”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아동학과 진학을 꿈꿨다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사회사업학과를 택했다.한지민은 사회문제에 워낙 관심이 많다. 평소 뉴스를 자주 본다. 그는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배우가 작품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다 비슷한 것 같다”며 “어떤 살인 사건에 대한 뉴스를 보면 ‘저 사람들도 태어났을 땐 순수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앞선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과정에 또 다른 슬픈 이슈가 있더라”고 덧붙였다.영화나 드라마에서 ‘한지민다운’ 배역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그의 평소 가치관에서 비롯됐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고 있어도 지속적으로 생각하긴 어렵잖아요. 그래서 대중매체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촬영할 때 캐릭터와 저의 공통점을 좀 더 극대화하려고 해요. 감정을 더 이입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조금씩은 저와 닮은 캐릭터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30대 후반에도 ‘스마일 페이스(웃는 얼굴)’인 그는 평소에 잘 웃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인상은 제가 살아온 인생을 담는 그릇인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을 많이 하려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려 노력해요.”문득 떠오르는 ‘사랑하는 사람’은 한지민의 조카들이다. 그는 연예계 대표 ‘조카 바보’로 알려져 있다.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첫째 조카 이름을 딴 ‘roma.emo’(로마 이모)고 프로필은 ‘Roma&Roha’s Aunt’(로마&로하 이모)라고 쓰여 있다. 팬들은 한지민 SNS를 ‘조카스타그램’이라 부른다.5월 한지민은 정통 멜로로 돌아온다. 상대는 배우 정해인이다. MBC 수목드라마 [봄밤]에서 지역도서관 사서 이정인으로 분했다. 한지민은 “이정인은 소신이 뚜렷하고 강단 있는 인물이다. 30대 여성이 한 번쯤 고민하는 사랑과 결혼을 생각하게 하는 캐릭터”라며 “[내 머릿속의 지우개], [가을동화]를 참 좋아하는데 이번 드라마로 시청자들이 설레는 순간들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