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

[챗GPT가 촉발한 AI 혁명, 급변하는 흐름 읽기] 류수정 사피온 대표 

소프트웨어 품은 AI 반도체 

노유선 기자
SK그룹 산하 ICT 계열사 3사가 공동 투자·설립한 AI 반도체 설계업체 ‘사피온’이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2020년 국내 최초로 서버용 AI 반도체 개발에 성공한 사피온은 연내 ‘추론용 AI 반도체’를 출시할 예정이다. 챗GPT 등장에 따른 AI 열풍으로 AI 반도체 수요 역시 급증한 상황에서 사피온의 신제품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류수정 사피온 대표가 자사 AI 반도체 ‘X220’을 들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성능 테스트 대회 ‘엠엘퍼프(MLPerf)’에서 미국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 ‘A2’보다 2.4~4.6배 높은 성능을 기록한 AI 반도체가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AI 반도체 팹리스(설계전문업체) 사피온(SAPEON)의 첫 상용화 제품 ‘X220’이다. 업계 최강자 엔비디아를 압도하는 기술력을 가진 이 회사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실리콘밸리 기반 외국계 스타트업으로 착각하기 쉬운 사피온은 국내 최고 AI 프로세서 전문가로 불리는 류수정(52) 대표가 이끄는 한국 토종 기업이다. SK텔레콤과 SK스퀘어, SK하이닉스 등 3개사가 총 800억원을 공동 투자해 설립한 사피온은 2021년 SK텔레콤에서 분사했다. 2020년 말 ‘X220’을 선보였고 올해 ‘X330’, 내년에 ‘X340’과 ‘X350’이 출시될 예정이다. 류 대표는 “‘X220’은 한국 최초로 상용화된 서버용 AI반도체”라며 “구글, MS, 메타,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등 산업계와 학계의 AI 전문가들로 구성된 엠엘퍼프라는 공신력 있는 대회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았다”고 강조했다.

미국 조지아공대(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전기컴퓨터공학 박사 출신인 류 대표는 15년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에서 디지털 신호 프로세서(DSP)와 모바일 GPU를 개발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객원교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AI·소프트웨어(SW)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고 지난 2021년 SK텔레콤에 합류했다.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학회 ‘ISSCC’의 머신러닝 분과 커미티 멤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총 10명 중 류 대표를 포함한 한국인은 단 3명이다. 임석환 삼성전자 부사장도 이곳에 속해 있다.

지난 3월 13일 성남 판교에 있는 사피온코리아에서 류 대표를 만났다. 최근 그야말로 열풍인 ‘챗GPT’에 대해 국내 권위적 AI 전문가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다. MS가 투자한 오픈AI(OpenAI)가 지난해 11월 생성형 AI챗봇 챗GPT를 공개하자 관련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추세다. 신기술의 등장을 마냥 반길 일인지, 메타버스처럼 금세 열풍이 식어버릴지, AI 반도체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물었다.

무어의 법칙 뛰어넘는 AI 발전 속도


AI 반도체는 대용량의 복잡다단한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연산하는 하드웨어로, 이른바 AI의 두뇌로 불린다. AI 반도체를 생산하는 사피온 입장에선 챗 GPT 열풍이 기꺼울 수밖에 없다. 류 대표는 “AI는 빠른 데이터 처리가 기본이기 때문에 고성능 하드웨어가 필수적”이라며 “중앙처리장치(CPU)와 GPU보다 성능이 높은 AI 반도체 수요 역시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하지만 챗GPT의 현 기술력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스마트 라이어(smart liar)’일 때가 많아요. 너무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거든요. 챗GPT가 내놓는 답변의 근거는 ‘사실’이라기보다 수집된 정보의 모자이크에 불과합니다. 정보가 논리적으로 나열돼 있지만 신뢰성은 부족해요. 기계가 양심의 가책이 있을 리 없죠. 챗GPT의 결과물을 검증할 기술적·사회적 보완 프로그램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챗GPT가 촉발한 AI 열풍의 지속성에 대해선 “이미 급격한 확산 국면에 접어들었다”며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메타버스처럼 하나의 트렌드로 급부상하다 주춤할 수 있다는 우려에는 반대 의견을 확실히 밝혔다. 류 대표는 “기술 성숙도나 유용성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며 “‘메타버스 속 아바타가 인간 대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모호하지만, 챗GPT를 비롯한 AI 기술은 업무 방식의 변화를 이끌 만큼 활용도가 높다”고 강조했다.

현재 AI 기술은 자율주행, 데이터센터, 사물인터넷, 미디어, 보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류 대표는 향후 AI 시대에 언어 모델(Language Model·LM)의 비중이 상당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앞서 지난해 12월 열린 ‘제5회 반도체공학회 종합학술대회’에서도 AI 적용 모델 증가율이 무어의 법칙(반도체칩 저장용량이 2년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법칙)을 뛰어넘고 특히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NLP) 모델의 연평균 성장률은 40배가 넘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비록 AI 기술이 아직 태동기이긴 하지만 최근 5년간 언어 모델은 꺾임 없이 꾸준히 성장해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챗GPT 서비스 운영 시클라우드나 AI에 들어가는 컴퓨팅 자원과 전력소모량이 상당하리란 관측이다. 류 대표는 챗GPT로 대변되는 자연어 처리 모델은 점차 유료화되고 그 적용 분야 역시 정형화된 업무에 한정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전력소모량에 따른 환경문제와 비용 이슈는 필연적”이라며 “전력 대비 성능이 월등한 기술을 찾는 글로벌 수요가 급증할 전망”이라고 단언했다.

‘전력 대비 높은 성능’이 바로 사피온의 목표다. 현재 글로벌 AI 시장은 GPU 중심으로 재편돼 있다. 이를 사피온 AI 반도체로 대체하겠다는 포부다. 자율주행, 자연어 처리, 이미지 인식 등이 핵심 사업 분야다. 사피온은 이 분야에서 고성능·저전력을 자랑하는 제품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AI 풀 스택(fullstack)’ 전략이 사피온의 무기다.

“사피온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개발 중입니다. 바로 SDK(Software Development Kit)로 불리는 AI 반도체 소프트웨어 개발도구입니다. AI 반도체가 잘 작동하려면 최적화된 환경이 필수적인데, SDK가 이를 돕습니다. 다양한 하드웨어와 연동이 가능해 고객사의 편의성과 범용성을 높여주죠.”

올해 하반기, X330 출시 예정


▎사피온의 첫 상용화 서버용 AI 반도체 ‘X220’.
사명 사피온은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인류)와 영겁(Aeon)의 합성어로, 모두에게 보편적이며 지속가능한 AI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합한 ‘AI 풀 스택 전략’ 기획 의도와도 부합한다. SK그룹 산하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정보통신기술) 3사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회사인 만큼, 사피온 제품은 SK 계열사 내부 시장에서 운용 실적(track record)과 성능 검증 자료를 확보한 뒤 글로벌 시장에 나간다.

초창기에는 본사를 미국 실리콘밸리에 두고 하드웨어 생산을 대만 TSMC에 맡겨 ‘사피온 제품을 국산이라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제기됐다. 이에 대해 류 대표는 “국내 AI 에코 시스템이 취약한 상황에서 글로벌 시장에 곧바로 진입하기 위해선 미국이 본사 위치로 적합했다”며 “현재 하이퍼스케일러(대규모 클라우드 서비스 공급업체·Hyperscaler) 대부분이 미국에 모여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하이퍼스케일러 진입이 사피온의 지향점”이라고도 했다.

사피온은 첫 번째 상용화 제품인 ‘X220’과 올해 하반기 출시 예정인 ‘X330’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로 대만 TSMC를 택했다. 내년 출시 예정인 자율주행 전용 ‘X340’은 삼성전자 공정으로 생산된다는 설(說)도 있다. 이에 대해 류 대표는 “X340의 경우 사피온은 NPU(신경망처리장치) IP(설계)를 제공하지만 칩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파운드리를 한 곳에만 집중하면 생각하지 못한 위험 요소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파운드리를 분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는 것이 업체 측 설명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X340’과 ‘X350’에 앞서 ‘X330’이 출시될 예정이다. ‘X330’은 ‘X220’보다 성능이 4배 이상 뛰어난 추론용 AI 반도체고, ‘X350’은 에지 디바이스(Edge Device·직접 데이터를 처리하는 가장자리 장치)를 위한 추론용 칩이다. 사피온의 서비스 영역이 자동차, 보안, 미디어 등으로 확장하는 모습이다. 류 대표는 출시 예정인 ‘X330’과 ‘X350’이 모두 ‘추론용 AI 반도체’라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딥러닝은 크게 학습과 추론, 두 가지로 나뉩니다. 특히 추론은 일정 시간 안에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레이턴시(latency·지연시간)를 낮추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력 효율성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에요. 학습은 주로 데이터센터에서 이뤄지지만 추론은 데이터센터와 에지 디바이스 모두에서 진행되기 때문이죠.

사피온은 낮은 레이턴시와 높은 전력 효율성을 갖춘 제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사피온은 궁극적으로 고객사 니즈를 고려한 맞춤형 AI 서비스를 제공해 사피온을 중심으로 한 에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류 대표는 “대기업이든 중소·중견기업이든 학계든 하드웨어를 사용할 때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소프트웨어 개발 툴을 제공하는 전략을 구사할 방침”이라며 “고객사 니즈에 맞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담은 AI 솔루션으로 시장 경쟁력을 키워나가겠다”고 다짐했다.

※ 류수정 사피온 대표는···
1998~2004년…미국 조지아텍 전기컴퓨터공학 박사
2004~2018년…삼성전자 종합기술원 전문연구원
2019~2021년…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산학·객원교수
2020~2021년…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 예비타당성조사 총괄위원 AI·SW 자문위원
2021~2022년…SK텔레콤 AI 액셀러레이터 담당
2022년~현재…SAPEON CEO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202304호 (2023.03.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