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란 적게 사용할수록 힘이 강하다. 과도한 권력 사용은 일차적인 효과는 있을 수 있어도, 금방 항체를 형성하게 만든다. 최소한으로 사용된 권력이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 사진:이정권 기자

권력은 필연적으로 행사된다. 그것이 권력의 존재 이유다. 행사되지 않은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크든 작든 마찬가지다. 권력이 행사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면, 어느 누구도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용될 것이 분명하기에 누구나 권력을 두려워한다. 행사되지 않더라도 권력 그 자체가 그것을 두려워하는 타인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맞다. 하지만 그것 역시 권력이 사용된 경우로 봐야 한다. 권력이 없었다면 타인이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을 테니까. 권력의 가장 이상적인 사용 예가 바로 이런 것이다.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도 사용한 효과, 또는 그 이상을 누릴 수 있는 것 말이다.

역설적으로 권력은 적게 사용할수록 힘이 강하다. 특히 어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권력이 사용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과도한 권력 사용은 일차적인 효과는 있을 수 있어도, 금방 항체를 형성하게 만든다. 더는 강력한 권력 행사가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소한으로 사용된 권력이 오히려 더 큰 응징이나 제재를 예고하고 있는 까닭에 효과가 더 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필요 이상의 권력 사용은 필연적으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권력 행사 대상에 대한 동정심도 유발할 수 있다. 대등한 상대가 아니라 열세에 있는 상대를 향한 권력 행사일수록 그렇다. 스포츠 경기에서 관중이 대체로 약자의 편에 서게 되며, 크게 이기고 있는 팀이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갖은 수를 다 써서 지고 있는 팀을 압박할 경우 야유를 받게 되는 것과 같다. 이럴 경우 자칫 권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마저 있게 된다. 그런 사례가 지난 세기 미국에 있었다.

멕시코 혁명의 주역이었던 농민 지도자 판초 비야는 원래 산적 두목이었다. 1878년 멕시코 아시엔다에서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역시 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누이를 강간 살해한 농장주를 죽이고 멕시코 북부 산악지대로 도피했다. 이곳에서 그는 이름을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로 바꾸고 산적이 됐다. 부자들의 집을 털거나 열차 강도 행각을 벌였다. 하지만 빼앗은 돈과 재물을 자신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 주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대중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자신을 따르던 무장세력을 이끌고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주도하는 혁명에 참여했다. 이후 전설적인 연전연승을 거둔 그는 치와와주에서 멕시코시티에 이르는 멕시코 북부 일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1915년 셀라야 전투에서 최대 정적이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장군에게 패했다.

기반을 잃은 그는 고향 치와와로 돌아가 다시 산적질을 했다. 민중의 영웅으로서 누렸던 명성도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행정부가 카란사를 지원한 탓에 혁명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국경지대의 미국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16년 비야는 미국의 뉴멕시코주 콜럼버스를 공격해 미군과 민간인 17명을 살해했다. 윌슨 대통령도 한때 비야를 존경했으나 이제 적이 된 그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윌슨의 참모들은 군대를 멕시코로 보내 비야를 잡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여론 역시 비야의 응징을 강력히 요구했다.

과도한 파병으로 망신 당한 윌슨

윌슨은 이를 미국의 힘을 만방에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인기를 끌어올릴 기회로 삼았다. 카란사 정부의 양해를 얻어 1만 명 규모 군대를 멕시코에 파견했다. 지휘는 당시 게릴라 섬멸로 명성을 떨친 존 퍼싱 장군에게 맡겼다. 윌슨은 ‘응징 원정대’란 이름이 붙은 이 부대를 전폭 지원했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으며 당시 첨단 제품이던 무전기로 교신하고 정찰 비행기의 지원을 받았다. 응징 원정대는 몇 달 동안 소규모 부대 단위로 멕시코 북부 산악과 황야를 샅샅이 뒤졌다. 정보 제공자에게는 현상금 5만 달러를 내걸기도 했다.

멕시코 민중은 비야가 다시 산적이 됐을 때는 그에게 환멸을 느꼈으나, 막강한 미국이 국경을 넘어오자 다시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들은 일부러 미국에 거짓 정보를 제공했으며 미군의 기습은 번번이 허탕을 치고 말았다. 시간만 흐르고 성과가 없자 윌슨은 초조했다. 그해 여름 응징 원정대 규모를 12만3000명으로 늘렸다. 하지만 비야는 겨울이 될 때까지 요리조리 피하며 미군을 따돌렸다. 1917년 1월 윌슨 대통령은 마침내 퍼싱에게 철수를 명령해야 했다. 미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비야의 부대는 그들의 후미를 추격해 미군을 괴롭혔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야 했다.

윌슨은 비야를 따끔하게 혼내줌으로써 전 세계에 미국을 공격하면 누구나 비야 꼴을 면치 못한다는 교훈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 작업이 몇 주일이면 충분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원정 기간이 길어지면서 미국의 무능이 강조됐고, 판초 비야의 영리함이 대신 주목을 받았다. 미국은 산적 두목 하나 잡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 셈이 됐고 국제적 망신을 피할 수 없었다. 소 잡는 칼로 닭도 못 잡고 지붕만 쳐다보는 꼴이 된 것이다. 결국 원정대는 웃음거리가 된 채 멕시코를 떠나야 했으며 비야는 전설이 됐다.

판초 비야는 미국을 조롱했다.

“미국인들이여. 당신네 정부는 나를 잡으려고 1억3000만 달러를 썼다. 나는 그들을 거친 산악지대로 초대했다. 그들은 100km를 움직이는 동안 물 한 방울 못 마신 적도 있었다. 그들은 뜨거운 태양과 모기에 시달렸다. (…)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윌슨 대통령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더욱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분명 있었다. 우선 카란사 정부에 비야를 체포하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멕시코 정규군은 미군보다 멕시코 지형과 비야의 전술에 정통했다. 훨씬 적은 병력과 기간으로 비야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멕시코 정부군에 약간의 무기와 장비만 지원하면 충분했을 것이다.

미국이 직접 군사작전을 하더라도 소규모 특수부대를 파견하는 게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비야는 멕시코인 사이에서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었으므로 소규모로 은밀한 작전을 펼친다면 멕시코 지역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과시를 위해 지나치게 대규모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멕시코인의 반발을 산 것이다. 공연히 동정심만 불러일으켜 비야를 영웅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대공황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반대파들도 그랬다. 그들은 루스벨트 정부가 뉴딜 정책을 펼치면서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미국 국민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은 여기서 자제할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루스벨트를 공격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비판자들은 국민이 어려운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대통령의 개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루스벨트가 맞받아쳤다.

“차라리 나를 공격하라. 힘 없는 작은 개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많은 국민이 루스벨트의 말에 공감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개를 약자로 만듦으로써 개에 대한 동정심을 이끌어냈고, 나아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동정심으로 이어지게 만든 것이다.

“아내와 이혼하란 말입니까?”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장면 아닌가.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경선 때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장인의 빨치산 활동을 문제 삼는 경쟁자들의 공세를 전면으로 받아쳤다.

“제 장인은 좌익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연설이 진행되던 순간 색깔 공세를 펴던 상대 후보는 조용히 물만 마셨다. 노 후보 장인의 좌익활동 논란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노무현 자신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자인 아내를 공격한 경쟁자들의 패착이었다. 권력의 행사는 상대의 체급에 따라 절제되고 조절되어야 한다. 자신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상대에게 권력을 잘못 휘두르면 자칫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올 수 있다. 반대로 성공 사례를 보자.

일본에 다도를 중시하는 천황이 있었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다완이 있었는데, 색깔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오묘하고 깊어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었다. 어느 날 한 귀족이 방문했고, 천황은 그에게 자신의 다완으로 차를 대접했다. 그 귀족은 차를 마시다 좀 더 밝은 곳에서 다완을 자세히 감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례적인 요청이었지만 천황은 기꺼이 허락했다. 귀족이 창가로 가 햇빛을 향해 찻잔을 들어 올리다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고 말았다. 창 밖으로 날아간 찻잔은 정원석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천황은 놀라서 자신이 들고 있던 다완도 떨어뜨릴 뻔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귀족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별 게 아닙니다. 그 찻잔은 아주 오래돼서 어차피 얼마 더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두고 보는 것이지 사용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천황은 귀족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귀한 다완이라고 해도 결국은 찻잔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깼다고 천황이 화를 내거나 귀족을 모욕한다면 금방 ‘아량이 없다’, ‘마음이 좁다’는 식의 구설이 나올 게 분명했다. 또 다도에는 차를 마시고 찻잔을 감상하는 순서가 있으므로 귀족이 무례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귀족이 공손한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자신의 권력도 만만치 않다는 뼈를 담고 있었다. 그런 상대를 질책한다면 상대 역시 크든 작든 반격을 해올 가능성이 있었다.

천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이 찻잔도 자신의 자리로 보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자리를 지켜야지요.”

이어 천황은 자신의 찻잔도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귀족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했지만,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모르는 게 누구인지 알고 제 분수를 지키라는 경고였다. 귀족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고는 지인들에게 황궁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며 “천황의 마음이 바다같이 넓고 물욕은 티끌보다 작다”고 칭송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천황의 덕을 찬양했다.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둔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찻잔을 창 밖으로 버린 천황

지금까지 큰 권력에 대해 얘기했지만, 작은 권력도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작은 권력이라도 행사하고 싶은 욕구는 마찬가지다. 편의점 이용객이 알바생한테 갑질하는 정도는 흔한 일이지만, 작은 권력이 자신보다 큰 권력자를 향해 권력을 행사하는 예는 드물다. 서양 역사상 최초의 포로노그래피 발명자로 알려져 있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 사례를 보자.

이탈리아 소도시 아레초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레티노는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당시 식자층의 필수 언어였던 라틴어를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민중의 언어인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면서 당대의 학자와 문인들을 비웃었다.

“나는 고전과 라틴어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앵무새처럼 따라 읊지 않는다. 내가 쓴 것은 모두 내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가 쓴 글들이 모두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글재주를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사용한 통속작가”라는 일반적인 평가가 틀리지 않는다.

당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금속활자 인쇄술이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그는 동시대 최고 권력자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등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폐하는 카이사르인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다.” “어떻게 이교도인 튀르크인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느냐.”

물론 그가 보낸 편지를 카를 5세나 프랑수아 1세가 읽었을 리 없다. 궁정에 도착하기도 전에 폐기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레티노는 자신이 쓴 편지를『서간집』으로 만들어 시중에 판매했다. 이『서간집』들이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아레티노가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파워 블로거’나 ‘인플루언서’가 된 셈이었다. 그러자 권력자들도 일개 작가에 불과한 아레티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권력자들은 아레티노에게 돈이나 선물을 보내 아레티노가 자신에게 유리한 편지를 쓰게 만들고자 했다. 반대로 군주나 사제 등 권력자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아레티노를 찾아와 호소하기도 했다. 아레티노는 양쪽을 적절히 이용해 군주와 귀족, 고위 사제들과 서한을 주고받고 또 책으로 펴내 떼돈을 벌었다.

아레티노의 작은 권력은 이제 그 누구보다 큰 권력이 됐다. 하지만 그가 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면 그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권력자들과 가까이해서 이익을 취하면서도 그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균형감각을 발휘했다. 그리고 권력자들에게서 받아낸 돈을 쌓아두기만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써서 또 다른 명성을 얻었다.

그런 그에게는 ‘군주를 벌하는 채찍’과 동시에 ‘자비로운 은행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처럼 권력 행사를 절제할 수 있는 지혜가 교황도 그를 어쩌지 못하는 힘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