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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33) 대립과 화해의 대일 교류 역사 

 

코로나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받은 반도체 공급망이 회복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 협력’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지난해 12월, ‘Semicon Japan 전시회’에 참가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매년 규모가 축소되던 전시회가 코로나 팬데믹 3년이 지나면서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일본 경제산업국 과장이 정부를 대표해서 참가하던 전시회에 기시다 내각총리대신이 참석했다. 요즘 일본 텔레비전 대담에서는 ‘일본의 반도체 부흥’이란 주제가 단골로 다루어지고 있다. 반도체에 무심했던 일본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는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라는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수많은 기업이 일본산 소재, 부품, 장비를 공급받지 못해 제품 생산이 중지될 수 있다는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일본산 이외의 대체공급선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일본 내에서도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인해 한국의 대일 수입대체가 많아지자 ‘통상정책의 흑역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두 나라의 교역만 10%가량 줄어드는 역효과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1991년 직장 생활 초년 시절 일본 상사맨과 미팅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강렬했던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 상사맨은 내가 만난 첫 번째 일본인이었다. 깔끔한 옷차림, 세련된 매너, 풍부한 비즈니스 지식이 인상 깊었다. 1970년대 미군 PX의 일제 전자제품, 1980년대 소니 워크맨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일본의 이미지는 깔끔하고 세련되면서 얄미울 정도로 강한 전자 대기업들이 대변했다. 내 학창 시절 소니 워크맨과 샤프 전자계산기는 모두가 갖고 싶어 하던 로망이었다.

1980년대 후반 일본 반도체는 전 세계 시장의 80%까지 차지했다. 전자산업에서 일본은 ‘넘사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웬만한 대기업들은 일본인 고문들을 모시고 기술을 배웠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전자업체 간부들이 “이제는 일본 회사들과 해볼 만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1970년대 이후 30~40년간 세계 전자산업을 주름잡던 일본 전자기업들이 디지털경제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경쟁력이 떨어진 일본 반도체 팹 수십 개가 문을 닫았다. 미국 팹리스와 대만 TSMC 같은 파운드리팹이 뜨면서 독자적으로 설계에서 생산까지 했던 일본의 IDM 팹들이 경쟁력이 떨어져 계속 문을 닫은 것이다.

중고 장비를 사고파는 우리 회사에는 중고 장비를 구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특히 일본을 대체하며 떠오르는 신흥시장인 대만, 중국, 한국, 동남아에서 성숙 공정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중고 장비를 찾는 회사가 많아졌다. 일본에서 반도체 중고 장비 수만 대를 사서 한국, 중국, 대만, 싱가포르, 미국에 팔면서 회사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지난 20여 년간 수십차례 일본을 오가며 일본 전자업계의 많은 비즈니스맨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개인적으로 일본 장사꾼들이 편하게 느껴졌다. 보통 일본 출장을 가면 작은 호텔에서 묵어 불편하기도 하지만 일본 음식이 입에 잘 맞았다.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 중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고 정서적으로도 이해하기가 쉬웠다. 반면에 새롭게 거래할 때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아야 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외국 기업에 제품을 파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중고 장비를 살 때는 일본 법인을 세우고 나서야 직접 거래할 수 있었다.

일본과 한국 반도체의 흥망성쇠 뒤에는 반도체 상업화 기술을 처음으로 개발한 세계 최강국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일본 반도체산업을 세계 최고로 키워줬고, 또 주저앉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시대가 시작되자 미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전국인 일본을 내세워 소련과 중국을 견제했다. 1951년 AT&T 자회사인 웨스턴일렉트릭이 미국 공정경쟁당국의 독점규제로 인해 일본 기업들에 반도체 특허를 공개한 이후 일본 기업들은 1980년 대까지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의 반도체 기술을 도입한 일본의 신생기업 소니, 샤프 등은 트랜지스터라디오와 전자계산기 등 당시로는 첨단 전자제품을 개발해내면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엔 일본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80%를 차지하면서 미국 기업의 생존을 위협했다. NEC를 필두로 Toshiba, Hitachi, Fujitsu, Mitsubishi, Matsushita(Panasonic) 등은 D램 등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다. 결국 최초 D램 업체인 인텔은 1984년 D램 산업을 포기하고 CPU(중앙처리장치)로 사업을 전환했고, 일본에 반도체 특허를 제공하던 RCA는 1986년 문을 닫았다.

일본 천하였던 반도체 시장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전시된 국보 반가사유상.
1947년 트랜지스터 개발 이후 1980년대 이전까지 반도체 시장은 미국 기업이 장악했다. IBM, Texas Instruments, Motorola, Intel 등 미국 회사와 Philips, Siemens 같은 유럽 회사들이 시장을 선도했고, 일본 회사 중에는 Hitachi 정도가 두각을 나타냈다. 요즘 한국이 자랑하는 DRAM 메모리도 1971년 Intel이 1Kb 용량의 DRAM을 발명한 데서 시작했다.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은 어느새 ‘일본 천하’가 됐다. 약 40년 전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반도체산업의 주도권을 일본 기업들에 내줄 경우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위상이 약해지고, 국가경쟁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반도체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인 동시에 수천, 수만 개 글로벌기업이 경쟁하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이다. 디스플레이, 태양광, LED, 배터리, 인공지능 등 다양한 첨단 산업기술을 파생시킬 수도 있다. 각종 최첨단 R&D 투자는 물론 연간 100조원 넘는 설비투자가 이루어진다. 특히 미사일, 전투기 등 최첨단 군사장비 개발과도 연관성이 높다. 2018년부터 트럼프와 바이든이 중국 반도체산업을 압박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위기감이었을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 반도체 기업을 살리기 위해 일본 정부와 기업에 엄첨난 통상 압박을 가했다. 미국 언론은 ‘제2의 진주만 공습’에 비유하며 미국 정부의 강공에 힘을 실어줬다. 10년 넘게 이어진 통상 압박 끝에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1990년 대 중반에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아 왔다. 1989년 전 세계 반도체 매출 톱 10 기업에 NEC, Toshiba, Hitachi, Fujitsu, Mitsubishi, Matsushida 등 6개 기업이 올랐으나 2022년 현재 일본 기업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일본 기업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Intel, Micron, Qualcomm, Nvidia, TI, AMD 등 미국 반도체 회사,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의 TSMC가 올라왔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짧은 역사와 열악한 환경에서 운까지 따르면서 단기간에 세계 정상에 올라섰다. 1960년대 미국 반도체 기업 Fairchild와 Motorola의 후공정을 맡으면서 시작된 한국 반도체산업은 1974년 Motoloa 출신의 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한국반도체가 부천에 최초의 전공정 팹을 지었다. 1983년에는 삼성전자와 현대전자가 D램 사업에 진출했다. 1986년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반도체가 위축되고 한국 기업에는 천운이 따랐다. 1990년을 전후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하고 사람들을 많이 뽑기 시작했다. 삼성, 현대, LG가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주춤거리는 일본 기업들을 보고 과감하게 메모리산업에 베팅을 한 것이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한국 기업들은 사운을 걸고 과감하게 투자했다. 반도체 1, 2세대들은 지금 MZ세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하고 맹렬하게 일하며 일본 기술을 따라잡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 대만, 미국의 경쟁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메모리 반도체산업의 패권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한국만 열심히 올라온 것은 아니다. 대만은 TSMC를 중심으로 한국 못지않은 반도체 파운드리 생태계를 구축했고, 미국은 팹리스, 소재, 부품, 장비를 중심으로 여전히 반도체 생태계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도 소재, 부품, 장비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쌓아온 세계적인 상업적·공업적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이 반도체에 필요한 다양한 공급망을 국산화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개선된다면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서 공급망이 탄탄해져서 최근 몇 년간 심각한 위기로 거론되는 글로벌 공급망 불안을 타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경쟁과 협력의 균형점 찾아야 하는 한일관계


▎48년만에 처음으로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 재팬’에 참석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지난해 말, Semicon Japan 전시회를 마치고 도쿄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일본의 고대 문화재들을 둘러보면서 한국의 박물관에서 봤던 문화재들과 너무 비슷한 것이 많아 깜짝 놀랐다. 백제, 신라, 가야의 문화재와 유사한 문화재들은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이 박물관에는 일본의 청동 반가사유상과 백제의 청동 반가사유상이 전시돼 있었는데, 두 불상은 그시대 활발했던 한일 교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 유럽의 무역선들이 일본을 찾은 이유는 일본에서 은을 사기 위해서였다. 16세기 이전까지 일본에는 제련 기술이 없었고 은 생산량도 미미했다. 일본에서는 그전까지 광석을 배에 싣고 조선으로 건너가 제련해서 은을 가져갔다. 그러나 조선의 은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지자 일본은 유럽 무역선들을 통해 국제 무대에 데뷔하게 됐다. 당시 첨단기술이었던 은 제련 기술은 에도시대 일본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은 이와미 은광에서 채굴한 은을 팔아 임진왜란을 준비했다. 당시 세계적인 규모였던 이와미 은광은 1923년 페광될 때까지 400년 동안 일본과 유럽을 잇는 일본 경제의 선봉장이었다.

백자를 만드는 도자기 기술도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의 도공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임진왜란 직전, 16세기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는 조선제 막사발을 하나 주면서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시바타 군대를 복속시켰다. 조선의 다완을 탐냈던 일본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는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조선의 도공을 데려가 도자기 수출로 돈을 번 세력들은 그 돈으로 철선과 대포를 사서 메이지유신에 성공했다. 임진왜란 기간에 ‘일본 도자기의 신’이라 불렸던 이삼평(李參平)을 비롯해 남원, 김해, 웅천 등지에서 조선 도공 400여 명이 납치되고 수십 년간 쓸 백자토까지 약탈됐다. 도자기를 파손한 왜군에게는 즉결 처분이 내려졌을 정도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도자토, 기술, 기술자가 모두 조선의 것이고 불만 일본 것이라는 의미에서 ‘불뿐만’이라는 뜻의 ‘히바카리’라는 이름이 도자기에 붙여졌다. 이처럼 일본은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인 자기 생산기술을 임진왜란을 통해 확보했다. 이후 17세기 일본의 도자기 기술과 생산량은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산지 아리타 역사는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만에 있는 TSMC 공장.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도자기가 가져온 것임을 우리 아리타 마을 주민은 명심해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급격히 이루어진 한국의 산업화도 일본을 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한국 옆에 일본이란 나라가 없었다면 한국이 산업화를 이루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이 들여온 서구 문물들은 주로 일본을 통해서 수입되었다. 반도체 기술은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에서 그 기술을 배워왔다. 한국이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에 일방적으로 수혜만 입은 것도 아니다. 한일수교 이후에 일본과의 무역역조는 한국에도 큰 부담이었지만,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로 한국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산업화는 일본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 한국과 일본은 수교 이후 호혜적인 성장을 이루어왔다. 미중 반도체 전쟁이 격화되는 이 시기에 한국과 일본은 또 다른 갈림길에 놓여 있다. 두 거인 사이에서 작은 꼬마 둘이 서로 싸운다면 꼬마들만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표만 바라본다. 기업인들은 이익만 바라본다. 이제는 한국과 일본이 미래를 바라보며 정치와 경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302호 (202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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