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이강호의 생각여행(55) 인생 여행, 지족(知足)과 지지(知止)를 깨우다 

 

20대 초반, 막 임관한 초임 장교로 근무했던 최북단 전방 일대를 찾았다. 흔적 없이 사라진 곳에서, 옛 자리를 지킨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고 적당한 때에 멈추는 지혜로운 삶을 소망했다.

▎적막감과 긴장감이 감도는 비무장지대(DMZ) 철책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촬영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과 장소는 어디일까? 시간적 관점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난 날을 소중히 여기며 축하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 위 촛불을 훅 불어 끄고 케이크를 커팅하는 행사는 누구나 행하는 일상이 됐다. 저마다 세상에 태어난 날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백일잔치, 돌잔치로 삶의 여정이 이어지고 매년 맞는 날임에도 어김없이 생일을 축하한다.

학창 시절에는 입학식과 졸업식이 중요한 기념일이다. 이어 학업을 마치면 대부분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육군 장교로 임관 후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초임지는 3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해 경기도 연천과 전곡을 지나 대광리 지역에 있었다.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소대장을 맡았던 부대를 오래전부터 꼭 찾아가보고 싶었다. 연어나 제비, 꿀벌 같은 동물들이 태어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 성장한 뒤,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습성인 회귀본능이라도 되는 걸까? ‘반백년 전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 장소가 어떻게 변했을까’ 참으로 궁금했다. 옛 부대가 여전히 그 장소에서 과거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파트 단지라도 들어서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더는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과 기대에 잠겨 북쪽으로 향했다.

51년 전 흔적을 더듬은 인생 여행


▎백마고지 전적비와 기념관에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여행을 좀 더 편하게 즐기고 시간도 아낄 겸 최북단 지점으로 이동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선을 택했다. 51년 전에는 우리나라 최북단 철도역이 신탄리역이었다. 그곳에 그 유명한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팻말이 설치돼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끊겼던 경원선이 신탄리부터 백마고지 구간까지 복원됐고, 백마고지역이 2012년 11월 20일 문을 열었다. 따라서 이제는 백마고지역이 대한민국 최북단 철도역이다.

제일 먼저 백마고지역을 지나 비무장지대(DMZ) 쪽의 백마고지를 볼 수 있는 자리에 건립된 ‘백마고지 전적비’를 찾았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다음과 같이 안내판에 기록해놓았다.

“철원군 북방에 있는 백마고지는 6.25 동란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대공세에 의해 10일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 전투는 약 30만 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1만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중공군 2개 사단이 와해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고 명명되었다. 격렬했던 전투 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악취가 산을 덮을 정도였고, 서로의 포격에 의해 고지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이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국군 제9사단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백마고지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이 비에는 당시 전투의 격렬함과 많은 사람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했음을 알려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경건히 참배한 후에 전적비 입구 양옆에 건립된 백마고지 기념관을 돌아봤다. 전시관에서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과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양쪽으로 태극기가 펄럭이는 언덕길을 올라가 두 손을 모은 듯한 형상의 전적비를 찾았다. 이어 가까이에 6개 기둥이 받치고 큰 종이 있는 상승각(常勝閣)을 지나니 광활한 DMZ(Demilitarized Zone)가 눈앞에 펼쳐졌다. 백마 두 마리가 양쪽을 받치고 있는 ‘DMZ 평화의 길’ 아치 사이로 백마고지가 멀리 보였다. 그곳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아치를 지나서 DMZ 평화의 길을 따라 이동하며 철책선 너머로 보이는 백마가 누워 있는 듯한 형상의 고지와 우리나라 육군의 진지, 그 너머 북한 지역을 바라봤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반세기 전, 20대 초반 청년이 처음 DMZ에서 견습 소대장을 하며 황량했던 철책선을 따라 걸으며 느꼈던 인생 최초의 강렬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화창한 날씨에도 여전히 고요한 정적만이 DMZ를 지키고 있었다.

차를 돌려 신탄리역으로 이동하는 길에 까맣게 녹슨 철교가 보였다. 차를 돌려 가까이 가서 사진에 담았다. 오래전에 끊긴 다리에는 몇 개만 남은 교각 위에 녹슨 철교가 얹혀 있었다. 무슨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전방 지역을 돌아보니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도로였다. 모든 도로가 포장돼 신속하고 편리하게 달릴 수 있었다. 흙먼지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옛날 차량의 모습은 이제 추억의 한 장면이 됐다. 이제는 전방 지역 어디에서나 잘 포장된 도로 위로 세계를 누비는 최고 품질의 국산 자동차가 달린다. 황량했던 산에도 나무가 정글처럼 들어섰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자랑스러운 나라가 됐다. 무엇보다 큰 변화이다.

감개무량하게 만난 인생의 첫 출발점


▎반세기 전의 초임지였던 대광리 기차 역사. 경원선 운영이 재개될 날을 기다린다.
다시 차를 몰아 예전 신탄리역 근처에 있던 ‘철마는 달리고 싶다’ 팻말을 찾아보았다. 열차가 운행되지 않아서 텅 빈 신탄리 역사를 돌아본 후 북쪽으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멀지 않은 거리에 벌겋게 녹슨 팻말이 예전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51년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팻말을 보니 지난 시절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라는 지구 위 공간을 수없이 줄달음치며 일해왔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20대 젊은 장교로 일할 때 봤던 그 팻말을 찾아 원점에 돌아와 서 있다. 녹슨 철판 위 노란색 바탕에는 ‘철도 중단점-The Northernmost Point-鐵道中斷點-철마는 달리고 싶다-We want to be back on track’이라고 쓰여 있다. 팻말 아래에 출발역과 도착역을 표시한 부분은 너무 심하게 녹슬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용산-신탄리, 신탄리-원산’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이제 기억을 더듬으며 옛 부대를 찾기 위해서 대광리역을 찾았다. 텅 빈 대광리 역사도 언젠가 운영될 날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역 앞쪽으로 마을 중심 거리가 눈에 익숙하게 들어왔다. 옛날처럼 한눈에 보이는 작은 마을 그대로다. 새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그 옛날 ‘부산 돌곱창’ 식당이 있던 익숙한 거리는 기억이 났다. 마을에서 하숙했던 집을 찾으려고 하니 건물 대부분이 새로 지어진 터라 찾기 쉽지 않았다. “방앗간 집이었는데…”라며 혼자 중얼거리던 차에 옆에서 안내를 도와준 김 원사가 “방앗간 집은 아직 그대로 있다”고 들려주었다. 곧장 방앗간을 찾았는데, 폐허가 된 채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방치된 방앗간 뒤로 주인집이 보였다. 역시나 아직 헐어내지 않고 폐허가 된 채 서 있는데, 사랑채를 보니 분명 내가 하숙을 했던 별채 같았다. 정확히 그때 그 집인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억 속 모습과 거의 일치하는 듯해 몹시 설레고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세월이 주는 쓸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막걸리 한잔 기울이던 길가 주막집 낭만도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옛 추억을 더듬으며 마을을 다시 돌아보고는 조금 더 걸어 다리 건너 있는 옛 부대에 들렀다. 위병소는 옛날 모습과 같은데 방향이 조금 바뀌었고 부대 안에 들어서 연병장을 보니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랐다. 막사가 있던 곳은 규모는 비슷했지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틀림없이 내가 근무했던 그 부대 그 연병장이다. 건물과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연병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나무들은 세월이 흘러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22세 신참 소위로 근무를 시작한 장소에 다시 서 있으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수많은 옛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반세기가 흘러 내 인생의 사회적 출발점을 다시 찾으니 그야말로 감개가 무량했다.

옛 근무지를 뒤로하고 울창한 숲길을 차로 달려서 ‘열쇠전망대’를 찾았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탁 트인 전방에 펼쳐진 DMZ가 한눈에 들어왔다. 안내자에게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뉴스에서 자주 접했던 화살머리고지와 멀리 북한 지형을 관찰해보았다. 비무장지대를 아주 넓은 시야로 관찰할 수 있는 곳은 열쇠전망대가 아마 최적의 위치일 것이다. 우리 국민도 시간을 내 이곳을 돌아보고 안보 현실을 경험해보면 좋은 체험이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불철주야 근무하는 우리 장병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열쇠전망대를 떠나 사단사령부로 이동했다.

가늘고 긴 삶이 주는 가치


▎반세기 만에 방문한 소대장 시절의 부대 모습. 과거를 회상하니 감개무량했다.
사단사령부 입구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사단장 전속 부관으로 근무하며 난생처음 테니스를 배웠던 코트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5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대부분의 건물이 재건축됐고, 나무는 굵고 하늘 높이 자랐다. 반세기 만에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인생 여행’의 한 부분을 실행하며 옛 시조 한 구절을 읊조렸다.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인생 여행의 추억을 음미하며 생각에 잠기던 중 얼마 전 본 기사가 떠올랐다. “내부자 거래로 몰락한 ‘월가 탐욕의 상징’…아이번 보스키 사망”이라는 내용이다. 문득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 뉴욕 맨해튼을 찾았을 때 시티은행 간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탐욕과 망각이 있기 때문에 이런 금융위기는 아마 또 발생할 것이다.”

‘월가 탐욕의 상징’ 기사를 접한 지 며칠 후 젊고 유망한 가수의 음주 뺑소니 기사가 온 뉴스를 뒤덮었다.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런 뉴스들을 접하며 옛 고전인 노자(老子)도덕경 44장의 글귀를 음미해본다.

“명성과 몸, 어느 것이 가까운가(명여신숙친: 名與身孰親). 몸과 재화, 어느 것이 소중한가(신여화숙다: 身與貨孰多).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인가(득여망숙병: 得與亡孰病). 이런 까닭에 애착이 심하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시고심애필대비: 是故甚愛必大費, 다장필후망: 多藏必厚亡).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장구할 수 있다(지족불욕: 知足不辱, 지지불태: 知止不殆, 가이장구: 可以長久).”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높은 명성과 많은 재화가 내 신체보다 소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명성이나 재화 따위가 무슨 의미일까? ‘만족함을 알면(지족: 知足)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지지: 知止) 위태롭지 않아서 삶이 매우 길고 오래가리라는 문구가 마음에 참으로 큰 느낌을 전해준다.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알고 적당한 때에 멈출 줄 아는 것은 쉬운 듯하지만 이를 실행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본능적인 탐욕 탓인지 높은 명성이나 권력을 갖거나 큰 부를 이룬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멈추지 못해 결국 시련을 겪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인생 여행을 실행해가며 지족(知足)과 지지(知止)의 교훈을 생각한다. 매사 만족함을 알아 항상 감사하고, 매사 적당히 멈출 줄을 알아서 과(過)함을 줄여가며 유유자적(悠悠自適) 살아보려 노력해야겠다. 줄곧 생각해왔듯이 순간의 ‘굵고 짧은 삶’보다는 장구함을 추구하는 ‘가늘고 긴 삶’이 때론 더 멋지지 않을까.

※ 이강호 - PMG, 프런티어 코리아 회장. 세계 최대 펌프 제조기업인 덴마크 그런포스그룹의 한국 법인 창립 CEO 등 33년간 글로벌 기업 및 한국 기업의 CEO로 활동해왔고, 2014년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립했다. 다국적기업 최고경영자협회(KCMC) 회장 및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다수 기업체와 2세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을 컨설팅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했다.

202407호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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