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린이 만난 경영 구루 아홉 번째 주인공은 홍성한 비씨월드제약 대표다. 매출액 14% 이상을 약품 연구개발(R&D)에 투자하는 한국 제약사다. 비율로는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 게다가 홍 대표는 적자가 태반인 한국 바이오 업계에서 수년간 흑자를 지켜내고 있다.
▎홍성한 비씨월드제약 대표는 한국 제약·바이오 업체도 글로벌 제약사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충분히 가능하다”며 “생각보다 관련 업계를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많기에 연구개발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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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약·바이오 업계가 사면초가다. 미래형 자동차, 시스템 반도체와 더불어 정부의 3대 중점 육성 산업으로 선정될 정도로 바이오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최근 잇단 임상시험 실패로 기술력에 의문이 생기며 투자자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실제 8월 16일 기준으로 연초보다 코스피 의약품·제약지수는 30% 가까이 빠졌다.국회는 부랴부랴 첨단 바이오 의약품의 허가 및 심사 규제 완화에 나섰다.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첨단바이오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른바 ‘조건부 허가제’다. 암 등 중증질환이나 희귀난치질환 치료제는 두 번의 임상시험만으로 시판이 허용된다. 하지만 제약사를 보유한 박혜린 옴니시스템 회장은 “국내 바이오 제약사들은 해외 임상시험이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가 ‘신약의 효용과 안전성이 기준에 못 미쳤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며 “바이오의약품 분야가 미래 먹거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대박의 꿈’보단 글로벌 제약사의 기술력과 투자 규모를 따라가겠다는 의지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지난 8월 13일 박 회장은 이를 몸소 실천하는 인물로 홍성한(62) 비씨월드제약 대표를 소개했다. 코스닥 늦깎이 데뷔생인 비씨월드제약은 증권가에서 꽤 유명하다. 2014년 11월 공모 당시 국내외 총 460개 기관이 참여해 경쟁률 357:1을 기록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상장 이후 16분기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갔고, 연구개발 투자(매출액 대비) 비율은 두 자릿수를 이어왔다. 적자 상태에서 ‘가능성’만으로 주가를 지탱하는 바이오제약 기업이 흔한 현실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이다.*약물전달시스템(DDS) 특화 원천기술을 확보한 비씨월드제약은 정부가 인증한 ‘혁신형 제약기업’(총 47개사, 2018년 12월 기준) 목록에 8년 연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콧대 높은 독일 AET사와 정신분열증 치료제 공급, 라이선싱아웃(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했고, 미국 에이콘(AKORN)사와는 전립선암 치료제 공급계약을 맺었다. 이 외에도 마취통증약, 순환계용약, 항생제, 기타처방의약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약물전달시스템(DDS): 약물의 생체 내 흡수를 조절하거나 원하는 조직으로 약물을 전달하는 제제기술을 말한다. 이를 통해 약물의 효과는 극대화하면서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환자의 복용 편의성을 높인다. 이 같은 효과 때문에 DDS는 개량신약을 만드는 핵심 요소가 된다. DDS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시장 규모는 전 세계 제약 시장의 3분의 1가량인 수백조원 규모로 추정된다.수많은 치료약을 생산하는 비씨월드제약. 물론 홍 대표는 약 이름이나 성과를 나열하진 않았다. 박 회장은 비씨월드제약의 꾸준한 성장세의 비결을 묻는 것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시장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 꾸준한 성장세가 돋보입니다. 비결이 있나요?말씀대로 시장 환경이 참 어렵습니다. (스마트폰을 건네며) 바둑을 좀 두십니까? 8세기 중엽 당나라 현종 때 바둑의 명수인 왕적신(王積薪)이 펴낸 『위기십결(圍棋十訣)』입니다. 이 중에서 ‘승리에 집착하면 이기지 못한다’는 부득탐승(不得貪勝),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라’는 공피고아(攻彼顧我)와 ‘신중하고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는 신물경속(愼勿輕速)을 복기하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바둑 얘기를 꺼냈습니다만, 제약업계가 ‘신약 개발’이란 중압감을 이겨내며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경영 일선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위기십결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쪽박인데, 설사 쪽박이어도 연구개발(R&D)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글로벌 제약사들을 따라잡을 순 없으니 완전 신약보다 개량신약에, 순수 개발보단 생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장단기 먹거리 전략이 균형이 이뤄온 덕분이죠. 신념도 중요하지만, 기업으로서 돈을 버는 일도 주주에 대한 중요한 의무입니다.
저도 위기십결을 두고두고 봐야겠습니다. 바둑 얘길 하시니, 드라마 [미생]이 생각납니다. 완생은 아니지만, 죽지도 않은 돌. 비씨월드제약은 어느 쪽인가요?당연히 우린 ‘미생’입니다.(웃음) 완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바이오·제약은 미래 먹거리가 될 겁니다. 당연히 그 과정은 험난합니다. 당장 기술 성과가 나지 않았다고 해서 사기꾼으로 몰리는 현실에선 완생에 준하는 바이오·제약 기업이 나오기 어렵죠. 업계에 만연한 편견도 문제지만, ‘꿈’ 같은 성과를 위해 적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업인도 문제입니다. 한국에만 제약사 500여 개, 글로벌 시장에선 다국적 제약사 40여 개가 경쟁 중입니다. 한국은 연구개발 능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어서 제네릭(복제) 의약품 개발에 집중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국내 제약사들이 수익을 내면서 신약과 개량신약 개발에 투자를 늘려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업계 현실을 얘기하셨는데, 최근 위기라는 바이오제약 업계를 어떻게 보시나요?제약사는 태생적으로 선택과 집중이 절실한 곳입니다. 그렇지 않은 업종이 없겠습니다만, 작게 시작하는 업체일수록 신약 개발은 요원한 일이지요. 단순히 자본 문제가 아닙니다. 제약사를 운영해서 잘 아시겠지만, 연구개발에 착수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시간, 그 성과가 업계 지배자에게 인정받는 일, 그리고 이 과정을 버틸 비즈니스 모델 등 모든 게 어우러져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시장이 이 업계를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옥석(玉石)을 가리는 성장통을 겪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공감합니다. 업계 고참으로서 무엇이 절실하다고 생각하세요?업계를 향한 정부의 지원과 사회의 믿음이죠. 시장조사업체 전망에 따르면 더 먼 미래를 내다볼 것도 없습니다. 2021년만 되도 글로벌 제약시장은 1조5000억 달러 규모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 정부가 본격적인 지원에 나선다면 지원자금을 무한정 쪼개기보다는 될성싶은 기업을 잘 선별해 스케일업(규모 확장) 방식으로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자금이 없어 기술개발을 중단하는 일이 없어야 하니까요. 단기적인 시각으론 ‘블록버스터급 국산 신약’은 절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고 밀고 나가는 뚝심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 업계에서 자리 잡고, 이런 확신을 갖는 데 30년은 족히 걸린 것 같습니다.
약학과를 졸업하시고 오너에 이르기까지, 30년 넘게 달려오셨네요. 그런데 다들 약국부터 개업하지 않나요?
▎사진:김영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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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가 그랬죠. 전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ROTC 육군 보병장교로 최전방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한 경험 덕분입니다. 약제 장교로만 근무했다면 지금 약사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최전방에서는 다들 실탄을 소지하고 근무하기에 ‘신뢰’를 쌓는데 노력했습니다. 위기관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성이 이때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업인으로서 홀로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을 맞닥뜨릴 때 당시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제대 후엔 동화약품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죠.
윤광열 회장님이 이끄셨던 국내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말씀이시죠?네, 그렇습니다. 전역할 무렵 동화약품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인사하러 간 게 인연이 됐습니다. 그날 바로 회장님 면접까지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윤 회장님이 앞으로 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시길래 “동화약품 사장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젊은 패기를 좋게 보셨는지 바로 채용됐습니다.(웃음) 당시 독립운동도 하셨던 윤 회장님은 정도·예방 경영을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저도 이분의 경영철학을 이어 윤리경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기업인’을 꿈꾸셨네요.제 생각은 명확했습니다. 학부 때도 친구들과 조직관리를 연구하는 공부 모임을 꾸려 경영인을 동경하는 마음을 품었고, 최전방 소대장 시절 쌓은 조직관리 능력도 한몫했습니다. 동화약품에서는 경영전략을 배웠고, 해외 연수 기회를 통해 글로벌 의약품 시장을 이해했습니다. 당시에는 국내 제약사가 상품성 있는 해외 의약품을 찾아 수입하는 ‘라이선스 개발’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제약사로 살아남기 위해선 결국 연구개발을 해서 독자적인 기술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그 후로 직접 경영에 나서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습니다.
꿈을 이루셨네요. 2006년 극동제약을 인수하셨어요.네, 그랬죠.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1999년 아주약품으로 자리를 옮겨 부사장으로 일한 2006년까지 마음속에 뭔가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40대 초반이었는데도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MBA를 떠날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뒀죠. 근데 수년 전에 극동제약 해외 계약 건을 그냥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인연 덕분인지 회사를 맡아달라고 연락이 온 게 인연이 됐네요.
월급쟁이에서 오너로, 극적인 변화네요.극적이긴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자금 문제가 제일 컸죠. 그나마 변두리에 산 건물 하나를 담보로 잡고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간 번 재산을 다 건 겁니다. 사업 초기에는 대출 상환 전화에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인수 첫해 회사 상황을 보니 적자만 70억원에 달했는데, 직원들과 합심한 덕분인지 이듬해 흑자로 전환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약사 경영이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평소 품었던 ‘연구개발 중심의 신약 개발사’라는 꿈도 하나씩 실현에 옮겼습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내부에 문제가 있었나요?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우리가 어떻게 신약을 개발하냐’는 패배주의가 팽배했습니다. 직원뿐만 아니라 업계도 신약 연구개발에 돈을 쓰겠다고 하면 회의적으로 바라봤습니다. 상품성이 좋은 해외 의약품을 꿰차고 있었기에 쉽게 돈 벌 기회도 있었죠. 하지만 연구개발은 진정한 제약사로 거듭나기 위해 집중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문제였습니다. 그러다 2008년 베트남에 첫 수출을 시작으로 2011년 100만 달러, 다음에 300만 달러를 돌파하면서 직원들이 변하기 시작했죠. 연구개발 목표가 아무리 숭고해도 기업이 돈을 못 벌면 조직원의 공감대조차 끌어낼 수 없잖습니까.
돈도 벌면서 연구개발에도 매달리셨어요. DDS 원천기술로 업계에서 유명합니다.
▎지난해 비씨월드제약은 파마리서치 프로젝트와 손잡고 제2판교 테크노밸리에 신사옥을 짓기로 했다. 홍성환 대표는 2021년 6월에 입주 예정인 이곳을 제약바이오 연구 네트워크 중심 단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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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이었습니다. 비씨월드제약으로 사명을 바꾸고 DDS 기술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체내에서 약효가 장기간 유지되도록 돕는 기술인데요. 매일 특정 주사를 맞는 환자가 최소 수주에서 최대 수개월간 한 번만 맞아도 됩니다. 사업 초기부터 연구개발에 매달린 덕분에 10년간 원천기술 4개를 보유한 회사가 됐죠. 어려운 기술이었지만, 해외시장에서 수요가 확실하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밀어붙였습니다.
비씨월드제약 공장도 업계에서 알아주죠.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국내 제약사가 기술을 수출하면 글로벌 제약사가 의약품 개발과 생산을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약품을 공동 개발하고 직접 생산하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독일 AET, 미국 에이콘 측이 무척 황당해했죠. 현지 제조기준에 맞는 공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유럽연합의 EU-GMP(유럽 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 미국의 CGMP(우수 화장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를 통과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다행히 여주에 500억원을 들여 신설한 공장이 글로벌 제약사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공장에서는 연간 5000억~1조원 규모의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죠. 회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해외 기업과 계약하는 과정이 무척 험난하잖아요.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죠. 수많은 국내 바이오 벤처도 이런 과정을 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오지랖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혁신형제약 기업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비씨월드제약이 정부가 지정하는 혁신형 제약기업에 선정되면서 감투를 쓰게 됐습니다. 적극적으로 지원하려는 정부에 업계 현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면 도움이 될까 싶었습니다. 비씨월드제약도 아주 작은 회사로 출발했는데 지금은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원천기술 보유 회사가 됐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하면 10년 후 한국에서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은 나올 수 없습니다.박혜린 옴니시스템 회장은 인터뷰를 마치며 앞으로 10년을 버틸 힘이 뭔지 물었다. 홍성한 비씨월드제약 대표는 돈과 기술보다 사람의 힘을 강조했다.“동화약품부터 이어진 인연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익힌 경험과 만난 사람들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었고, 항상 의리를 중시하며 살았습니다. 직원들도 상하관계보다 의리에 기반한 동료로 여기죠. 인터뷰 덕분에 주마간산 수준으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사람의 힘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지금도 300여 명에 달하는 직원의 이름과 역할을 모두 외우고 있습니다. 직원 생일엔 직접 축하전화를 합니다. 어버이날에도 직원 부모님께 감사편지와 선물을 하는 걸 잊지 않죠. 구성원과 상호존중에서 비롯된 신뢰가 앞으로 10년을 버틸 힘이라고 자신합니다.”
- 정리=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 박혜린은… 신용카드·전자화폐시스템 업체 바이오스마트, 스마트전력계량플랫폼 기업 옴니시스템, 라미화장품 등 10개 회사의 매출 총합은 3000억원을 넘었다. 2018년 5월 출판사 시공사를 인수했다. ‘영업이익의 10%를 무조건 기술개발에 투자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