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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생각 여행(38) 만나고 사랑하고 관계하라 

 


▎스팀보트 마을에서는 겨울올림픽 출정식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출전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한다.
말갈기가 거의 눈 속에 파묻힐 정도였다. 카우보이가 말을 몰아 하얀 떡가루 같은 눈 속을 달리는 멋진 표지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유럽에서 비행기에 탑승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발견한 항공사 잡지였다. 부드러운 눈가루(powder snow)가 말 주위로 날아가는 장면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사진이었다. 궁금해서 관련 기사를 읽어보았다. 사진을 찍은 곳은 미국 콜로라도주 스팀보트(Steamboat)라는 마을이다. 번쩍하고 옛 기억이 떠올랐다. 30여 년 전에 캘리포니아은행 서울지점장이었던 미국인 은행가와 스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이다. 그는 내게 “스키를 좋아하면 콜로라도의 스팀보트 스키장을 꼭 한번 가보세요”라고 말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멋들어진 사진과 기사를 보며 그 은행지점장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호기심이 충천(?)해 ‘스팀보트에 꼭 가봐야지’ 하고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때마침 1988년 여름올림픽 이후 30년 만인 2018년, 우리나라에서 제23회 겨울올림픽이 2월 9일부터 25일까지 강원도 평창 등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의미 있는 겨울올림픽이었다. 그해 1월, 미국 캘리포니아 출장 계획이 잡혔다. 업무를 마치고 드디어 스팀보트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콜로라도 덴버까지는 항공편으로 이동하고, 덴버에서 스팀보트까지는 자동차로 로키산맥 줄기를 4시간가량 달려서야 도착했다. 미국인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은 지 거의 30년 만에, 항공사 잡지를 보며 가보겠다고 결심한 스팀보트 마을에 오니 오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마을 광장에는 카우보이가 챙이 넓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스키를 타는 역동적인 모습의 동상이 겨울 스키 고장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스키를 짊어지고 광활하게 펼쳐진 로키산맥의 풍광을 보며 정상에 올랐다. 스팀보트 지역 눈 상태는 자연설이 많이 내려 쌓인 파우더 형태다. 따라서 스키를 탈 때 무릎까지 쌓인 눈가루가 밀가루처럼 스키 양옆으로 퍼져나가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멋지다. 우리나라에서 항상 접하는 일반적인 눈과는 느낌이 무척 다르다. 파우더 스노에서 타는 스키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가루눈’이라고도 부르는 건설(Dry Snow) 파우더는 기후 여건상 우리나라 스키장에서는 만나기 힘들다. 대부분 습설(Wet Snow)이기 때문에 설상차로 슬로프를 깔끔하게 다듬는 정설 작업을 한 후에 스키를 탄다. 따라서 파우더 상태의 자연설 스키를 즐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팀보트에서 파우더 스노를 가르며 달리는 즐거움은 오랜 기다림을 보상하기에 충분했다. 슬로프 양옆으로 늘어선 전나무와 자작나무 숲속에서 나무 사이로 자연설 스키를 타는 즐거움은 환상적이다. 우리가 보통 타는 카빙 스키는 눈 속에 잘 빠지기 때문에 가루 모양으로 내리는 파우더 스노에서 스키를 탈 때는 올마운틴 스키나 파우더 스키처럼 폭이 넓고 길이가 긴 스키를 이용해야 한다.

30년 전 만남에서 시작된 스키 여행


▎웅장한 로키산맥에 펼쳐진 스팀보트의 스키 슬로프. 멀리 아래 있는 사람들이 점처럼 작게 보인다.
하루 종일 드넓은 로키산맥 스키장에서 파우더 스키를 즐기고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 이곳저곳에 있는 선술집에서는 땀 흘려 스키를 마친 사람들이 모여 맥주와 칵테일을 즐기고 있었다. 쌀쌀한 겨울이지만 스키를 벗어놓고 야외 의자에 앉아 한잔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는 것은 종일 스키를 탄 뒤풀이로 최고의 순간이다.

저녁이 되어 날이 어둑어둑해지니 수많은 스팀보트 마을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광장을 거의 꽉 메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어두워진 마을 광장 양쪽에는 거대한 크기의 대형 전광판이 준비돼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겨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환송하기 위한 마을 행사란다. 스팀보트는 역대 겨울올림픽에서 수많은 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아마도 올림픽 메달을 가장 많이 딴 마을이라고 자부하는 자리였으리라.

전광판에는 역대 겨울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역주하는 멋진 스키 경기 장면들이 연도별로 등장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불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열렬히 환호했다. 참 멋진 장면이었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우연히 찾은 스팀보트에서 이렇게 멋진 올림픽 출전 행사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도 이렇게 멋진 출정식을 열어 마을과 지방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선수들의 사기를 크게 높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전통이 쌓여서 훌륭한 문화가 되고 마을을 넘어 온 나라 국민의 마음이 통합되고 훌륭한 인재가 양성될 수 있을 것이다.

웅장한 로키산맥 줄기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인생과 사업에서 성공의 시작점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생각해온 결과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았다. ‘성공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혼자만의 노력으론 부족했고, 소중한 만남이 있었기에 모든 일이 가능했다는 생각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만남을 돌이켜본다. 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육군사관학교 입교를 일주일 앞두었을 때 담임을 맡으셨던 정운택 선생님께서 댁으로 초대해주셨다. 정성스럽게 차린 저녁상을 앞에 두고 “육사에서 학업을 성공적으로 잘 마치고 나라를 위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제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던 선생님께 큰절을 올리고 스승님 말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약속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했던 제자에 대한 스승님의 큰 기대는 청년 시절 부딪혔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됐다. 그리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육사를 졸업할 때 대표화랑상을 수상하여 육사의 백년탑에 이름을 새길 수 있었다.


▎나무 사이로 즐기는 자연설 스키는 겨울 여행의 짜릿한 즐거움이다.
시간이 흘러 뉴욕에 주재하면서 현지법인장을 할 때 재미 중앙고등학교 동창회의 초청으로 정운택 선생님이 뉴욕을 방문하셨다. 이번에는 내가 선생님을 뉴욕 집으로 모셔 극진히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육군 대위 시절, 전역을 결심하고 고민되는 마음을 의논하기 위해 소대장 때 직속 중대장이셨던 강창희 소령을 찾아갔다. 강 소령님은 일관성 있는 칸트의 삶과 변화를 추구하는 마오쩌둥의 삶의 방식을 조언해주셨다. 결국 나는 변화의 삶을 선택했다. 세월이 흘러서 강 선배님도 국회의원을 여러 번 지낸 후 국회의장이 되셨다. 여의도 국회의장실에서 칸트와 마오쩌둥의 이야기를 거의 40년 만에 다시 나누며 옛 추억을 더듬었다. 칸트의 삶처럼 육사 출신으로서 변화 없는 직업군인의 길을 추구하던 강 의장님도 결국 정치인으로 거듭나 변화된 삶을 살았다.

나 역시 만 서른 살 나이에 뉴욕 현지법인장으로 부임해 5년 동안 세계경제의 중심지에서 글로벌한 사업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기회를 만들어주고 사업상 배수진의 극기를 가르쳐주신 이영기 전 유원그룹 부회장님이 제공해주신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분이 내게 주셨던 뉴욕 현지법인장의 기회가 없었다면, 장수 CEO라는 오늘의 경력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부회장님은 나를 평생 동안 경영자로 살아가게 한 인생의 은인이다.

좋은 만남이 곧 좋은 인생


▎카우보이가 스키를 타는 역동적인 모습의 동상. 스팀보트가 겨울 스키 마을임을 상징한다.
세계 최대 펌프 기업인 덴마크 그런포스그룹과 인연을 맺고 한국에서 책상 하나 놓고 맨주먹으로 ‘무(無)’에서 출발한 창업 CEO로서 25년 넘도록 경영을 맡았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3개 회사와 3개 공장을 세웠고, 대만과 일본 그런포스 회장과 이사(Board Member)를 겸임하는 등 큰 보람이 있었다. 글로벌 무대에서 협상을 통해 해외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를 유치하고, 공장을 건설하여 고용을 창출하고 인재를 양성하면서,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로컬 스탠더드 산업 수준을 글로벌 스탠더드까지 견인한 것은 경영자로서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었다.

25년이 넘도록 글로벌경영에 참여하면서, 닐스 듀옌슨 그런포스그룹 회장에게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배웠다. 2001년 9월 11일 저녁, 출장 중이던 덴마크의 작은 도시 실커보그의 한 식당에서 닐스 듀 옌슨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날 낮, 복도에서 마주친 글로벌 CEO 제이 제이 매드슨은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불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농담이 지나친 것 아닙니까”라고 반응했지만, 그것은 고약한 농담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TV를 보고는 충격에 빠졌다. 불타고 있는 세계무역센터 가까운 곳에서 아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딸도 몇 블록 떨어진 뉴욕대학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스런 마음을 한편에 숨기고 세계 판매담당 소렌슨 수석 부회장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닐스 듀 옌슨 회장이 그 작은 식당을 찾아내 전화를 한 것이다. 그는 “뉴욕에 있는 아들과 딸 소식을 확인했느냐”고 물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전화에 감동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포스그룹에서 25년 넘도록 CEO로 경영에 임했다. 닐스 듀 옌슨 회장과의 만남은 글로벌 경영자로서 성숙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즐거우나 슬프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해온 중고등학교 시절 꼬마 친구들과 육사 동기생들은 평생 감성과 이성을 함께 나누어온 막역한 친구들이자 인생의 방패 역할을 해주는 동지들이다. 40년 지기인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과는 18년간 일어와 중국어를 함께 공부했다. 평생 우정을 나누는 친구다. 마음도 배움도 함께 나누며 지금도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


▎거대한 로키산맥을 배경으로 휴식을 즐기며 찍은 인증샷.
지난 늦가을에는 50년 만에 소중한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사관생도 시절 만나 교류했던 김아가다 수녀님이다. 초급 장교 시절 급성간염으로 고생할 때 명동 성모병원의 간호사이셨던 아가다 수녀님의 극진한 간호와 도움으로 완쾌한 덕에 평생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그 후 수녀님은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났고 필자는 뉴욕 주재원으로 떠났기에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지난가을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용산성당에서 귀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감사하고 소중한 50년 만의 재회였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바로 옆에 너무도 소중한 만남들이 있었다. 사랑을 주고받으며, 믿음을 공유하고 소망을 함께 꿈꾸는 만남들이다. 평생 크고 작은 경영자들의 모임에 참석해 소중한 분들과 만남을 이어오며 재미있고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있다.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인생을 살면서 소중한 성공의 시작점은 결국 ‘만남’이었고, 그 만남에서 비롯된 ‘관계’였음을 깨닫는다.

하버드대학에서 85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진행하고 있는 ‘성인 발달 연구’에 따르면, 인생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따뜻하고 의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라고 한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좋은 관계를 이루어나가야 한다. 잘못된 만남으로 평생 그릇된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해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좋은 만남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만들고 자신을 넘어서는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누구를 만나고 있을까? 그 만남은 우리 인생에 어떤 무늬를 그려갈까? 성공은 바로 그 만남에서 시작된다!

※ 이강호 회장은… PMG, 프런티어 코리아 회장. 덴마크에서 창립한 세계 최대 펌프제조기업 그런포스의 한국법인 CEO 등 37년간 글로벌기업의 CEO로 활동해왔다. 2014년 PI 인성경영 및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립했다.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다수 기업체, 2세 경영자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 코칭을 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했다.

202302호 (202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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