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제조벨트 아래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제조업의 시대는 끝났다. 관리와 복종을 넘어 창조와 자율이 기업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떠오른 지 이미 오래다. 일찍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 천 재 1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론을 편 바 있다. 조직원 개개인과 조직 전체의 변화를 주도하기 위한 인재, 즉 리더의 무게를 간파한 말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대변혁 앞에 선 한국은 지금 어떤 리더십을 필요로 하나? 스티브 잡스, 제프 베조스, 이나모리 가즈오 같은 천재적 경영가를 한국에서 찾기 힘든 건 도대체 왜일까? 과거가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리더는 어떻게 조직을 혁신해야 할까?손욱의 대화 다섯 번째 순서로 김재우 전 대한코치협회 회장을 만났다. 김 전 회장은 삼성물산 런던지사장, 삼성중공업 부사장 등을 거쳐 벽산그룹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일했다. 특히 IMF 외환위기로 워크아웃에 들어갔던 벽산그룹을 부회장 취임 1년 만에 회생시켜 실의에 빠져 있던 나라 전체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신화를 쓰기도 했다. 20여 년 가깝게 유력 기업 CEO들의 멘토로 활약한 김 전 회장은 “미래를 어떻게 읽고 그릴 것인가는 오롯이 리더십의 문제”라며 한국 사회 리더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손욱: 기업을 떠나 2010년 한국코치협회 회장에 취임하셨고, 지난 3월 퇴임하셨습니다. 그간 근황이 궁금합니다.
김재우: 말하자면 올해 은퇴한 셈이지요. 협회를 떠나고 직함을 뒤로 미루니 오히려 여기저기서 코칭을 원하는 분이 더 많아졌습니다. 코칭은 질문을 통해 대안을 생각하게 하는 작업을 말해요. 질문을 던져 숙고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길을 찾도록 돕는 역할이죠. 코치가 정답을 주지는 않아요. 상담자가 숙고하고 행동하게 돕는 역할이죠. 행동하는 것과 멈춰 있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니까요.
손욱: 내면을 발굴해 스스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머릿속에 뭔가를 주입해야만 했던 우리의 교육이 결국 철학의 부재, 빈곤한 상상력, 다양성의 실종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CEO 코칭 말고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코칭이 제대로 이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재우: 말씀대로입니다. 한국 사회는 세계가 놀랄 만한 발전을 이뤄냈어요. 하지만 국가 전체가 아닌 개인으로 눈을 돌리면 제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의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손욱: 입시와 취업, 생존이 걸려 있는 경쟁속에선 내 믿음과 신념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자기 것을 다 잃어버리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자기 안에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춘 인재를 갈수록 찾기 어려워요.
김재우: 대한민국은 철학과는 너무 거리가 먼 나라가 돼버렸어요.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된 부작용이라 봅니다. 우리는 철저히 패스트팔로어(fast follower) 모델로 경제 성장을 이뤘어요. ‘어떻게 저 사람을 따라가느냐’는 ‘하우(how)’가 절실했던 거죠. 손 회장님께서도 그 시절 공학도의 길을 걸으셨으니 잘 아시리라 봅니다. 하지만 카피캣은 무언가 독창적인 문화를 만드는 역량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저 획일화될 뿐이죠. 코칭을 하다 보면 유명한 대학 교수마저도 자기표현을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도 모르죠. 창조라는 건 각자가 지닌 다양성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우린 획일적이어야 안정감을 느끼고, 나와 다르면 이상하다 치부해요.
손욱: 20세기가 하우(how)와 왓(what)의 시대였다는 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걸 통해서 한국이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도 사실이고요. 21세기 창조의 시대에는 ‘와이(why)’, 즉 수많은 질문을 통해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크게 부족해요.
김재우: 한 대기업 임원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전자의 영업담당 부장”이라 하더군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답한 거죠. 우리 사회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적·철학적 접근을 해본 경험이 태부족해요. 서구는 자유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200년간 서서히 경험했습니다. 그 이전 100년간은 개인의 자유를 쟁취하는 시간도 가졌죠. 종교개혁을 통해 개인이 신과 직거래에 나선 거예요. 이전까지는 사제를 통한 간접거래였죠. 귀족과 사제의 시대가 근대적 개인의 시대로 서서히 나아간 겁니다. 개인의 시대가 오자 신 앞에 누구나 평등해졌어요. 우리는 개인이 중심이 되는 시대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자유민주주의의 참뜻을 잘 몰라요.
리더란 미래를 읽는 사람
▎김재우 회장은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를 강조하며,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적 자세가 리더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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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 회장님 말씀처럼 개인의 창의, 수평적 조직문화가 창의력의 원천인 시대가 됐습니다. 기술과 지식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랐죠. 시대에 맞는 리더의 필요성이 그만큼 더 절실해졌습니다.
김재우: 리더는 어떤 세상이 오는지를 통찰하고 읽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대개 잘될 때 안주하려는 습관이 있어요. 노키아 CEO가 고뇌에 찬 얼굴로 “누가 망할 줄 알았나? 우린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죠. 노키아나 코닥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전설적 기업이었어요. 한때 코닥의 글로벌 점유율은 80%에 달했죠. 이런 강자들이 왜 역사 뒤로 사라졌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지금 하는 것도 좋은데 다른 걸 왜 하느냐’ 결국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거예요. 삶은 방향과 속도와 시간으로 구성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따라오는지 보지 못하고, 세상의 변곡점이 무언인지도 알아채지 못하면 그저 ‘지금도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어요. 시대를 읽는 눈, 변화를 파악하는 눈이 리더에게 꼭 필요합니다.
손욱: 정·재계를 비롯해 사회를 이끄는 리더들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경우가 태반입니다. 변화를 읽기는커녕, 제대로 된 질문조차 못 하는 리더가 많습니다.
김재우: 기업에는 그 기업만의 문화가 있습니다. CEO라는 리더는 기업문화를 정립하고 만들어가는 역할이죠. 직원들에게 “도대체 지금 뭐하고 있느냐”며 핀잔을 주는 CEO는 경영자로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에요. 제 스스로 만들어놓은 기업문화를 따라오는 직원이 못마땅하다는 건 제 스스로를 못마땅해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CEO는 조직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분명히 밝히고, 구성원이 이를 확신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체가 달려갈 수 있죠.
손욱: 말씀 중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다른 걸 틀렸다고 말하는 획일적 문화를 넘어서야 할 텐데요.
김재우: 한국 기업에서는 전문경영인의 역할 자체가 평가절하될 때가 많아요. 실무를 맡은 CEO가 아니라 뒷자리에 숨어 앉은 회장이라는 사람이 모든 사업 방향을 좌지우지하죠. 코스피 상장사 CEO의 평균 재임 기간이 얼마일까요? 2년 7개월에 불과합니다. 상황이 이런데 장기 전략이란 게 제대로 나올까요? 한국 기업의 거버넌스가 이전보다 투명해졌지만, 아직도 기업문화 면에서 부족하고 혼란스런 점이 많아요.
손욱: 리더가 기업문화를 확립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으니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떠오릅니다. 2010년 망해가던 일본항공(JAL)에 소방수로 투입돼 1년 만에 흑자전환의 기적을 썼죠. 사업 정상화 후 기자회견에서 이나모리 회장은 일본이 나아가야 할 리더십을 이야기했어요. 첫째, 비전, 즉 목표와 방향을 올바로 세워라. 둘째, 이를 조직원과 공유하고 공감해라. 셋째, 조직원들과 한마음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 마지막으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 역량을 키워라입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비용을 절감하고 감원에 나서는 대신 ‘직원 모두가 행복한 회사’라는 다소 엉뚱한 비전을 제시했어요. 그 결과가 1년 만의 흑자전환이었습니다. 경영전략이 아닌 경영철학이라는 리더십을 보여준 거죠.
김재우: 이나모리 회장은 질문을 던진 겁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한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임직원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거예요. 아쉽게도 우리 기업문화에는 질문이란 게 없어요. CEO가 “질문 있느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습니다. 회의 시간에 “틀린 질문인지 모르겠는데요” 하는 경우도 있어요. 세상에 틀린 질문이란 건 없어요.
손욱: 2017년 다보스포럼 화두가 ‘소통과 책임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바로 전 해인 2016년엔 ‘4차 산업혁명’이 주제였죠. 4차 산업혁명을 이루려면 그에 맞는 리더십이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창의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책임은 결국 리더에게 있습니다.
김재우: 상명하복 문화도 반드시 넘어서야 할 숙제입니다. 개인의 시대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운 서구와 달리 우리는 조선시대에서 식민지로, 다시 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어요. 집단주의 발전전략을 통해 여기까지 온 거죠.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려면 상명하복이 아닌 자율이 보장돼야 합니다. 자율적인 조직이 아니면 질문이 나올 수 없어요. 또 하나, 인간은 아무리 자유로워도 변화에 머뭇거리는 존재입니다. 이때 지지와 공감, 격려가 꼭 필요해요. 그간 우리는 너무 각개약진하며 앞만 보고 달렸어요. 함께라는 의미를 모릅니다. 코칭도 진정한 공감이 있을 때 효과가 큽니다. 같이 울고 웃는 거죠. 초경쟁 사회에선 모두가 잠재적 경쟁자일 뿐이에요. 하지만 ‘나와 다르다’는 다양성을 수용해야 합니다. 요즘 ‘꼰대’라는 말이 유행인데, 40~50대 중에도 꼰대가 많아요. 스타일이 구식인 사람이 꼰대가 아니라 나만 옳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꼰대예요.
공감의 리더십이 다양성 키운다
▎손욱 회장은 “창조의 시대는 개인이 행복한 사회”라며 우리 사회 변곡점을 이끌 리더의 역할을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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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 결국 창조의 시대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행복해지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곧 리더의 책임이죠. 우리 사회가 커다란 변화의 전환점에 서 있는데,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한 상황이에요. 600년 전 세종의 목표도 백성이 행복한 나라였습니다. 세종은 생생지락(生生之樂), 즉 생업의 즐거움을 느끼는 삶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지시하고 야단치는 임금이 아니라 행복해지려면 뭘 해야 하는지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는 리더였어요. 열린 소통문화를 이미 600년 전에 실현한 겁니다. ‘15세기에 노벨상이 있었다면 47%가 조선 몫’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죠. 리더가 제대로 깨닫기만 하면 다시 한번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김재우: 전제왕권 시대임에도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한 세종의 사례가 인상 깊습니다. 세종이 민본을 내세우며 관료들과 격의 없는 토론에 나선 건 그만큼 다양성을 인정하는 리더였다는 증거예요. ‘나를 따르라’며 일사불란을 중시하는 사회에선 창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종 대에 조선을 넘어 세계가 놀랄 만한 과학기술을 꽃피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의 리더들은 팔로십(followship)만이 리더십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지시한 대로 따르라”는 건 CEO가 아니라 공장장 수준이죠. CEO들의 이임사를 보세요. “대과 없이 소임을 마치고 간다”며 뿌듯해하는데, 그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어진 틀을 깨고 미래를 향해 큰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리더입니다.
손욱: 우리 기업이 갈수록 글로벌화되고 있지만, 한국형 리더십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만의 특수성을 감안한 리더십이 가능할까요.
김재우: 글로벌이라는 말은 곧 국경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기업의 경영이 국내에 국한된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사실 한국형 리더십이란 실체는 없다고 봅니다. 글로벌 1등이 누구냐를 따지는 시대에 한국형 리더십을 논하는 것 자체가 실효가 없는 거죠. 다행인 건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이에요. 1980년부터 길게는 2000년까지 태어난 세대를 말합니다. 이들이 바로 미래를 이끌어갈 어른으로 성장하겠죠. 이미 선진국에선 40대 최고지도자들이 활약하고 있어요. 캐나다 트뤼도 총리,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대표적이죠. 급박히 변화하는 시대에 60대와 40대 중 누가 더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미국 FAANG(Facebook·Amazon·Apple·Netflix·Google) 기업들을 보세요. 1990년대 창업해 이제 업력 20년 남짓한 기업들이 세상을 제패하고 있어요. 우리의 40대 리더십은 어떤가요? 이들의 잠재력을 품을 수 있는 사회문화적 인프라가 갖춰져 있나요? 마크롱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프랑스의 국가 잠재력을 증명하는 겁니다.
손욱: 오스트리아는 1986년생 제바스티안 쿠르츠가 31살에 총리에 오르더니 연임에도 성공했어요. 우리도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반에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혁신기업들이 젊은 리더십 아래 탄생했죠. 비슷한 시기 미국에선 구글과 페이스북이 등장했고, 중국에선 알리바바와 텐센트, 바이두가 떠올랐어요. 미국, 중국 기업들이 거대한 글로벌 기업으로 커가는 동안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요. 미국에선 1970년대 창업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에 이어 20년 뒤 또 다른 혁신기업이 탄생한 겁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1950년대 창업한 삼성과 현대를 뛰어넘은 기업이 아직 없어요. 글로벌 감각을 지난 밀레니얼 세대들이 창의를 바탕으로 맘껏 뛰놀 수 있는 사회문화적 제도의 틀을 세워야만 합니다. 혁신의 단절이 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 공론의 장을 열어 사회적 대전환을 일으켜야 할 시점이에요.
※ 손욱 전 회장은… 40여 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정통 ‘삼성맨’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경영자(CTO)로서 평생을 혁신에 전념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최측근에서 보좌했고, 삼성그룹의 프로세스 혁신과 정보시스템 구축도 그의 작품이다. 삼성인재개발원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이후 농심에서 현역 생활을 마친 손 전 회장은 현재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감사나눔운동 전파 등 사회문화 운동으로 또 다른 혁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