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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6) 

낙타 발길 따라 넓어진 이슬람 제국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추운 지역에 살다가 더운 지역으로 이동한 쌍봉낙타는 표면적을 줄여야 할 필요가 생겨 단봉낙타로 진화했다. 아라비아사막의 단봉낙타는 ‘대정복 운동’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며 이슬람 제국 형성의 원동력이 됐다. 이슬람 제국의 영역 또한 낙타의 활동 무대와 거의 일치한다.

▎낙타는 300㎏에 이르는 짐을 싣고 하루에 약 40㎞를 이동할 수 있다.
원래 낙타는 미국과 캐나다 지역에 살았었는데 약 1만5000년 전 빙하기 말에 베링해협의 해수면이 몇십 미터 내려가면서 육지가 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라시아로 넘어왔다. 새로운 대륙으로 넘어온 낙타는 기껏해야 시속 30㎞로밖에 달리지 못했기 때문에 사자, 호랑이 등 육식동물이 따라오기 힘든 지역을 골라 살았다. 이곳에서 낙타는 물 없이 오래 버티고, 사막처럼 험한 환경에서도 잘 지내는 여러 특징을 갖게 됐다. 낙타는 운 좋게도 몇 안 되는 인간 친화적인 동물로 가축화됐다. 기원전 3000년경, 아라비아반도 남쪽 사람들과 홍해 건너편 사람들이 낙타의 젖을 먹기 시작했다. 지금도 소말리아 사람들은 젖과 고기를 얻기 위해 낙타를 키운다.

처음으로 가축화된 낙타는 혹 때문에 이동수단으로 쓰기 힘들었다. 기원전 1500년경 수백 킬로그램의 짐을 나를 수 있는 낙타의 능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로 짐을 나르는 짐승은 당나귀였다. 당나귀가 가벼운 짐을 실어 나르는 승용차라면 낙타는 두 배의 짐을 싣고도 장거리의 황무지를 빠르게 이동하는 랜드로버였다. 기원전 500년에서 서기 200년 사이에 북아라비아 안장이 개발돼 낙타에 짐을 쉽게 실을 수 있게 됐고 이후 약 2000년간 운송 수단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인간이 낙타를 길들이지 못했다면 유라시아와 아라비아를 횡단하며 비단과 향료를 운반하던 무역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낙타의 운송능력은 중동, 아프리카 사막과 아시아 초원지대 무역에 운송 혁명을 일으켰다.

운송 혁명 일으킨 낙타


▎알 와시티(al-Wasiti)가 그린 13세기 작품으로 알하리리(al- Hariri)가 저술한 고전문학 작품 『마카마트(Maqamat)』에 삽입됐다. 선장과 선원은 검은 피부의 인도인으로 보이고, 터번을 두른 승객은 이슬람 상인. / 사진:위키피디아
역대 중국 황실들은 북부 초원지대에 수십만 마리에 이르는 낙타를 방목했는데 대부분은 비단을 주고 유목민들에게서 사들인 것이었다. 중국 왕조들에는 낙타의 사육과 관리만 담당하는 특별부서까지 설치돼 있었다. 낙타를 돌보는 사람은 전문 기술 덕분에 고액의 녹봉을 받았다. 중국에서 가장 빠른 낙타는 변경에 군사적 위기가 일어날 때 급파되는 ‘명타사(긴급 낙타 전령)’ 전용으로 사용됐다.

‘사막의 배’라고 불리는 낙타는 혀와 치아가 튼튼해 사막이나 초원에서 자라는 가시 많은 풀을 먹을 수 있고, 한 번에 100ℓ의 물을 마시며 물 없이도 3일에서 20일까지 버틴다. 낙타의 또 다른 장점은 유지비용이 낮다는 것이다. 때때로 귀리 같은 곡물을 사료로 먹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기특한 동물이다. 또 일교차가 큰 사막 날씨를 견디기 위해 두꺼운 가죽과 털로 열과 냉기를 막는다. 낙타가 다른 동물에 비해 다리가 긴 것은 땅에서 몸통의 위치를 멀어지게 해 뜨거운 지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쌍봉낙타는 200~300㎏의 짐을 싣고, 하루에 30~40㎞ 거리를 6~8일 동안 쉬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중국의 한 장수는 전쟁터에 나갈 때 신선한 물을 채운 물통에 물고기를 넣어 낙타에 싣고 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싱싱한 생선을 먹었다고 한다. 전쟁 때는 낙타 200마리를 동원해 무거운 대포를 전쟁터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실크로드 주요 거점도시에 있는 시장에서는 어린 소년들이 낙타 등에 올라가서 온갖 곡예를 부리기도 했다. 또 낙타는 기억력이 좋고 방향감각이 뛰어나 죽은 이의 무덤을 찾을 때도 활용됐다. 죽은 이의 장지를 정할 때 어미 낙타와 새끼 낙타를 함께 데려가 장지가 결정되면 새끼 낙타를 죽였다. 어미 낙타는 새끼가 죽은 곳을 잊지 않기 때문에 장지를 찾아갈 때 어미 낙타를 동반했다. 어미가 발걸음을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새끼가 죽은 곳이다.

나이가 든 낙타들은 지하수가 있는 지점에 멈춰 서서 땅바닥을 앞발로 파헤쳐 우물을 찾기도 한다. 사막의 여인들은 낙타 오줌으로 머리를 감았는데 머리를 윤기 나게 하고 머릿니도 깨끗하게 없앴다고 한다. 2015년 필자는 낙타를 타고 우즈베키스탄의 아야스 칼라(Ayas Kala)라는 무너진 성터에 올라가고 풀도 뜯어 먹여주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온순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었다. 하지만 날벌레가 많이 꼬이는 탓에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낙타 타기를 거부하는 일행도 있었다.

말은 최강의 전쟁무기였지만 낙타는 군인과 짐을 싣고 다니며 문명 교류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낙타는 말이나 노새보다 훨씬 많은 짐을 나를 수 있었고, 특히 사막을 이동하는 데 탁월했다. 아라비아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 사하라 사막이나 키질쿰 사막을 관통하는 일은 상인들에게 목숨을 건 위험이었지만 대신 사막에는 강이나 밀림이 없어 이동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았고 맹수도 없었다. 또 기후가 건조해 병원균이 서식하기 어려워 질병에 걸리거나 물건이 변질될 위험도 적었다.

낙타들은 이동할 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줄로 길게 늘어서 터벅터벅 걸었다. 대규모 카라반은 수백 마리의 낙타로 이루어져 있었고, 5~15마리 낙타가 한 무리를 이루었다. 카라반들은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추운 밤, 병든 낙타 때문에 생기는 문제, 갑자기 몰아치는 모래폭풍과 홍수, 끊임없는 도적의 위협을 겪으며 카라반사라이와 역참에서 휴식을 취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여름밤은 카라반들이 덜걱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도시의 도로는 짐을 실은 낙타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기 때문에 행인들은 낙타 목에 매단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길을 비켜야 했다. 사막에서 들리는 방울 소리는 맞은편에서 카라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음이었다. 두 카라반이 만나면 선두에 선 낙타 몰이꾼이 잠깐 멈춰 행선지와 도로 상태, 우물의 위치, 도적의 출몰 여부 등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페르시아와 아랍의 장사꾼들


▎모로코 도시의 외곽에 도착한 카라반. 에드윈 로드 윅스 작품. / 사진:위키피디아
낙타의 이런 능력 덕분에 문명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문화와 농경, 이슬람 종교 등이 낙타의 등에 실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막을 넘어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지도를 펼쳐보면 아시아, 아프리카의 중심부에 낙타 카라반이 사용되는 광대한 지역이 동서 방향으로 펼쳐져 있다. 모로코에서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에 이르기까지 낙타가 널리 활용됐다는 것은 낙타가 운송 수단으로서 얼마나 효율성이 높은지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낙타 약 2000만 마리가 이 지역에 퍼져 있다. 이 낙타 무역권은 이슬람권과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서쪽에서부터 북아프리카, 중동지역에서 페르시아, 중앙아시아까지 이어진 이 지역에서는 같은 율법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지식인들은 모두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다른 지역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했다. 말하자면 당시의 아랍어는 지금의 영어와 같은 국제어였다. 이 이슬람권에 접하고 있는 유럽, 중국, 러시아, 인도, 아프리카 등 주요 문명권들이 모두 이웃해 있다. 서기 7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낙타 카라반이 다니던 이 지역에는 강대한 이슬람권이 구축됐고, 세계의 거의 모든 문명은 이 이슬람권에서 낙타의 등에 실려 교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559년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왕조가 이란 남부의 고도 파르스에서 건국했다. 기원전 522년 다리우스 1세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고 기원전 518년, 기원전 514년 소그디아나를 정복했다. 이집트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터키, 그리스 동부, 서북인도까지 정복한 페르시아는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근동의 문명을 계승해 수준 높은 페르시아 문명을 꽃피웠으나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멸망했다. 이후 파르티아 왕조와 사산조 페르시아가 다시 서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해 페르시아 문명을 계승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오늘날의 이란이다. 그들은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 행정체계를 발전시켜 아랍, 투르크,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도 제국의 중요한 행정관료로 기용되어 제국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페르시아계 상인 중에는 커다란 부를 쌓은 거상이 많았다. 당나라 장안의 주보나 향약시장을 차지하고 했었던 소그드 상인들도 페르시아계에 속한다. 6세기 이후 실크로드 교역이 돌궐의 위협으로 위축되자 인도양으로 이동해 바다 실크로드 무역을 발전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제국에 멸망당한 이후에도 페르시아 상인은 명성을 이어가 인도양에서 중국 동남해까지 진출했다. 당시 중국의 항구에는 외국 선박 중에 페르시아 배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몇 년 전 자바 해역에서 중국을 오가던 페르시아 선박이 수중 발굴돼 엄청난 보화와 도자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페르시아는 셈족언어를 쓰는 아랍민족과는 언어와 혈통이 다르다. 오늘날의 이란은 이슬람권이지만 자신들은 아랍민족과 다르다며 페르시아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영광에 대한 자부심, 오랜 기간 다른 민족에게 당한 정치적 핍박과 이슬람 소수 종파인 시아파로서 겪은 피해의식이 공존한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중국 광저우(廣州)에는 아랍인, 취안저우(泉州)와 저장(浙江) 해안에는 페르시아인이 모여 살고 있다. 취안저우에 살고 있는 모슬렘 5만여 명은 페르시아의 후예로 여겨지며 페르시아 상인의 후예답게 지금도 상업에 많이 종사한다. 정(丁)·하(夏)·곽(郭)·포(浦) 등의 성씨가 그들이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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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호 (202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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