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People

Home>포브스>CEO&People

권현진 작가 

눈으로 느끼는 시 

정소나 기자
현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호기로운 컬러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신비스런 문양을 만들어낸다. 색과 선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조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순간의 쾌락이 느껴진다. 색채를 통해 추상화를 새롭게 해석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권현진 작가를 만났다.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눈에 보이지 않아 더욱 소중한 내면의 감정들을 이미지로 표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추상 작업을 하게 됐어요.”

미술작가 권현진의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감정들을 표현하기 위해 눈을 감고 빛을 봤을 때 안구에 맺히는 가상의 환영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품 속 다채롭게 펼쳐진 색의 배열과 움직임은 주로 이러한 방식으로 시각화한 가상의 추상 이미지들이다. 채도 높은 색채를 사용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색과 빛의 세계를 화면 가득 담아내 꿈꾸는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환영을 화폭에 담아낸 듯 강렬한 이미지의 그의 작품은 인기리에 종영된 넷플렉스 드라마 [더 글로리] 속 화가 ‘이사라’의 그림으로 등장하며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인기 드라마 속 그림의 원작자로 알려지며 대중과 친숙해졌지만, 권 작가는 이미 수많은 전시회를 개최하고 크리스티 옥션 등 각종 메이저 경매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이름을 알려왔다. 특히 지난 3월 홍콩에서 열린 필립스 옥션에서는 김창열, 박서보, 윤형근, 하종현, 전광영, 이배 등 한국 거장 작가들과 함께 작품을 출품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은 회화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영상 미술의 지평으로 미술 언어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정된 형식이나 틀에 머무르기보다 현대적 감각과 표출 방식으로 회화, 입체,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미지들을 연계하고 확장하며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햇살이 따스한 봄날, 붓끝의 기교가 아닌 내면 깊은 곳의 울림을 새로운 이미지로 구현하는 권현진 작가를 만나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Visual Poetry Series
작품 컬러만큼 화려한 이력이 눈에 띈다.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프랫대학교(Pratt Institute)에서 페인팅 석사, 연세대학교에서 미디어아트 석사 과정을 마치고 홍익대학교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회화, 입체,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추상 작업을 하고 있다.

뉴욕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헝가리, 홍콩, 서울 등에서 개인전 15회를 열었고, 100회 넘는 단체전(일본, 대만, 중국, 미국, 싱가포르)에 참여했다. 그리고 Art Stage(싱가포르), LA Art Show(미국), Art Central(홍콩), Art Taipei(대만) 등 해외 아트페어를 비롯해 KIAF, 화랑미술제, 아트부산 등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크리스티, 필립스, 소더비 등 경매사에 출품되어 좋은 결과를 내기도 했다.

주요 미디어 파사드 프로젝트로는 2009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파사드, 2009년 서울시 빛축제, 2010년 과천 국제 SF영상축제 등에 참여했으며, 2012년 국민은행 을지로 본사 로비영상, 2013년 시민청담벼락 미디어, 2018년 벡스코 아트부산 전시장 미디어월에 전시를 선보였다. 현재는 명동 롯데백화점 영프라자의 미디어 파사드 공공미술작품으로 선정되어 2021년부터 3년간 송출 중이며, 롯데월드타워 미디어 큐브에도 영상 작품이 상영되고 있다.

최근 종영된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 속 화가 이사라 그림의 원작자로 화제를 모았는데.

우연히 드라마 팀에게 연락을 받았다. 평소 김은숙 작가가 극본을 쓴 드라마는 다 봤을 정도로 너무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내용도 다 듣지 않고 함께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저 드라마 세트장에 걸려 있는 그림 정도로 생각했는데, 작업하는 장면부터 전시회까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더라. 많은 분이 드라마에 등장한 작품을 알아보고 반가워하셨다.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과 다시 안부를 나누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난 2월부터 3월까지 워커힐호텔 프린트베이커리에서 열린 전시는 [더 글로리] 방영 이전에 잡힌 개인전이었다. 작품이 드라마에 등장하며 ‘이사라 그림의 원작자’라는 홍보 효과가 더해져 생각보다 많은 분이 전시회장을 방문해주셨다.

작품 세계나 화풍에 영향을 준 작가가 있나.

중세시대 스테인드글라스나 모자이크화에서 영향을 받았고, 바넷 뉴먼, 윌렘 데 쿠닝, 마크 로스코 등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채도 높은 색들과 한국 작가 박생광, 전혁림, 유영국의 강렬한 색감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오랫동안 회화 작업을 하면서 회화작품은 고정되어 있는 평면이지만 이 안에서 움직이는 듯한 시각적 환영과 착시효과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캔버스 천을 구겨놓은 듯한 입체작품과 정사각형 조각들을 반복해서 나열한 픽셀 작업들, 입체적인 큐브 작업으로 발전했다.


▎Visual Poetry Pixel Series
또 미디어 작업을 병행해 영상을 통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추상회화 작품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려는 시도를 했다.

대표작 Visual Poetry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눈으로 읽는 시’를 뜻하는 [Visual Poetry] 시리즈는 자연의 형태들을 비워가는 추상화가 아니라 역으로 융합과 혼성에 의한 추상 이미지를 다룬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빛을 봤을 때 안구에 맺히는 가상의 환영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내려는 데서 출발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 의도와 다른 새로운 이미지가 창출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시각적 무의식이 작동함으로써 낯선 이미지들이 발현되기를 기대하는 작업이다. 색의 배열과 움직임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나 서정시 한 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려는 시도를 했다. [Visual Poetry] 시리즈는 ‘회화’와 ‘시’라는 두 장르의 융합을 시도해왔다. 시적 표현 효과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농도가 강한 고채도 색상을 사용했다.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Visual Poetry] 시리즈는 채도 높은 색채를 사용하여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색채와 빛의 세계를 화면에 표현하고자 했다. 고농축 잉크와 우레탄을 반복해서 붓고 칠하는 과정에서 진한 색들이 서로 만나고 섞이면서 독특한 화면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다. [Visual Poetry Pixel] 시리즈는 정사각형 틀을 만들고 그 틀 안에 다양한 색의 물감을 부어 말린 후, 물감 덩어리들을 다시 캔버스 화면에 재조합하여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계획적으로 화면을 구성하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솟아오르는 이미지들을 표현했다.

작업은 주로 양주시에 있는 가나 장흥 아뜰리에의 입주 작가 작업실이나 방배동에 있는 개인 작업실에서 하고 있다. 예전에는 작업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는데 쌍둥이 엄마가 된 후부터는 오전에 출근해서 작업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규칙적인 작업 루틴을 가지게 됐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한 작품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화풍은 작가를 닮는다고 하는데.

인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색은 작가의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표현 방식이다. 색이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반응을 일으키고, 의사소통에 강력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채도가 최소 7~8도 이상인 고채도 색을 선택해 감각적·정서적 효과를 넘어 시적 이면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강렬한 고채도 컬러를 사용해 관람객들의 감정을 극대화하고 새로운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감으로써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드라마 덕분에 작품이 많이 알려졌다. 다음 전시나 작품 구상에 부담감은 없나.

평소 ‘이렇게 작업하는 게 맞나?’,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가?’ 하며 작업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하는 편이다. 작품을 좋아해주시고 전시회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오히려 작업 방향에 대한 고민을 덜어내고 즐기며 작업할 수 있게 됐다.

세계 3대 미술 경매인 크리스티 옥션을 비롯해 얼마 전 열린 홍콩 필립스 옥션에도 작품을 출품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 작가들의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소감은.

마침 소더비 홍콩 50주년 기념 특별 경매에도 작품이 출품되어 현재 프리뷰 전시가 진행 중이다. 세계적인 시장에 작품을 꾸준히 선보일 수 있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다행히 결과도 좋은 편이다. 작품 출품이나 진행 상황 등은 작가와 무관하게 각 경매회사에서 위탁을 받아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4월은 코로나 이후 다시 활짝 문을 연 홍콩에서 처음 열린 국제미술의 달이었다. 아트바젤 홍콩을 필두로 크리스티, 소더비, 필립스 등 경매회사를 비롯하여 주요 메이저 화랑들이 홍콩에 집결한 전 세계 컬렉터를 대상으로 여러 행사와 특별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런 좋은 시점에 마침 내 작품이 세계 미술시장의 주요 거점 중 한 곳인 홍콩 미술시장에 소개되어 더 뜻깊고 감사하다. 더욱 정진하는 계기로 삼겠다.

작품을 소장하는 기관도 늘어나고 있다.

현재 루이비통 재단, 국립현대미술관, 주 홍콩 한국대사관, 서울대학병원, 국민은행 본사, 스타자동차, 미창석유, 한국경제신문, 세아특수강, 삼미건설, 유중문화재단 등에서 작품을 소장 중이다.

4월 13일부터 한 달 동안 넥스트 뮤지엄에서 ‘SPUMA’라는 주제로 전시를 진행 중이다. 어떤 전시인가.

‘SPUMA’는 정확한 형태와 경계를 흐리기 위해 재료의 물성을 이용하거나 강조하며 만들어지는 얼룩이나 점들과 같은 표면 효과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는 고채도 색면과 함께 색면들 사이에서 부상되는 얼룩 효과인 스푸마 효과를 통해 강한 자극을 만들어 종래의 추상화가 보여주는 단조로움을 깨뜨리고 표현 효과를 증대하려는 시도를 했다. 신비로운 느낌과 함께 시적 환영과 환상이 동반되는 결과를 창출해내기를 기대한다.

회화 작업에 그치지 않고 미디어아트와 영상 미술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영역을 확장한 이유가 있다면.

영상 작업은 회화 작업에 쓰는 재료를 확장해 평면의 고정된 회화적 이미지를 3차원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Visual Poetry] 시리즈는 일차적 방식의 보는 방법이 아니라 눈을 감았을 때 표면에 나타나는 시각적 환상과 캔버스 밖의 가상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집중한 작품이다. 이러한 환상과 가상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내가 눈을 감았을 때 보았던 것들을 관람객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미디어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추상회화 작품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듯한 환영을 만들고 관람객들의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까지 자극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을 들려달라.

계속해서 추상화에 관한 연구를 하며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추상작업을 해나갈 계획이다. 추상화를 통해 관람객들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명상의 시간으로 빠져들게 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 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사진 최기웅 기자

202305호 (2023.04.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