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46) 실크로드의 시장들 

 

서양에 로마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장안이 있었다.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장안은 세계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와 일본의 유학생들과 승려들,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들뿐만 아니라 인도, 페르시아, 아랍에서 상인과 사절단들이, 심지어는 흑인들까지 장안으로 몰려들었다.

▎사진:GETTYIMAGESBANK
“장안(시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변방의 꽃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안에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7세기 쇠망한 로마가 인구 10만 명일 때, 장안은 인구 100만 명인 당대 최대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빛나는 문명의 중심이었다.

수와 당이라는 세계 제국의 수도 장안의 화려한 봄은 오호(五胡-다섯 오랑캐)의 북중국 침입 이후 중국 대륙에서 성장해온 남의 한족 문화와 북의 유목민족 문화를 한데 묶은 결과로 탄생한 문화적 흥기였다. 당나라는 글로벌리즘을 꽃피웠던 나라로, 호한융합(胡漢融合)의 기치 아래 세계 각국의 인재를 차별하지 않고 핵심 포지션에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특히 당 고조 이연에겐 딸 19명이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이민족들과 결혼했다고 한다. 당나라가 이렇게 국제적이고 개방된 자세로 세계 문명을 주도했기에 최신 불교 교리, 법과 제도, 학문을 배우려고 세계 각국의 인재들이 장안으로 몰려들었으며, 최신 건축양식이나 헤어스타일, 패션을 보려면 장안으로 가야 했다. 돌궐의 왕자는 오만에서 온 보석상과 거래했고, 일본에서 온 승려들은 소그드 상인들의 낙타 대상을 보고 놀라워했다.

상인, 종교인, 외교사절단들은 당 황제에게 이국적인 물건들을 가져다 바쳤다. 소그드 상인은 공물을 바친 답례로 안남 절도사에 임명되는 등 파격적인 출세를 한다. 루비로 장식된 검은 자기에 최고급 사향을 바친 오만의 유대인 상인은 횡재를 했다.

743년에는 장안에 있는 인공호수에 항구를 만들었다. 남선북마(南船北馬)에 익숙한 북중국 사람들의 눈에 호수에 떠 있는 배들은 신기해 보였다. 광저우에서 시작된 수로의 종점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배들로 가득했고, 세금과 공물이 쌓여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을 ‘당물(唐物)’이라 불렀으며, 이는 1970년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미제(美製) 물건처럼 그 당시 가장 좋은 물건을 뜻하는 말이었다. 장안을 중심으로 한 실크로드 무역은 1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라시아 전역의 도시와 문명을 이어주는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집트 사이에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활발하게 교류했고,이는 동서양 양쪽에 새로운 문화적 자극을 주었다.

1400년 전 7세기 중반인 당 태종 때부터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인들이 장안에 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회족들의 직접적인 조상은 13세기 초반 칭기즈칸의 정복 활동과 관련되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들어온 무슬림이다. 장안에는 서시와 동시라는 큰 시장이 있었다. 귀족과 관리들이 이용하는 동시는 고급스럽고 조용했고, 외국인들과 일반인들이 모여드는 서시는 늘 왁자지껄했다. 서시에는 골목마다 3000개 넘는 객사와 주점이 즐비했고, 중앙아시아를 거쳐온 상인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로마의 예술, 비잔틴 건축, 인도의 곡예와 마술을 볼 수 있었으며, 소그드, 토하라와 페르시아에서 온 미모가 빼어난 기생들도 쉽게 볼 수 있었고 심지어는 흑인들도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부모의 도움으로 장안에 과거 공부하러 온 젊은 귀족들은 기생들의 매력에 빠져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술집 주인은 토하라와 소그드 출신의 서역 미인들을 고용하고 호박과 마노로 만든 잔에 진귀한 수입 와인을 팔았고, 서역 소년이 부는 피리 소리에 맞춘 이국적인 여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매혹적인 춤은 술집 주인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줬다.

화려했던 장안의 봄


▎이백은 백석벽안 (白晳碧眼: 흰 살결 푸른 눈)의 호희들과 어울려 포도주를 마시는 기분을 자주 노래했다.
장안에 모란꽃이 피는 시기는 3월 15일을 기점으로 전후 20일간이다. 일본 작가 이시다 미키노스케가 1941년에 쓴 『장안의 봄(長安之春)』에 나오는 구절들에 따르면, “꽃이 피고 지는 20일 동안 온 성의 사람들은 모두 미친 듯”했으며, “도성의 대로마다 꽃피는 시절, 만 마리 말과 천 대 수레가 모란을 보러 갔다”고 한다. “꽃필 무렵이면 경성이 들썩인다”고 했으며, “장안에 모란이 피면, 비단수레 구르는 소리 마른천둥이 치는 듯”하다고 노래했고 도성의 거리마다 “모란이 필 때면 육가(六街)의 먼지”도 향기를 띠었다. 여러 꽃을 보았지만, 이 꽃보다 아름다운 건 없다”고 상찬하고 “오만 가지 꽃 중에 으뜸”으로 평가되는 모란꽃이, 백거이(白居易)의 풍자처럼 한 포기에 “중농 열 집의 세금”에 해당하는 돈이 지불되는 괴이한 형국이 벌어졌다. 유혼(柳渾)은 “오늘날 모란꽃은 어찌할 수가 없구나. 수십 수천 전을 내고 한 송이를 사다니”라며 탄식했고 “이것을 심어 이익을 보려 하니 한 그루에 수만 전씩 하는 것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정도로 이 시대의 유행 풍조는 쉽사리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안의 사녀(미인)들은 봄날 꽃쌈(鬪花)을 할 때 특이한 꽃을 머리에 꽂고서 자태를 뽐냈는데 “모두들 천금을 들여 아름다운 꽃을 사다가 정원에 심고서 봄날 꽃쌈에 대비했다”라고 하니 이 경합에는 틀림없이 모란의 명품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천하를 통일하고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번영의 시기가 열리자 장안의 부자들은 정원을 장식할 아름다운 모란꽃에 빠져들었다. 장안에서는 매년 늦봄에 화려한 모란꽃 경연대회가 열렸고 1등을 차지한 모란의 가격은 집 한 채 가격을 훌쩍 뛰어넘었다. 당나라 장군 혼감은 당대의 유명 시인들을 초대해 자신이 가진 모란의 아름다움을 읊게 했고, 이 자리에서 백거이는 “모란을 가지는 것은 장안에서 가장 고위한 향기와 색을 소유하는 것”에 비견했다. 이 시대 특급 모란의 엄청난 가격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을 연상케 한다. 실제 당대의 시인들은 “모란꽃 탓에 장안의 10만 가구가 파산했다”고 노래하기도 했다.

장안의 시장통에는 호텔과 술집이 즐비했는데, ‘호희(胡姬)’라고 불렸던 푸른 눈의 소그드·페르시아계 여성들은 이국적인 춤으로 큰 인기를 끌어 서시 술집의 꽃으로 불렸다. 당대의 문예 스타 이백은 푸른 눈에 곱슬머리, 하얀 피부를 가진 호희들과 포도주를 마시는 기분을 즐겨 노래했다.

백석벽안(白晳碧眼: 흰 살결 푸른 눈)의 금발 미녀,
관능적인 호복을 입고
호추(胡雛: 젊은 소그드 남자 악사)에 맞추어
호선무(胡旋舞)를 추며,
농염한 자태로 술자리에 임했음이니
그 아니 좋은 취흥(醉興)이었으랴.
그러나 오늘의 서안의 밤은
너무 어둡고 무겁기만 하구나.

248세기 사마르칸트에서 장안에 이르는 실크로드 일대에는 쿠차 음악의 명성이 높았다. 당시 당나라 음악은 주로 쿠차 비파의 선율에 바탕을 둔 28선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나라의 황제와 귀족들 사이에서는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작은 쿠차 북, 갈고, 을을 치는 게 유행했다. 당 현종도 갈고를 즐겨 쳤으며, 양귀비도 악단장 출신이었다. 현종은 유명한 ‘춤추는 말 여섯 마리’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황궁에는 무려 3만 명에 이르는 악사와 무용수를 두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쿠차 출신이거나 쿠차식 연주가들이었다. 음악과 노래, 춤은 은과 옥처럼 사고파는 실크로드의 상품이었다. 실크로드 연변의 모든 도시에서는 인도, 버마, 캄보디아, 소그디아나 등지에서 온 순회 무용단이 왕궁과 시장에서 공연했고, 그들의 공연은 실크로드의 상품들과 같이 거래됐다.


▎오시끌벅적한 장안의 회족(무슬림) 거리. 이 회족 거리는 1500년 전 당나라의 서시(西市)가 있던 장소로, 관광객들로 붐비는 대형 상권이다. 지금은 늦은 시간까지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비지만 당나라 서시에서는 통금이 있어서 지금처럼 밤거리를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8세기 장안에서는 술에 취한 남자들과 접대부들이 밤늦게 술집과 식당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중 평강방(平康坊)이라는 곳에는 기생집이 많아 관리들과 시인, 공자들의 출입이 잦았다고 한다. 나이 든 기녀가 가모(假母)가 되어 젊은 기녀들을 거느리고, 놀고 먹으며 기녀들에게 빌붙어 사는 묘객(廟客), 은밀히 여자를 사냥하여 기적(妓籍)에 넣고 감시하는 여쾌(女儈)라고 하는 인신매매꾼까지 있었다고 한다.

전설적인 명기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어떤 기녀는 몸에서 향기를 풍기는 기술이 너무 뛰어나서, 문밖에 나가면 “벌과 나비들이 그녀의 향내에 반해 졸졸 따라다녔다”라고 전한다. 또 어떤 기녀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향료를 먹어서 온몸에 천연 향기가 흠뻑 배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유명한 기녀는 첩으로 들어갔다가 본처와 갈등을 빚고 애인과 별거하면서 애인을 위해 슬프고도 열정적인 시들을 지었다. 결국 그녀는 애인의 곁을 떠나 도교사원에 거처를 마련하고 연회를 개최했는데, 젊은 학자들과 관리들을 종교적 권위로 불러들여 술과 음식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렇게 장안은 언뜻 매우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도시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숨 막히는 속박과 통제가 있었다. 장안 시가의 모형도를 보면서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황제들이 사람들을 가축 우리에 가두어 키우는 것처럼 장안을 설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장안 사람들은 바둑판 모양의 108개 방(坊) 중 한 곳에 계급이나 민족별로 몰려 살았으며, 각각의 방에서 가축처럼 갇혀 살았다. 벽 높이가 5m 정도 되는 방 안에서 황제가 치는 북소리, 종소리에 맞추어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이를 어기면 처절한 형벌이 따랐다. 시인 이백, 백거이가 화려한 장안의 봄을 노래했지만 이는 지배층의 철저한 계산 속에 풀어준 작은 자유가 아니었을까?

※ 김정웅 -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자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겸임교수. 30여 년간 5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이다.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의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00년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기업 간 전자상거래 사업을 하다가 폐업 위기를 겪었지만 반도체 산업에 집중해 전화위복을 이뤄냈다. 지금까지 반도체 업계의 레거시 장비를 전 세계에 5만 대 넘게 판매하며 서플러스글로벌을 세계적인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5년 무역의 날 대통령상과 2021년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Autism Expo를 개최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2407호 (2024.06.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