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시인 재키 케이(Jackie Kay)는 ‘약속’이란 시에서 “약속들은 부서지고, 지켜지라고 만들어졌다”고 했다. 한 해를 마감하고 또 다른 일 년을 맞이하는 연말 연초. 예술 작품과 함께 지난 약속을 되짚어보고 새로운 약속을 다짐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폴 루벤스 [세멜레의 죽음] 1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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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약속이라는 단어를 민감하게 사용한다.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의 유형을 조사했을 때, 가장 높은 순위가 ‘거짓말하는 사람’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일 정도로 사람들은 서로 간의 약속에 예민하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상대방이 나와의 약속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거나, 나와의 관계를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거나, 나와 한 약속은 그저 무시해도 괜찮은 정도로 여겼다는 등 어느 해석도 자신에게 유쾌하게 다가오는 것은 없다.그런데 나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은 어떨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간관계를 끊어버리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한 약속도 이처럼 칼같이 지키고 있을까. 때론 약속이라는 이유로 주변 상황이나 다른 요소들을 보지 않고, 미련하게 약속 그 자체만 좇는 사람들도 있다. 강제성이 없더라도 약속은 힘을 가지고 있고 어느 순간에는 힘을 잃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사람들올림포스의 왕 제우스는 인간 여자인 세멜레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세멜레에게 당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이를 질투한 헤라가 세멜레에게 “제우스가 하늘에서 입는 황금빛 옷을 당신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간질을 했다.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황금옷을 보여달라고 재촉했고,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기에 제우스는 황금빛 옷을 세멜레에게 보여주었다. 인간이었던 세멜레는 제우스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불타 죽었고, 제우스는 임신한 그녀의 재를 자신의 허벅지에 넣어 꿰맸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술의 신 바쿠스이다.제우스는 자신이 황금빛 옷을 입으면 그녀가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다는 판단을 내려 그녀에게 황금빛 옷을 보여주는 선택을 했다.강박적인 사람들은 약속이라는 단어에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은 실패했다고 여기거나 완벽하지 않다는 자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강박적인 사람은 스스로에게 수많은 규율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친구끼리는 돈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철칙이 있는 사람은 지갑을 차에 두고 식당에 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시 차에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친구들은 식사 후에 줘도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단기적으로 돈을 빌리는 상황이기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규율은 갈등 없이 살아가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정한 하나의 규칙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목적이 희미해진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불태워 죽이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미련한 제우스가 될 수도 있다.
▎요아힘 폰 잔드라르트 [포세이돈과 아폴론에게 임금을 주지 않는 라오메돈] 17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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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사람들인간에게 중요한 삶의 가치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늘 달라진다. 10년 전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와 5년 전이나 지금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다르다. 그렇기에 약속을 하던 당시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되니 그때만큼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지금의 나에게 더 가치 있는 무언가가 과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보다 더 커졌기 때문일 수 있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당시와 달라졌다는 이유로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사람들도 있다.라오메돈이 트로이의 왕이 되었을 때, 포세이돈과 아폴론이 헤라와 함께 제우스에게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왕의 종이 되었다.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종이 된 두 신은 트로이 성벽을 쌓는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성벽 쌓기가 끝나고 나서 라오메돈은 약속한 임금을 주지 않았다. 화가 난 아폴론은 트로이에 전염병을 퍼트렸고, 포세이돈은 바다 괴물을 수시로 보내 트로이를 힘들게 만들었다.
같은 상황에도 다르게 반응하는 태도누군가와의 약속이 상대에 의해 깨진다 하더라도, 지금 자신의 상황에 따라 감정과 행동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토요일 오전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약속 장소에서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고, 옷을 차려입고, 미팅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서 잔뜩 기대하고 15분 일찍 도착할 생각으로 집을 나선 순간, “죄송합니다. 오늘 사정이 생겨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받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소중한 주말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한 것, 주말에도 사업차 사람을 만나야 하냐며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것 등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기분이 상당히 나빠질 것이다.그러나 토요일 아침, 전날 회식으로 인해 늦게 잠든데다가 몸살 기운까지 있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 같은 약속 취소 연락을 받았다면 오히려 ‘잘됐다’는 안도감에 다시 마음 편히 침대에 눕게 될 것이다.결국 약속이라는 것, 약속이 깨지는 상황은 모두 그 약속에 대한 자신의 기대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게 된다. 로마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사람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태도 때문에 불행해진다”라고 말한 바 있다. 모든 유쾌하고 불유쾌한 감정들은 한 개인의 현상학적 장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마리 로랑생 [키스]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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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사람은 스스로의 자아를 분리해서 인식하는 경향성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나 ‘나와의 약속’과 같은 표현들이다. 심리치료에서도 스스로에게 건네는 자기대화의 목록을 확인하고, 긍정적 자기대화의 비율을 높이고 부정적 자기대화의 비율을 낮추려는 시도를 한다.나와 나를 분리한 사람들은 ‘나와의 약속’이라는 이름하에 다양한 약속을 한다. 다른 사람과는 서로의 사생활을 배려하며 둘의 접점만 고려해 약속을 하지만, 나와의 약속에서는 나와 약속하는 당신 역시 나이기에, 모든 상황을 조절할 수 있는 강력한 약속이 될 수 있다.‘올해는 꼭 운동을 주 2회는 해야지’, ‘반드시 금연을 해서 건강을 챙겨야지’,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예전에 입었던 정장을 다시 꺼내 입어야지’ 등 자신을 위해 하는 약속은 정말 많다. 또는 ‘부모님께 잘해드려야지’, ‘아이에게 화내지 말아야지’ 등 관계에 관련된 약속도 많다.그러나 모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지는 않는다. 아내에게 금연을 약속한 사람이 금연에 실패했을 때는 ‘미안해’라며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사업체를 확장할 생각으로 마케팅 방법론을 배운 사장님들이 이를 성실히 적용하지 못하면 강사에게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사과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금연은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고, 사업체 확장도 자신의 수익 향상을 위해 하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사과하는 대상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심리치료 현장에 오는 내담자들에게 심리치료사들은 다양한 과제를 내준다. 성실히 이행하여 변화에 다가가려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변화하지 않고 머무르고 싶은 이유를 찾으며 움직이지 않으려는 내담자도 있다. 그리고 내담자는 어김없이 상담자에게 이번 주 과제를 해오지 않아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심리치료사들은 내담자에게 사과를 듣고 대상을 자신으로 바꿔 다시 이야기하도록 한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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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사람과의 약속을 대하듯약속에도 경중이 있다. 계약을 위한 미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려고 하는 약속의 자리이지만, 동창회에서 만났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은 인사치레에 불과할 때도 많다. 자신이 누군가와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누군가와의 약속에 크게 의미를 가지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나와의 약속이 어느 상황에서 의미를 갖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결국, 스스로 나를 의미 있고 중요한 사람이라고 믿고, 또 나의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인지해야만 나와의 약속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지금 꼭 무언가를 변화시킬 필요가 없고, 언젠가 하면 되는 건데 꼭 지금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는다면, 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도 무한대로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나와의 약속은 결코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속 주인공처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가진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올해 나는 어떤 결심을 했고, 무엇을 어느 정도 실천했는지를 점검해보자. 만약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면, 아직 올해는 남았으니 시도해볼 수도 있다. 운동이든, 금연이든, 변화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약속이라면 이번에는 ‘나’라는 아주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과 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변화를 도모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김소울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