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작가와 피사체가 만나는 인연의 순간을 담는 행위라는 생각으로 한 컷 한 컷 정성스레 셔터를 누르는 사진작가 이상.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는 풍경들을 렌즈에 담아 기록으로 남기는 사진가의 역할에서 더 나아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유일무이성을 부여해 개성 넘치는 작품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정승우 이사장과 이상 작가가 만나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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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TV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본캐’, ‘부캐’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본캐’는 본래의 캐릭터, ‘부캐’는 부캐릭터의 줄임말이다. 다변화·다양화되는 현대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열중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도전에 나서는 다재다능한 현대인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다.정승우 이사장이 만난 8월의 아트 피플은 ‘본캐’와 ‘부캐’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본캐’인 치과의사로도, ‘부캐’인 사진작가로도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상 작가다.이 작가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치의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치과의사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겸임교수이자 이혁상 W치과의원 대표 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동시에 작가명 ‘이상’으로 작품 활동을 하며 단순한 취미를 넘어 전문적인 지식에 예술성이 더해진 사진에 자신만의 개성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작가이기도 하다.이 작가는 ‘사진은 작가와 피사체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인 동시에 뜻밖에 발견한 ‘행운(Serendipity)’ 순간들’이라는 생각으로 한 장 한 장 찍어온 사진들을 모아 2016년, ‘Moments of Serendipity’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어 사진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원본인 현실과 물의 반영이라는 비현실이 만나는 순간을 잡아내어 사진에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부여하는 ‘Unreal Reality’ 시리즈, ‘Unreal Reality’ 시리즈 작업 중에 물 위에 비친 일부 이미지들에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 원본을 재창조해 새로운 이미지들을 모은 ‘Simulacrum’ 시리즈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개인전 3회를 비롯한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해 자신만의 세계관이 담긴 작품으로 소통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진을 찍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어린 시절부터 전자기기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에 들어갈 무렵은 필름을 넣어 찍는 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자연스레 디지털카메라에 관심이 생겨 카메라를 구매했다. 새로 산 카메라로 이것저것 사진을 찍으며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거나 무심코 지나치는 주변의 장면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에 즐거움을 느꼈고, 그때부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있었을 텐데.지금 인터뷰 중인 이곳 유중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작가로서 좀 더 진지하게 사진을 찍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사진은 기록의 관점에서는 매우 편리한 매체이지만,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또 다른 누군가가 사진을 찍는다 해도 피사체와 구도가 같다면 결국 비슷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진가가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오지로 떠나거나, 모두가 잠든 새벽에 사진을 찍곤 한다. 나도 새벽에 공동묘지에 가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야생동물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아프리카로 떠나기도 하고, 오로라를 찍으러 북극과 남극에 가까운 지역에 간 적도 있다. 하지만 결론은 한정된 시간 안에 촬영을 마치고 떠나야 하는 여행자이다 보니 현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촬영하는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진을 찍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별성만으로 나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기에 생각을 다르게 갖기로 마음먹었다.
▎2016년 첫 개인전인 ‘Moments of Serendipity’에서 선보인 작품 ‘Nobleness’. 2013년, 보츠와나 초베 국립공원에서 촬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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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순간 물에 비친 풍경 사진을 찍게 되었고, 매 순간 변화하는 물결에 반영되는 이미지들은 결코 재연될 수 없기에 그 순간을 담는 것은 유일무이한 작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에 반영된 이미지를 찍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사진 속 흔들리는 물결에 비친 풍경이 마치 붓 터치가 살아 있는 한 폭의 유화처럼 느껴졌다. 이런 느낌을 실제로 사진에 구현하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캔버스에 인쇄한 사진 위에 투명 아크릴물감을 덧칠해 질감을 살리는 현재의 작업에 이르게 되었다. 최근에는 물에 반영된 이미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 위에 투명한 아크릴물감을 더해 결과물에 유일무이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23년 완성한 캔버스에 인쇄한 사진 위에 투명 아크릴물감을 덧칠해 질감을 살린 ‘Golden Field #23001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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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사진은 장비발’이라는 속설이 있다. 작가님도 고가의 촬영 장비를 활용하나.나의 사진은 촬영 그 자체로 완성물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화작품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작업이기에 반드시 초고화질 이미지가 필요하지는 않다. 물론 고성능 카메라로 촬영하기도 하지만 보통 드론 카메라나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작업의 밑그림으로 사용한다.
사진은 상당한 인내와 고통이 수반되는 작업이기도 한데.사진 촬영은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작년 가을에 오로라를 촬영하러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녀왔는데, 7박 8일 동안 약 2500㎞를 이동했지만, 일정 내내 날씨가 흐려 결국 원하던 오로라 이미지를 얻지 못했다. 처음에는 긴 여정과 고생스러운 과정을 거치고도 원하는 결과물을 얻지 못해 실망감이 컸다. 하지만 2500㎞를 도는 동안 너무나 아름다운 아이슬란드의 풍광들을 끊임없이 접하며 여행 그 자체를 즐기게 됐고, 또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좋은 이미지들을 담을 수 있었다.어떤 일의 결과물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너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에 이제는 사진 촬영이 인내와 고통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극 중 사진작가인 숀 오코넬(숀 펜 분)은 스노 레오파드를 찍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쳐 산속에 도달하고도 또 며칠을 기다린다. 마침내 카메라 뷰파인더 안에 스노 레오파드가 들어오지만 사진은 찍지 않고 그저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보고만 있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 장면이 사진에 대한 나의 마음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어떻게 보면 나를 작가로 데뷔하게 해준, ‘Nobleness’라는 제목을 붙인 레오파드 사진을 잊을 수 없다. 2009년에 개업해서 처음 한 결심이 ‘3년간은 휴가 가지 말고 열심히 일하자’였기에 개업 4년 차에 처음으로 휴가를 떠나게 됐다. 마침 친한 친구가 아프리카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어 ‘이때 아니면 언제 가보나’ 하는 생각으로 짐바브웨에 방문했다가 보츠나와 초베 국립공원으로 사파리 투어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사파리 투어의 꽃이라는 레오파드는 단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2박 3일 일정의 마지막 날인 다음 날에도 투어를 신청해 공원 구석구석을 헤맸지만 계약된 2시간 중 1시간 30분이 지나도 레오파드는 쉽사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포기해야 하나 싶을 무렵, 다급한 무전이 오고 가더니 사파리 차량이 급하게 이동했고 드디어 레오파드를 마주하게 됐다. 그것도 같이 간 차량 6대 중 유독 내가 탄 차량 정면에 자리 잡아 레오파드의 늠름한 모습을 오롯이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2018년 모로코 마라카시에서 물에 비친 풍경을 촬영한 ‘Unreal Reality#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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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절대 만날 수 없었던 레오파드와의 운명적인 만남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사진을 찍는 것이 단순히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넘어 작가와 피사체 간 인연의 순간을 담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사체와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순간을 한 컷 한 컷 최선을 다해 카메라에 담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 집중하고 있는 작업은.남들이 찍지 못하는, 나만의 개성을 담은 이미지를 위해 다양한 콘셉트의 촬영을 시도하다 요즘은 페인팅 작업을 위한 밑그림에 해당하는 촬영을 주로 하고 있다. 물에 반영된 이미지를 담기 위해 베니스나 암스테르담에서 촬영을 하거나, 드론을 이용하는 항공 이미지 촬영에 집중하고 있다.
사진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사진을 밑그림 삼아 그 위에 페인팅을 해 사진과 회화 분야를 넘나들며 작업 중이다.
▎피사체와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며 한 컷 한 컷 진심을 다해 셔터를 누르는 이상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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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을 포함하여 다른 분야 종사자들의 ‘예술 활동 겸업’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세상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그 문제는 작가의 예술 활동에 얼마나 ‘진심’이 담겨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진심이 아닌, 보여주기식 활동을 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 사람의 인지도나 기타 외적인 조건에 의해 잠시 돋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예술 활동 그 자체에 진심인 작가가 살아남지 않을까. 오히려 다른 전문 분야에서 쌓아온 다양한 관점을 예술 창작 활동에 녹여낼 수 있으니 예술 활동에도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작가님만의 차별점은 뭔가.사진 그 자체에 집중하거나, 사진 위에 페인팅 작업을 곁들이는 작가가 많다. 나는 캔버스에 인쇄된 사진 위에 투명한 아크릴물감을 칠하는데,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질감만 부여한다는 것이 큰 차별점인 것 같다. 원본의 이미지와 색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보여 사진 고유의 기록성을 살리되, 톡톡한 질감으로 작품에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올해 또는 내년을 목표로 일본을 비롯한 해외 진출을 준비 중이며 내년 초쯤 개인전도 계획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나의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채널을 모색 중이기도 하다. 좀 더 노력하는 작가가 되려고 한다.
예술가라는 ‘부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달라.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 없이 도전해보길 바란다.
※ 정승우 - 고려대학교 법학과(학사), 동 대학원(법학 석사, 법학박사) 졸업 후 2011년 공익재단법인 유중문화재단과 복합문화공간인 유중아트센터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리=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_ 사진 최기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