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12) 

남에게서 찾는 나의 가치-인정 욕구 

남이 무언가를 부탁하면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늘 좋은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여 내면과 외면의 모순이 일어나는 사람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착한아이 증후군’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폴 세잔 [레벤망] 1866
정말로 착한 사람들과는 다르다. 착한 사람들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은 흔쾌히 들어주고, 들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미안해하며 거절할 뿐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인정의 주체는 주로 부모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상벌이라는 개념을 어린 시절 부모와의 계약관계를 통해 처음 알게 된다. 나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자녀교육 강의를 할 때, 아이들에게 상벌을 적절하게 주는 것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강화하고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것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말을 잘 들었을 경우 부모님이 칭찬이나 과자 등 보상을 주었을 것이고, 말을 잘 듣지 않았을 경우 혼이 나거나 가진 것을 뺏기는 벌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칭찬을 받아도 될 것 같다는 시점에서 칭찬이 계속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경험이 쌓이며 성장한 사람들은 늘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한다.

아버지의 기대감에 미치지 못했던 아들


▎폴 세잔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 1891
폴 세잔(Paul Cezanne)은 프랑스 남쪽 끝에 있는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과 함께 프랑스 3대 후기 인상주의 화가 반열에 있는 그이지만, 살아생전 세잔은 대중과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였다.

세잔의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늘 자신의 말이 옳다고 여겼고 아들의 의견은 쉽게 무시했다. 아버지는 세잔이 자신의 은행에서 일하기를 원했지만 세잔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잠시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한 적은 있으나 친구인 에밀 졸라와 어머니의 설득으로 미술의 길을 포기하지 않게 됐다.

에밀 졸라는 세잔이 13살 때 학교에서 만난 친구이다.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있을 때 이탈리안과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던 졸라를 세잔이 여러모로 도와주었고, 오랜 시간 우정을 단단히 쌓아왔다. 같이 산과 들에 놀러 다니고, 같이 사냥과 수영도 했다. 졸라는 글 쓰는 것에, 세잔은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나중에 졸라가 글을 쓰고 세잔이 삽화를 그려 넣은 책을 함께 만들자는 꿈도 같이 키워나갔다. 세잔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꾸 미술의 바람을 불어넣는 졸라가 탐탁지 않았지만, 졸라는 빠른 시간 안에 글을 통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세잔의 아버지는 결국 졸라는 재능이 뛰어났지만 세잔은 재능이 없음을 누차 강조했다.

세잔이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 [레벤망]은 에밀 졸라가 1866년에 미술평론을 썼던 신문 이름이기도 하다. 사회적 명성과 돈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성공이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그림을 그리는 세잔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제로 세잔의 아버지는 신문 레벤망을 구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잔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을 레벤망을 보고 있는 아버지를 그림으로써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잔이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아버지가 화가라는 직업 자체를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주의 화가 마네를 성공한 화가라 칭송했고, 마네의 그림을 구매해 자신의 집에 걸어놓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세잔의 아버지는 부유했지만 그림을 계속 그리는 세잔을 후원할 생각은 없었다. 세잔은 그림을 그만두면 보장되는 경제적 지원과 안정적인 직업을 뒤로한 채 미술의 길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에게 더는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돈이 부족해진 세잔에게 후원을 해준 이는 친구 에밀 졸라였다.

에밀 졸라와 교류를 시작했을 때 세잔은 졸라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졸라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학교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대학도 낙방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졸라는 세잔보다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림과 글이라는 다른 장르에 있던 그들이지만 졸라가 받는 스포트라이트와 사회적 인정은 세잔을 초라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가까웠던 사이였기에.

세잔은 자신의 그림이 아버지와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점차 소극적이고 삐뚤어진 성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동료 화가 르누아르가 “자네의 그림은 살아 있는 것 같네. 물체를 옮겨 그리는 것이 아니고 그림 속에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 있어”라고 극찬했을 때도 자신의 그림이 안 팔리니 위로의 말을 건넨다고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호의적 태도에는 자신에 대한 무시가 깔려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됐고 점차 예술가들의 모임에서도 소외되기 시작했다.

졸라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세잔을 예술가들의 모임에 자주 초대했으나 세잔은 괴팍한 행동과 태도로 다른 예술가들로부터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자신보다 이미 성공했거나 최소한 후원자가 있는 화가들을 보면 부러워했고, 그들의 말에는 동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뾰족하게 대했던 것이었다. 점차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세잔은 남들의 평가에 과민반응을 보였고,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 자신의 예술 세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에밀 졸라가 1886년 발표한 소설 『작품』은 세잔의 열등감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작품』은 인상주의 미술이 대두되던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 예술가들의 삶과 현실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예술가들이 겪는 창작의 고뇌와 불안한 삶을 클로드 랑티에라는 작중 화가의 피하지 못한 숙명과 비참한 말로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냈다. 주인공 랑티에는 에두아르 마네와 폴 세잔이 섞여 있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됐는데, 세잔은 이 글을 통해 졸라가 자신을 실패한 예술가로 낙인찍었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는 세잔과 졸라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다수 담겨 있었으며,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예술가는 졸라가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적은 글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 소설의 발간과 함께 세잔과 졸라의 인연은 끝나고 말았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다”


▎에두아르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879
세잔은 세상에 고립된 채 세상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고군분투했다. 이전까지 위대한 예술가라 불리는 화가들은 신화 속 인물이나 영웅, 혹은 귀족이나 왕의 초상화를 그렸었다. 여전히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작들이 인기 있던 시절, 정물을 그려서 이들과 겨루겠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세잔에게는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구성과 연출이 자유로운 사과는 예술가의 의도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대상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사과, 옆에서 본 사과, 위에서 내려다본 사과 등 시선을 모두 한 그림에 담아 여러 관점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이것을 통해 대상의 질서 자체를 바꾸는 것이 그림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사과는 구라는 입체적인 동그라미이고, 테이블은 사각형과 직사각형이 모인 육면체, 그릇이나 병 등은 원기둥이라는 기본 형태로 압축된다. 세상의 원리를 파악하려면 기하학적인 기본 형태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멀어진 세잔이 발견한 논리였다. 인간의 몸 역시 구와 원기둥으로 구성된 것이며 세상 모든 것을 쪼개어본다면 근본에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잔은 가족에게도 비밀로 한 채 오르탕스라는 여인과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소작농의 딸이었던 오르탕스는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 어려웠고, 자신의 직업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족 역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세잔은 끝까지 아버지로부터 무시를 당해야만 했다.

그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했던 만큼 자신의 초상화, 부인과 아들의 초상화를 자주 그렸는데, 인물화 역시 원, 원통, 육면체라는 기본 형태에 초점을 맞춰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오르탕스는 자신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닌 죽은 기하학 형태로 그렸음에 자주 화를 냈다고 하는데, 그만큼 세잔이 대상의 근본적인 원리를 이해하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잔은 생전에 아버지와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채 1906년 생을 마감했다. 그의 기본 형태에 따른 접근은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세잔은 1907년 피카소가 발표한 첫 입체주의 전시회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의 탄생에 평론가들은 환호했고, 그에 대한 피카소의 대답은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폴 세잔이다”였다. 지금 세잔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며, 세잔의 사과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빌헬름의 사과와 함께 인류의 4대 사과에 속한다.

꼭 인정받지 않아도 돼요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900
인정받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불행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한다. 비교를 잘하는 사람은 열등감도 잘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비교를 하는 사람 중에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미국 정신의학자 제롬 프랭크는 “모든 정신장애는 기가 죽어서 생기는 병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의 기를 죽이는 열등감은 정신건강에 매우 위협적인 요소이다.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이러한 열등감을 생성해낸다.

비교가 열등감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면, 비교 대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 대상이 이상적인 자아와의 비교인지,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열등감인지를 통해 스스로 건강한 신념을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공의 이상적 자아를 만들어 놓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교하는 사람들은 현실 자아가 못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준치를 설정해놓고 스스로를 비하한다. ‘나의 높은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나의 인생은 실패이다’라는 신념은 스스로가 만든 기준과 비교함으로써 현재에 더 좌절하게 만든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자아는 많은 사람이 우울증을 겪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헤밍웨이는 “남보다 뛰어난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자랑거리는 과거의 자신보다 뛰어난 자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비교해야 할 대상은 과거의 나 자신이고, 그보다 발전한 현재를 칭찬하고 바라봐주어야 한다. 도달하지 못할 이상적 대상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신에게 불필요한 열등감을 만들어낸다. 『탈무드』에 “사자는 모기를 두려워하고, 코끼리는 거머리를 두려워한다”는 말이 있다. 코끼리가 진흙 속에서 뒹구는 틈을 노려 그 귓속을 파고들면 거머리도 코끼리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비교하는 우리가 사용해야 할 것은 그런 무기이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마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하다면, 자신이 그 동안 외면했던 스스로의 장점을 목록화해 확인해보자.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약점이 있으며, 누구나 비장의 무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세잔은 결국 사과를 통해 이를 증명해냈다. 우리가 사용해야 할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기이다.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가천대학교 조소과 객원교수이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이다. 현재 플로리다마음연구소 대표로,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102호 (202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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