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11) 

무엇을 버릴 것인가-기회비용 

살아가는 과정에서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가장 효율이 높은 선택을 하게 되고, 삶의 과정에서는 선택하는 자에게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선택된다.

▎고갱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
여러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결국 어떠한 희생이 따르게 되는데 이는 ‘선택의 비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경제에서는 재화의 가치로 선택의 가치가 판단되겠지만, 꿈이나 인간관계에서 그 가치는 개인적인 주관에 따라 결정된다. 꿈이나 도전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입해도 마찬가지이다. 선택에 따르는 리스크를 어디까지 감행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포기의 대가가 달콤하지 않을 경우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은 자신의 삶의 가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구체적으로 설정될 것이다.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은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한 증권거래소에 다니고 있던 평범한 남자였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그림을 좋아했지만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주말에 시간을 내서 틈틈이 취미로 그리던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좋아했고, 비싼 그림은 아니지만 취미 삼아 틈틈이 그림을 사 모으는 컬렉터이기도 했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꿈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현실 앞에서 그냥 취미생활 정도로 머무르는 존재였다.

폴 고갱의 선택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
그러나 그림을 접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림에 대한 그의 애정은 열정으로 변해갔다. 젊은 나이부터 화가 반열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컸던 것이다. 안정적인 가정의 가장과 일, 그리고 꿈.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며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아버지나 남편으로서의 자신보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두게 됐다. 35세가 되던 해, 그는 돌연 가족들에게 전업화가가 되겠다는 선언을 한다.

고갱은 아내와 아이가 있는 안정적이고 익숙한 장소와 꿈이라는 가치의 크기를 비교해나갔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가치보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두는 선택을 하게 됐다. 그의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은 30대 중반이 되도록 자신이 만들어온 가정과 직장이었다.

35세에 증권거래소를 그만둔 고갱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친분을 쌓으며 인상주의 작가들과의 교류를 할 수 있게 됐고, 혁신적인 그림을 그려 파리를 뒤흔들겠다는 야망을 세웠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고갱이 그리려고 했던 혁신적인 미술의 방향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움직이는 듯한 카메라 앵글이 왜곡된 공간과 시점을 한 장면에 그려내고 있고,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은 구도와 불타오르는 원색의 붉은 바닥 색은 그동안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 사이에서 약속되어왔던 형태, 비례, 구도를 모두 거부하고 있다. 당시 유행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짧은 붓터치나 움직이는 듯한 빛의 포착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다. 고갱은 원시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방식의 새로운 미술세계를 열고 있었다.

그림의 내용은 창세기 32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강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천사를 만나게 되고 이 둘이 씨름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야곱은 몸이 좋고 힘센 남자였기에 천사와의 결투에서도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천사가 야곱에게 씨름 중단을 선언하고 야곱은 천사에게 자신을 ‘축복’해달라고 요구한다.

이 그림의 모티브는 야곱과 천사의 씨름이지만, 이는 인간과 신의 싸움, 인간과 사탄의 싸움, 혹은 인간이 자신과 싸움을 벌인 것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하다. 고갱은 당시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그에 따른 기회비용이 괜찮은지 고민하며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품고 불안해하고 있었던 만큼 그의 내적 자아들 간의 싸움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자신이 예술가로서 경제적 활동을 하거나 살롱에서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던 시절, 그에게 전업 작가로의 전향은 상당히 불안정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고갱 [타히티의 여인들] 1891
그런 그의 불안감이 확신으로 변하는 과정은 고갱이 타히티섬으로 떠나기 직전에 그려낸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그가 발걸음을 옮겨가면서 느꼈던 심리적 부담감을 고스란히 나타내면서도 자신의 예술 활동에 대한 믿음을 함께 담고 있다.

그는 예술이라는 것이 초월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중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림 속에는 갈등과 확신의 경계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고갱의 자화상이 있고, 왼편에는 자신의 작업물 중 하나였던 [황색 그리스도], 오른편에는 [그로테스크한 얼굴 형태의 자화상 항아리]가 배치되어 있다.

왼편에 놓인 예수님은 괴로워하고 있다. 독실한 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기 때문에 마음이 늘 무겁다. 고갱은 이 부분에서 자신의 모습을 읽었다. 고갱의 예술에 대해 신선하다며 작품을 지지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 없는 예술가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누구도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고갱은 예수님처럼 소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전부 바쳐 예술을 하겠다는 다짐을 그려 넣었다.

오른쪽 항아리에는 거침없고 꾸미지 않는 자신을 투사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무엇인가에 대한 갈망도 함께 담았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족도 버릴 수 있고 안정적인 직장 대신 불안정하고 고독한 예술을 선택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고갱은 자신이 느꼈던 예술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잠식했다.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그 선택의 결과가 외면당할 수 있다는 것을 대비한 것이다.

고갱의 마지막 질문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그는 더 새로운 예술을 위해, 더 하나뿐인 그림을 위해 유럽이 아닌 원시의 섬 타히티로 떠난다. 그곳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갔다. 유럽에서도 미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서 살아온 그에게 원시부족들과 어울려 삶을 공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고갱은 타히티 여인들의 삶을 여과 없이 그림에 담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고갱은 파리가 그의 원시적인 그림을 보고 가히 ‘혁신적’이라고 환호할 줄 알았다. 인상주의 화가의 짧은 붓터치와 부서지는 듯한 그림을 보고 새로운 그림이라고 이야기했던 대중이 그의 그림에 더 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칠고 투박한 그림들은 당시의 살롱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택한 길이었는데, 그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분명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여기에서 나아가 더 거칠고 환상적인 야생의 그림을 그려냈고, 다시 원시의 섬으로 떠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죽음이 가까워지던 해에 고갱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가면서 유언과도 같은 대작을 남기게 된다. 가로로 굉장히 긴 이 그림은 고갱이 힘든 시기에 그린 작품인 만큼 더 많은 질문과 고민을 담고 있다. 고갱은 이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 그림을 보게 될 관람객들에게 던진다.

고갱의 작품들은 처음 접했을 때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그림이 많은데, 그는 인물의 투박한 느낌을 살리면서 아주 단순하게 표현했으며 사람의 크기와 구도, 모습을 마치 꿈결 속에서 움직이는 한 순간을 포착하듯이 환상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강렬한 색상이 대비되는 배경들은 위아래 구분 없이 막연하게 펼쳐져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오른쪽에는 생명의 탄생을, 가운데에는 삶을, 왼쪽에는 죽음을 순차적으로 그려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흘러가는 시간들은 가끔 무섭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상되는 결말이지만 그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이며, 행동과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또 어떤 보상을 바라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와 죽음을 제외하고 인간은 모든 순간에 선택을 한다. 갓난아기부터 죽음까지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선택이 즐비하게 놓여 있고, 반복되는 선택의 과정은 삶을 채워나간다.

고갱은 이 작품에서 인간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또 사라지게 되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는 선뜻 답하지 못한 듯하다. 맨 왼쪽에 있는 노인은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들고,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어떤 열매를 따먹듯 모든 삶의 방향은 개인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따른 방향성은 삶의 주체인 자신이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고갱의 작품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군가는 열매를 따먹는 사람을 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죽어가는 노인을 볼 수도 있다. 자신이 지금 인생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자신은 어떤 사람이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잠시 멈추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가천대학교 조소과 객원교수이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이다. 현재 플로리다마음연구소 대표로,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101호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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