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 장 프랑수아 레미네리스 

나폴레옹의 삶을 수집하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세상을 떠난지 200년이 넘었지만 수집가 장 프랑수아 레미네리스는 여전히 그와 함께 숨쉬고 있다

▎Jean-François Rémy-Néris © Nicolas Marszalek
영국 역사학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하는 정치적 결단이 있다.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 참패 후 백일천하를 끝내고 퇴위할 수밖에 없었던 나폴레옹! 유배 기간 중에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생을 마감한 나폴레옹(1769~1821)의 유골이 담긴 석관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프랑스에 양보한 것이다. 영하 10도로 유난히도 추웠던 1840년 12월 15일, 나폴레옹의 유해는 뇌이(Neuilly) 다리에서 개선문 아래를 지나 샹젤리제를 통과해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 돔 성당에 안장됐다. 백만 명이 넘는 프랑스 국민은 절망과 기쁨으로 뒤섞인 채 그를 맞았다. 8년간 교섭 과정을 거쳤기에 프랑스인들은 이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고 이를 성사시킨 루이 필립1세는 국민에게 큰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됐다.

제국의 가장 눈부신 승리를 상징하는 14개 동상과 16마리 말이 새겨진 길이 30m, 높이 10m 전차에 실린 나폴레옹의 석관을 바라보며 프랑스인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던 전쟁 영웅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세인트헬레나섬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센강 변에 나의 유해가 묻히기를’’이라며 간절히 프랑스를 그리워했던 나폴레옹! 그가 고국의 품에 돌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한 대포의 울림이 슬픔의 정적을 깨고 삭막한 겨울 하늘이 느닷없이 보랏빛이 되었듯이 프랑스인들의 나폴레옹을 향한 원망이 갑자기 광적인 애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삼색기를 흔들며 저도 모르게 “프랑스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는 『빛과 그림자(Les Rayons et les Ombres)』에서 그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얼어붙은 하늘! 순수한 태양! 오! 역사에서 빛난다! 승리를 거둔 장례식의 황제의 횃불! 영광으로 빛나는 아름다움과 무덤처럼 차가운 이날, 민중이 당신을 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나폴레옹 흉상 조각과 교황 비오 7세의 초상 사이의 쟝 프랑수아 레미네리스. © Nicolas Marszalek
프랑스에서는 1798년부터 시행된 병역의 의무가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 의해 1997년부터 폐지됐지만 프랑스 젊은이들은 직업군인이 되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파리를 산책하다 보면 느닷없이 작은 거리에서도 벽에 꽃다발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무명용사에 대한 정부의 배려이자 존경의 표시다. 해마다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식 때 군사 행렬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도 그들의 프랑스에 대한 자부심이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석관을 둘러싼 또 다른 6겹의 관에 겹겹이 쌓여 돔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약 50년 전, 6세의 어린 소년, 장 프랑수아 레미네리스(Jean-François Rémy-Néris)가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된 돔 성당을 방문했다. 사실 장 프랑수아의 가족과 나폴레옹은 그 어떤 관계도 없었다. 다만 장 프랑수아는 음악가였던 대모 덕분에 예술과 문화, 역사를 탐닉하기 시작했고 돔 성당을 방문할 때도 대모와 함께했다. 그날 소년에게 나폴레옹의 존재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박물관 가이드의 입에서 나오는 프랑스 역사를 빛낸 화려한 영웅의 업적들을 소년은 공기를 마시듯 모조리 삼켜버렸다. 그날 이후 나폴레옹은 그의 평생 길잡이가 됐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영토가 된 코르시카 출신으로 독립 운동가였던 가난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가난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은 식비를 줄여가며 책을 구해 읽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시저 등 영웅들의 전기를 즐겼는데 장 프랑수아도 역사와 전기를 탐독하며 성장했다. 화려한 전투 뒤에 번뜩이는 영웅의 날카로운 선택이 있었고 프랑스를 향한 변치 않는 애국심이 있었다. 나폴레옹을 향한 타오르는 열정은 장 프랑수아의 삶을 인도했다. 나폴레옹은 “훌륭한 정치는 국민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La bonne politique est de faire croire aux peuples qu’ils sont libres)’’라고 했는데 장 프랑수아는 그가 남긴 무수한 업적을 알게 되면서부터 자유를 느꼈던 것이 아닐까?

성당 방문을 마치고 기념품 코너에서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가 그린 ‘말 탄 장군의 그림(Officier de chasseurs à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 chargeant, 1812)’이 그려진 엽서를 사면서 장 프랑수아는 소망했다. 성인이 되면 그림 속 장군이 입은 제복을 갖고 싶다고…. 결국 30세가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의 소망을 실현했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에 그 군복을 입은 마네킹을 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의 군복 전문 재단사, 크리스티안 콜몽(Christian COLMONT)과의 만남은 그를 나폴레옹 시대로 인도하는 운명과도 같았다. 게다가 그는 장화, 투구 장식 등을 제작하는 다른 장인과도 협업하는 전문가로, 가히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탁월한 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장 프랑수아는 몸에 꼭 맞는 제복을 입게 됐다. 엽서 속 장군의 제복이 아닌 그가 프랑스인으로서 의무를 마친 해군 사령관 제복이었다.


▎Jean-François Rémy-Néris © Xe Escadron


프랑스 역사를 향한 열정이 오브제 수집으로


▎나폴레옹 시대 군인들이 사용했던 검과 총, 나폴레옹 초상, 황제비 조세핀의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 Eugène de Beauharnais의 초상과 그가 사용했던 오브제, 마리 루이즈 황제비가 낳은 나폴레옹의 아들, 로마의 왕( Napoléon II) 이 갓 태어나서 입었던 아기 옷, 나폴레옹의 가족들이 사용했던 오브제들. © Nicolas Marszalek
장 프랑수아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삼촌들은 1차, 2차 세계대전 중 전쟁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레지스탕스 당시에도 목숨을 걸고 활약했다. 겨우 19세였던 삼촌이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고 결국 독일군에 잡혀 수용소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또 다른 삼촌은 21세였는데 드골 장군의 군대에 런던에서 합류한 후 북아프리카의 비르하케임(Bir Hakeim)전투에 참가했다. 비르하케임전투는 프랑스의 혁혁한 승리였다. 또 다른 전쟁 중 사망한 이 삼촌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생존하고 있는 전쟁 영웅이었다. 게다가 총에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버지를 비롯한 생생한 가족들의 이야기는 장 프랑수아에게 애국심을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시대를 막론한 모든 전쟁과 군인에 대한 멈추지 않는 매력을 느끼게 했다. 역사에 심취할수록 여지없이 등장하는 영웅 나폴레옹은 소설의 주인공이었으며 모험가였다. 심지어 그를 에스코트했던 말 탄 경호 기수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프랑스 역사를 향한 열정은 나폴레옹 시대 전쟁 오브제의 수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초기 수집은 편지로 시작했다. 나폴레옹 당시 활약했던, 혹은 이름 없는 누군가의 편지를 통해 그 시대의 문화와 관습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고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워 매우 흡족했다. 게다가 당시 그가 일했던 파리의 증권회사는 드루오 경매회사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잠시 들러 경매에서 거래되는 오브제들을 쉽게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 시대, 전투에서 사용했던 칼을 수집할 기회가 왔다. 하나둘 칼을 수집하다가 점차 군인들이 사용하던 군용품으로 수집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 레고 장난감으로 병정놀이를 하고, 해마다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이면 여지없이 집에서 전쟁놀이를 홀로 즐기던 소년이 나폴레옹시대의 제군들이 사용하던 전쟁 무기들을 실제 구입하는 과정은 영웅 나폴레옹에 대한 흠모와 전쟁에 참가했던 가족들에게서 받은 감동, 예술사의 탐독, 그리고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드루오 경매장과의 잦은 인연들이 모여 이룬 결과였다.


▎나폴레옹이 여행시 사용했던 은식기들을 담았던 직사각형 마호가니 상자. Coffret de nécessaire d’argenterie de Bonaparte Premier Consul Circa 1801, 44 x 24,5 x 30 ㎝ © Michel Bury


그는 군대에서 사용했던 군용품 외에도 접시, 의복, 부채, 메달, 조각과 회화작품 등을 수집했는데 그것을 사용했던 인물들과 당시의 모습을 추측하게 했다. 그 상상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장 프랑수아는 주저 없이 역사 속 장소를 찾아가 그 인물들과 함께하는 감동적인 여행을 했다.


▎중국 국립박물관 순회 전시 중 중국을 방문한 장 프랑수아 레미네리스. © Xe Escadron


프랑스에는 역사의 재현을 직접 조직하는 ‘제10근위 기마사냥소대 협회(l’Association historique du 10e escadron des chasseurs à cheval de la garde)’가 있다. 우연히 협회에서 그가 구입한 제복을 입고 참가해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게다가 그의 유니폼은 기수 제복이었기 때문에 말을 타야 했는데 장 프랑수아는 승마에 열정을 가진 터라 흥미를 느꼈다. 초기에는 별 관심을 못 가졌지만 직접 전투를 재현하는 이벤트에 참가하면서 러시아,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과 대포소리, 말이 울부짖는 소리, 칼이 부딪치는 소리, 추위에 떨며 말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혼자서 상상하던 전투의 모습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현장감에 빠져버렸다. 게다가 폴란드, 이탈리아, 러시아, 영국, 독일 등에서 온 회원 5000여 명과 이 전투를 재현하면서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우정을 발견했다. 게다가 일주일 동안 재현되는 이 전투의 재현을 보기 위해 직접 오는 관중은 1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카우보이 장난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협회 회장직을 2년씩 세 번 역임했으며 회원들이 직접 나폴레옹 시대 군인들의 제복, 일반 시민들의 의복 등을 제작하는 등 나폴레옹 시대의 모든 문화를 재현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장 프랑수아 레미네리스와 제10근위 기마사냥소대협회. © Xe Escadron
장 프랑수아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즐긴다. 뜻밖에 중국 박물관 전시를 위해 수집품 대여를 제안했을 때 그는 소장품의 분실과 손상 등 모든 위험을 뒤로하고 단 며칠 만에 대여를 승낙했다. 그에게 수집가는 박물관과 같다. 수집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보존한 뒤 언젠가는 다른 세대에 전달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 수집가가 있다는 철학으로 소장품의 해외 전시를 기꺼이 반겼다.

모든 장르의 나폴레옹 수집품


▎Élève de l’atelier de Jacques-Louis David(1748~1825)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나폴레옹의 위업을 그린 [알프스산맥의 그랑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Bonaparte franchissant le Grand-Saint-Bernard(1800~1803) 작품을 다비드의 아틀리에에서 다시 제작한 작품. © Nicolas Marszalek
2019년 3월에 시작해서 2020년 3월까지 쿤밍, 구이저우, 다통, 정저우 등 중국 4개 도시의 국립 박물관에서 소개된 300점이 넘는 그의 수집품은 백만 명 넘는 중국 관람객을 흥분시켰다. 법률가로 일했던 시절, 잠시 중국을 방문했던 기억뿐이었던 그에게 이번 전시는 중국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유배 시절 “중국이 깨어나는 시대가 오면 온 세계는 흔들릴 것이다’’라고 했던 나폴레옹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장 프랑수아에게는 수집 초기부터 나폴레옹 관련, 심층적인 수집을 위해 아낌없는 조언을 해준 컨설턴트 타릭 부게리라(Tarik Bougherira)의 협조가 매우 큰 힘이 됐다. 이 중국 전시는 타릭 부게리라의 평소 조언에 더욱 귀 기울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미 나폴레옹과 그 여동생 카롤린과 남편 뮈라 장군이 사용했던 보석을 포함한 오브제와 예술품들,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 조세핀의 아들이 사용했던 물품들, 황녀 마리 루이즈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태어나서 입었던 아기 옷, 나폴레옹의 여행용품 등 중요한 수집품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중국 전시를 시작했던 3년 전부터 특히 예술품 오브제를 수집해왔다.

타릭 부게리라의 제안으로 수년 동안 기다렸던 작품이 최근 그의 수집품이 되어 장 프랑수아는 벅찬 희열에 빠져 있다.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나폴레옹의 위업을 그린 ‘알프스 산맥의 그랑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Bonaparte franchissant le col du Grand-Saint-Bernard), 1801~1803’를 다비드의 아틀리에에서 다시 제작한 작품으로 구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작품은 자신의 이름을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한니발(Annibal)과 같은 역사 속 위대한 영웅들의 이름과 함께 돌에 새기며 알프스를 건너는 나폴레옹을 보여주고 있다.


▎나폴레옹의 중국 국립박물관 전시. © Nicolas Marszalek
장 프랑수아의 수집품들은 나폴레옹에 열정을 지닌 다른 수집가들이 단 한 가지 장르의 수집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는 이런 다양성을 여전히 유지하는 동시에 나폴레옹과 그의 가족들이 직접 사용했던 오브제와 조각, 그림 수집에 앞으로의 미래를 걸고 있다.

※ 박은주는… 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2104호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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