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7) 

생득적 자기파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경향성 

사람의 안에는 스스로를 발전시키려는 마음과 파괴하려는 마음, 이 둘 중 어떤 것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을까.

▎(왼쪽)밀레 [만종] 1859 / (오른쪽)고흐 [만종] 1880
『미움받을 용기』로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월성과 계속해서 발전하려는 경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또 인간 중심 상담의 창시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는 지금보다 더 향상하려는 욕구가 있다고 설명하며 이것을 실현화 경향성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심리치료 접근인 인지행동치료에서는 그와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인지행동치료의 대가 아론 벡(Aron Beck)과 앨버트 앨리스(Albert Ellis)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커다란 성장 자원이 내재해 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해를 끼치려는 선천적 경향성, 즉 생득적 자기파괴(selfsabotaging)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기대에 맞춰서 살아가며, 타인의 능력을 능가하거나, 인정받거나, 승인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찾는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비합리적 신념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써 불행해지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 불안한 뿌리의 시작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네덜란드의 준데르트(Zundert)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형 빈센트 반 고흐가 있었다. 부모님은 첫째 아들에게 붙여주었던 이름을 다시 태어난 아이에게 똑같이 붙여준 것이다. 어린 고흐는 죽은 형의 무덤에 부모님과 함께 다니며 “너는 형의 삶을 대신해서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해왔다.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으로서 자아를 뿌리내리기에 세상의 시작은 불안하기만 했다.

스스로의 가치를 찾기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고흐는 13살에 틸뷔르흐 빌리암 2세(Tilburg William II) 국립중학교로 진학했는데, 당시에는 매우 이례적으로 미술이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었다. 고흐가 미술을 제대로 배우게 된 첫 기회였지만 정신발작을 일으켜 학업을 중단했다. 칼뱅파 목사였던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어 신학도가 되기를 원했으나 고흐는 뜻이 없었고, 아버지는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겼다.

고흐는 16세 되던 해, 헤이그(Hague)에서 구필화랑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화랑에서 일을 하게 됐다. 당시 바르비종파의 그림을 수집해서 판매하던 큰아버지의 영향으로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의 그림을 접한 고흐는 밀레에게 완전히 매료됐고 그의 그림을 선망하며 모작 수십 점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랑에 실패하다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밀레는 생전에도 이미 알려진 화가였으며, 고흐가 22세 되던 해에 사망한 동시대 화가이기도 했다. 고흐는 수없이 밀레의 작품을 그리며 그와 같은 훌륭한 화가기 되기를 꿈꿨다. [만종]은 고흐가 사망하기 10년 전에 그린 모작이며, [씨 뿌리는 사람]은 사망 1년 전에 그린 모작이다. 평생 밀레를 선망했지만 고흐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그림이 사랑받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고독하고 외로웠던 고흐도 사랑을 했었다. 그의 첫 번째 사랑은 하숙집 딸 외제니 로예(Eugenie Loyer)였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로예는 고흐의 고백을 수차례 거절했다. 두 번째 여인은 과부였던 외삼촌의 딸 케이보스(Kee Vos-Stricker)였다. 케이는 그의 구혼을 거절했고, 고흐는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근친상간을 하는 놈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고흐는 케이의 집에 찾아가 램프에 손을 넣고 그녀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가족을 포함한 친척들이 고흐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29살이 된 고흐는 알코올중독자에 임신 5개월 차인 매춘부 시엔(Sien)을 만났다. 사랑과 연민이 뒤섞인 안타까운 마음에 고흐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고 이 일로 가족 간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골이 생겼다. 결국 시엔과 헤어져 다시 부모와 살게 되는데, 이듬해 고흐의 어머니가 다리 골절상으로 병상에 눕고 말았다. 옆집에 살던 여인 마고 베게만(Margot Begemann)은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도왔고, 이들은 서로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쪽 집안은 서로의 자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마고는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자살 시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개신교 목사였던 고흐의 아버지는 생명을 쉽게 버리려 한 그녀와의 결혼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개인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스스로 소중하게 느끼도록 하는 사랑과 연애가 고흐에게는 좌절감과 분노, 우울함이라는 부정적 감정들로 얼룩졌다.

1885년, 고흐가 자신의 미술세계에 한 획을 긋는 대작이 탄생했다. 문이 살짝 열려 있던 집에서 호르트 가족이 모두 모여 감자를 먹고 있는 장면을 담아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그 배경에는 농민의 노동과 가치를 중시했던 밀레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모델이 된 호르트 가족 중 결혼하지 않은 딸이 임신을 했고, 마을 사람들은 절대 고흐의 모델이 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 가족, 친척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고흐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을 완성하고 며칠 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성공한 모습을 보여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 기회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화가 공동체를 꿈꾸다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
부모와 함께 지내던 뇌넨을 떠나 파리로 간 고흐는 여러 인상주의 화가와 교류하며 지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생활은 고흐에게 잘 맞지 않았다. 유일하게 고흐의 편이 되어 후원금을 보내주고 응원해준 동생 테오(Theo van Gogh)는 고흐에게 물질적·정신적 지주였으나 모든 화가가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장 최선은 아니었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칭찬하면 앞에서만 칭찬하는 것이라고 삐딱하게 받아들였고, 괴팍하고 욱하는 성격을 참지 못해 화가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화가들이 모여 서로 그림을 평가하고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갑자기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잦았다. 누구보다 칭찬에 목마른 고흐였지만 익숙하지 않았던 칭찬은 고흐를 화나게 하기도 했고, 그 분노는 다른 사람들과 고흐 자신을 향했다.

고흐는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마을 아를(Arles)로 가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고 다른 화가들과 그림을 그리며 살기로 결심했다. 건물의 색이 노란색이었기에 고흐는 이 공간을 노란 집이라고 불렀다. 화가 동료들에게 편지를 써서 함께 이곳에서 작업하자고 제의했지만 대부분의 화가는 이를 외면했고, 동생 테오와 친분이 있던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둘은 함께 생활하게 됐다.

그러나 유년 시절에 자신이 아닌 형의 대리로서 살아야 했던 시간들,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진로를 선택하며 겪은 갈등들, 연속적으로 실패한 사랑들, 그리고 파리에 갔었으나 동료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그림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경험들은 고흐 스스로 파괴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고갱은 고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흐는 감정에 크게 흔들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에 미숙한 사람이었다. 같은 대상을 놓고 그림을 그릴 경우, ‘고갱이 나를 무시해서 이런 식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싸우기도 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고갱이 조절되지 않으면 그에게도 화를 냈다.

특히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는 고흐를 아주 화나게 했다. 고흐는 그림 속 자신의 포즈가 어눌해 보인다는 점, 표정이 약물이나 술에 취해서 정신없어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고갱이 나를 바보 취급한다’며 큰 싸움을 했다. 고흐는 싸울 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흐는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압생트(absinthe)를 비롯한 여러 술을 과도하게 마셔 고갱은 그를 알코올중독이라 표현했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그 그림이 끝날 때까지 식사를 거르는 기이한 행동도 했다. 그렇게 고흐는 몸과 마음이 지속적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결국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고갱과 크게 싸웠고, 이후 발작을 일으켰다. 고흐가 선택한 것은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것이었다. 자른 귀를 매춘부인 라셸에게 건네주고 이 사건은 다음 날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이후 고흐는 아를을 떠나 생레미 정신요양원에 입원하게 됐다.

나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서는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요양원 창밖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이는 풍경과 달라 고흐의 상상력이 더해진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푸르고 어두운 하늘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고 아래에는 별빛을 받은 마을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왼쪽에는 나무처럼 보이는 검은 무언가가 있는데, 이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 나무이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고흐의 다른 그림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고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얼마 전 그렸던 그림임을 감안했을 때, 사이프러스 나무가 나타내고자 하는 상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마을 중앙에는 뾰족한 교회 첨탑이 있다. 인간이 하늘에 닿기 위해 쌓아 올리고 또 쌓아 올린 상징이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고흐는 이 그림에서 표현하려 했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자신이 자주 그림을 그리던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인 29일에 사망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왜곡되고 비합리적인 생각들은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반복된다. 같은 상황이나 사건을 마주했을 때 누군가는 흘려 넘기고, 누군가는 화를 내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 부정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사건과 감정·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인지 왜곡과 비합리적 신념 때문이다.

어떠한 감정과 행동도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가 형성해놓은 신념에 영향을 받아 이를 결과로 이끌어낸다. 그렇기에 타인의 말을 나쁘게 해석하여 듣거나, 부정적 평가는 크게 생각하고 긍정적 평가는 축소해서 생각하거나, 자신은 어떤 징크스나 무언가를 하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 단정하거나,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흑백논리를 적용하거나, 작은 어려움에도 망했다는 파국적 사고를 하는 등 인지 왜곡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할 것이다.

또 자신(ex. 나는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해), 타인(ex. 직원이라면 절대 이런 실수는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조건(ex. 내가 일하는 곳은 무조건 높은 곳에 있어야 해)를 주어로 하여 당위적 설명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고, 타인을 탓하게 하며, 또 자신이 설정한 당위적 상황이 주어지지 않을 때 과도한 불행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꼭’, ‘결코’, ‘절대’, ‘매일’, ‘반드시’가 포함되어야 하는 표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가천대학교 조소과 객원교수이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이다. 현재 플로리다마음연구소 대표로,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009호 (202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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