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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 헨리 클레이 프릭 Henry Clay Frick 

2021년 다시 태어나는 프릭박물관 

고작 21세에 코크스 생산 기업을 설립해 30세에 이미 억만장자가 되었고 50세엔 수집왕이 된 프릭은 컬렉션 박물관을 만들었다.

▎John C. Johansen, Henry Clay Frick, 1943, oil on canvas, 56 1/8 x 35 15/16 inches,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photo: Michael Bodycomb
19세기 소설가이며 시인인 오귀스트 드 빌리에 드 릴라당(Auguste de Villiers de L’Isle-Adam)이 1886년에 출간한 『미래의 이브(L’Eve future)』에 안드로이드의 근원이 되는 단어, 안드레이드(Andreide)가 인류 최초로 소개됐다. 소설 속 주인공 로드 이월드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청년이지만 그의 취향에 비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진다. 혼란과 실망에 빠진 로드를 위해 엔지니어 토마스 에디슨은 안드레이드를 발명한다. 다행히 로드는 다시는 살아 있는 여인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맹세한 터라 인공 로봇은 인간의 육체와 지성을 모델로 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깊은 여성혐오로 인해 특히 비판을 받았던 이 작품뿐 아니라 그의 인생에서 대부분의 시와 소설은 한결같이 실패작이었다. 한 세기를 훌쩍 넘은 그의 진보적인 상상력은 너무도 뛰어나 범인들이 공감할 수조차 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함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귀족으로도, 작가로도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를 보면 자신과 맞지 않은 시대에 태어났던 천재라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빌리에의 소설들은 프랑스인이 애호하는 프낙(FNAC)서점이 아니라 센강 가장자리에 자리한 부키니스트들의 좌판대에 누워 있는 고서들을 일일이 뒤적여야만 겨우 찾을 수 있는 책이 됐다.

출신은 중요할 수도 있고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단지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달렸다. 1849년,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 모어 랜드의 웨스트 오버턴에서 출생한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은 미국의 소박한 가정 출신이다. 몸이 약해 어린 시절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그는 정규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고급 쇼핑몰에서 연수하면서 상업적인 재능을 살렸고 예술에 멈추지 않는 호기심을 가졌다. 가녀린 육체 속에 감추어진 그의 엄청난 야망이 밖으로 표출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Harbor of Dieppe: Changement de Domicile, exhibited 1825, but subsequently dated 1826, oil on canvas, 68 3/8 x 88 3/4 inches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photo: Michael Bodycomb
헨리 클레이 프릭은 고작 21세에 친구, 두 사촌과 함께 철강산업에서 사용되는 코크스(공기로부터 보호되는 용광로에서 석탄을 열분해하여 얻은 연료) 생산 기업을 설립했다. 3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억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1880년 31세에 그는 사촌들의 지분을 사들여 ‘H. C. Frick & Company’를 설립했고 몇 년 뒤 세계에서 가장 큰 코크스 생산 기업으로 성장했다. 1881년 애들레이드 하워드 차일드(Adelaide Howard Childs)와 피츠버그에서 결혼했다. 애들레이드는 네 아이를 낳았지만 둘은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다. 생존한 아들 차일드 프릭(Childs Frick, 1883~1965)은 고생물학자가 되었고 딸 헬렌 클레이 프릭(Helen Clay Frick, 1888~1984)은 자선가이자 수집가가 됐다.

프릭에게 1881년은 특별한 해였다. 평생을 함께할 인생의 동반자와 결혼했을 뿐 아니라 사업가 앤드루 카네기를 만난 것이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주 앨러게니(현 피츠버그)로 이주한 이민자 출신이다. 출신이 별 의미가 없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카네기는 대규모 철강 트러스트를 형성해 철강왕으로 불렸다. “가난이 오히려 재산이다”라고 말했던 카네기와 프릭의 공통점은 둘 다 변변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각도로 해석하면 교육은 오히려 혈기 넘치는 야망을 지닌 이 두 청년에게는 그저 사회적 관습에 불과하다. 이 두 청년의 삶의 바탕에는 사회에서 몸으로 부딪쳐가며 얻은 성실함과 성공에 대한 야망이 있다. 두 인물의 만남으로 프릭&컴퍼니는 카네기 철강회사(Carnegie Steel Company)의 협력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이는 미래에 만들어질 미국철강(United States Steel)의 전신이었다. 프릭의 회사는 카네기 제철소에 충분한 코크스를 공급했으며, 1889년 프릭은 당시 최대 철강 생산 업체인 카네기 철강회사의 대표가 됐다. 카네기는 경영에서 은퇴해 여생을 사회복지를 위해 자신이 축적한 부를 나누는 데 헌신했다.


▎Johannes Vermeer, Officer and Laughing Girl, ca. 1657, oil on canvas (lined) 19 7/8 x 18 1/8 inches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photo: Michael Bodycomb


프릭에게 우동(Houdon)의 [카일라 부인의 흉상] 등을 판매했던 딜러 르네 김펠(Rene Gimpel)은 그림 속의 소녀가 죽은 딸과 닮았다며 부게로(Bouguereau)의 작품을 구입한 것이 아마도 프릭 수집품의 발단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억했다. 1901년 프릭은 이미 엄청난 수집가가 되어 있었다. 베르메르(Vermeer), 르누아르(Renoir), 게인즈버러(Gainsborough), 컨스터블(Constable), 터너(Turner), 렘브란트(Rembrandt) 등을 수집하는 그의 모습은 예술 메세나의 전형적인 삶이었다. 프릭은 당시 가장 부유했던 수집가들과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예술 작품 수집에 빠졌다.


▎French, Hercules and the Hydra, mid-17th century Bronze, H: 22 3/8 inches,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photo: Michael Bodycomb
1910년에 프릭은 5번가에 저택을 지었고 이곳은 프릭의 거주지이자 개인 박물관이 됐다. 프릭이 인류에 필요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상징적인 예가 있다. 그가 1912년 타이타닉호에 단 두 개뿐이었던 백만장자 스위트룸 중 하나를 예약했지만 아내가 발목을 삐어 여행을 취소했던 사건이었다. 그는 타이타닉호의 사망자가 될 운명이 아니라 남은 생애 동안 수집가로서 열정을 좀 더 불사를 운명을 타고났을까? 어쩌면 이 사고로 인해 사업 이외에 가장 흥미를 가졌던 예술품 수집에 열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중 1913년 수집왕 J.P 모건(J.P Morgan)이 세상을 떠났다. 모건 회장의 수집품들이 뉴욕의 박물관으로 흡수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작품들은 경매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프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프릭이 그동안 수집한 작품들은 모던아트 작품들과 18세기 영국 그림들, 1830년대 작품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수집품이 올드하고 신선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프릭에게는 수집품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넓힐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이미 높은 안목을 지닌 프릭은 경매에 나온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들만 차지했다. 이렇게 프릭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수집 리스트가 완성됐다.


▎Jean-Henri Riesener, Commode, ca. 1780 and 1791, Oak veneered with various woods including ash, bloodwood, and amaranth, gilt-bronze, marble, ,37 3/4 x 56 3/4 x 24 5/8 inches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photo: Michael Bodycomb
1919년 헨리 클레이 프릭이 사망한 후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은 뉴욕을 상징하는 미술관 중 한 곳이 됐다. 프릭은 카네기와 같이 재산 상당 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60만㎡ 부지를 피츠버그시에 기부했다. 현재 이 공원은 프릭 파크로 불린다.

9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1500점 이상 보유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Fifth Avenue Garden and façade with magnolias in bloom Photo: Michael Bodycomb
2020년은 미국의 수백만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수정헌법 제19차 비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프릭 컬렉션 박물관은 예술품을 제작하고 수집하고 관리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일련의 영상으로 제작해 이 뜻깊은 해를 기념했다. 수집가이며 자선가였던 아버지 곁에서 예술품 수집이라는 특별한 기호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헬렌 클레이 프릭은 1920년, 프릭 도서관(Frick Art Reference Library)을 설립했다. 이 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예술품 리퍼런스 도서관이다. 헬렌은 1984년 사망하기까지 50년간 박물관 디렉터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헬렌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앵그르의 [오송빌 백작부인] 등 프릭 박물관의 초기 예술품 수집을 집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헬렌은 1970년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에 있는 프릭 가족 저택에 프릭 아트 박물관(The Frick Art Museum)을 설립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적십자와 함께 유럽에 갔을 때 그녀는 여성과 어린이 이민자들을 위해 봉사했다. 특히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을 위해 헌신한 헬렌은 프릭 컬렉션의 발자취를 가장 멋지게 남긴 특별한 여성이었다.

프릭 컬렉션은 9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1500점 이상의 예술 작품으로 구성된 미술관으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저택이었다. 이 집은 뉴욕시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길디드에이지(Gilded Age) 맨션 중 하나다. 길디드에이지 맨션은 1870년에서 1900년대 초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몇 안 되는 신흥 부자그룹이 유럽의 그랜드 투어 이후 유럽의 영지에 탄복해 스스로를 미국의 ‘귀족’으로 보고 미국 땅에 있는 구세계 주거를 모방했던 증거로 여전히 남아 있다. 클릭처럼 엄청난 부를 축적한 엘리트들이 살았던 길디드에이지 맨션은 당시 가장 저명한 건축가가 디자인했고 유럽에서 수입된 많은 골동품, 가구 및 예술 작품으로 장식된 진정한 ‘궁전’이었다. 맨션은 19세기 상류사회의 사회적 의식의 ‘사원’이었으며, 연회를 위한 식당과 같은 특정 활동을 위해 의도된 공간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부와 권력의 요새였던 이 저택은 사회적 역할까지 수행했던 곳으로 대부분은 프랑스, 영국 또는 이탈리아의 건축 및 장식 스타일로 지어졌다.


▎Giovanni Bellini, St. Francis in the Desert, ca. 1476-78, oil on panel. Panel: 49 1/16 x 55 7/8 inches Image: 48 7/8 x 55 1/16 inches,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photo: Michael Bodycomb


가구와 예술품으로 가득한 프릭 컬렉션 박물관은 1935년부터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창립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예술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2020년 프릭 컬렉션 박물관은 창립 85주년을 맞았다. 현재 문을 닫고 대대적인 첫 번째 대규모 리노베이션에 착수했다. 아마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박물관을 일시 폐쇄해야 하는 시간을 활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2021년 초 프릭 매디슨(Frick Madison)에서 작품들이 재공개될 예정이다.


▎Hans Holbein, Sir Thomas More, 1527, Oil on oak panel, 29 1/2 x 23 3/4 inches,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photo: Michael Bodycomb
프릭 컬렉션의 건축 유산과 독특한 특성을 기리기 위해 셀도르프 아키텍츠(Selldorf Architects)가 설계한 리노베이션 기획은 프릭의 1914년 저택에 전례 없는 접근성을 제공하고, 방문자들에게 특별한 예술품 관람의 경험을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방문객을 위한 편의 시설과 전반적인 접근성을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컬렉션의 전시 및 특별전, 교육, 공공 프로그램 등을 위한 중요한 새 공간을 만들 이 대대적인 공사는 2021년 1분기에 시작될 예정이다.

유서 깊은 프릭 컬렉션 건물이 리노베이션을 진행하는 동안 2021년 초에 개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프릭 매디슨은 예전에 휘트니 뮤지엄과 멧브로이어(The Met Breuer)박물관의 본거지였던 매디슨 에비뉴에 있다. 헝가리 출신의 미국 건축가이며 가구 디자이너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가 설계한 프릭 매디슨 건물에서 벨리니, 클로디옹의 소중한 그림과 조각품과 더불어 고야, 홀바인, 우동, 앵그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렘브란트, 티티안, 터너, 벨라스케스, 베르메르, 휘슬러, 프라고나르 등 프릭의 화려한 수집품들과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오귀스트 드 빌리에 드 릴라당과 달리 자신의 야망을 펼칠 수 있었던 시대를 타고난 프릭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영국식 정원을 자랑하는 프릭 컬렉션 박물관을 둘러본 후, 프릭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기는 방문자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닌 도서관에서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Louise Gluck)의 시 [눈풀꽃]을 다시 읽을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눈풀꽃


▎Jean-Auguste-Dominique Ingres, Comtesse d’Haussonville, 1845, oil on canvas, 51 7/8 x 36 1/4 inches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photo: Michael Bodycomb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 루이즈 글릭, 류시화 역

※ 박은주는… 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2102호 (202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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