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력 뽐낸 ‘메이드 인 코리아’ 수술 로봇지난 3월 16일, 서울 서초구에 자리한 기쁨병원에선 복강경 로봇수술 100례(회) 달성 기념식이 열렸다. 탈장, 담석, 급성충수염(맹장) 수술 등 외과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기쁨병원은 담낭절제술과 충수절제술 등에 복강경 로봇을 이용해왔다. 이날 기념식 자리에는 병원 관계자뿐 아니라 해당 수술 로봇을 개발해 판매한 김준구 미래컴퍼니 대표가 함께했다. 지난 2018년 국내 최초로 복강경수술 로봇 ‘레보아이(revo-i)’를 출시한 미래컴퍼니는 미국 기업이 독점해온 국내외 복강경수술 로봇 시장에 당당히 ‘메인드 인 코리아’표 출사표를 던지며 업계를 놀라게 했다.1984년 창업한 미래컴퍼니는 국내 디스플레이 제조장비 분야에서 기술경쟁력을 인정받은 탄탄한 중견기업이다. 특히 ‘에지 그라인더’ 부문에서는 글로벌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창업 이후 ‘연구개발(R&D)을 통한 기술혁신’이라는 창업 이념을 이어온 미래컴퍼니는 업계를 대표하는 혁신기업으로 이미 이름이 높다. 창업 2세인 김준구 대표는 3D센서 모듈과 수술 로봇 등 신규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며 사업다각화와 안정적인 미래 먹거리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디스플레이 제조장비는 철저한 수주 사업입니다. LCD·OLED 같은 전방산업이 부침을 겪으면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죠. 2018년 매출 2134억원으로 최고 실적을 올렸지만, 이듬해 디스플레이가 최악의 다운사이클에 접어들면서 다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측가능한 신사업을 구상하게 된 배경입니다.”지난 2005년 코스닥 상장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2013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고(故) 김종인 대표는 상장 직후 디스플레이 산업이 불황에 빠지면서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 대표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며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첫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미 있는 일을 구상했다. 둘째, 에지그라인더처럼 후발 주자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진입장벽이 큰 사업, 마지막은 장비산업과는 반대로 인더스트리 사이클이 적거나 아예 없는 사업을 원했다. 마침 2005년 무렵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국내 최초로 로봇수술에 성공하며 화제를 모았다.“세브란스가 다빈치로 로봇수술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크게 보도됐어요. 아버님도 무릎을 치셨죠. 의료계에 있던 지인들과 논의한 끝에 수술 로봇을 개발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다빈치가 독점해온 시장이니 다른 경쟁자가 없다시피 했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니 수술 로봇 개발이 최고의 선택이라 생각했죠.”미래컴퍼니가 본격적으로 복강경수술 로봇 개발에 뛰어든 건 2007년부터다. 10년 뒤인 2017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임상시험을 마친 후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제조허가를 받았고, 2018년 첫 완제품을 생산해냈다. 개발부터 완제품 출시까지 꼬박 11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큰 장 열린 글로벌 수술 로봇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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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구조 벗어나 오픈 R&D로 승부독보적인 1등을 따라잡기 위한 후발 주자의 숙명은 차별화다. 비슷한 성능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만으로는 이미 시장을 선점한 기업을 따라잡기 어렵다. 김 대표는 레보아이만의 경쟁력으로 ‘오픈 R&D’를 내세운다.“로봇수술도 결국 숙련된 의사의 손길이 필수입니다. 한국 외과의사들의 실력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이죠. 로봇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로봇 자체는 물론이고 보조 도구와 운용체제(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R&D를 이어가는 게 우리의 강점입니다. 미래컴퍼니를 수술 로봇 제조사가 아닌 로봇수술 프로그램 회사로 포지셔닝하는 이유입니다.”김 대표는 “같은 수술이라도 의사마다 방식이 모두 다르다”며 “집도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새로운 인스트루먼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오픈 R&D 촉진을 위한 협력 시스템 구축도 미래컴퍼니의 전략이다. 수술 도구 개발에 앞서가는 글로벌기업들과의 기술협력을 말한다. 현재 김 대표는 미국을 비롯해 이스라엘, 일본, 유럽 등에 포진한 선진 헬스케어 기업들과 기술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들의 기술을 검증하고 그에 맞는 애플리케이션을 미래컴퍼니가 개발해 로봇화하는 작업이다.실제 의료 현장의 수술 실적, 즉 레보아이를 활용한 트랙레코드 확대도 풀어야 할 과제다. 외과수술의 경우 특히 클리니컬 데이터가 매우 중요한 잣대로 통한다. 갑상선 수술 전문의가 레보아이를 쓰고 싶어도, 이제까지 해당 진료과에서 수술 로봇을 활용한 사례가 없다면 선뜻 나서기 어렵다는 뜻이다. 외과수술의 대부분이 잡고 들고 자르고 꿰매는 작업이지만, 의사 입장에선 본인 진료 분야의 임상 데이터(clinical data)가 쌓여야만 안심하고 새로운 기술을 적용할 수 있다.레보아이 역시 허가 전 임상 과정에서 담낭절제술과 전립선절제술에 집중했다. 담낭절제술은 대표적인 외과수술 중 하나이고, 전립선절제술은 가장 어렵고 복잡한 수술이면서도 글로벌 시장 규모가 가장 큰 분야이기도 하다. 로봇수술 100례를 기록한 기쁨병원이 적극적으로 레보아이를 도입한 것도 해당 분야의 임상 데이터가 이미 충분히 쌓였기 때문이다.김 대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인과를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난소와 자궁 질환 등 부인과 질환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브란스병원과 진행 중인 부인과 관련 로봇수술 임상연구(실제 수술)도 마무리 과정을 밟고 있다. 이런 노력은 지난해 말 자궁내막증, 자궁근종 등 여성 전문 복강경 클리닉에 특화된 퀸즈파크병원에 레보아이를 공급하는 성과로 이어졌다.좁은 국내시장에서 벗어나 해외 공략에도 적극적이다.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에 처음 수출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러시아 최대 의료기기 전문 유통업체인 STOMOFF와 러시아 시장 내 독점 공급계약을 맺었다.-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이원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