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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는 물론 해외 독자들에게도 큰 반응을 불러일으킬 잠재력을 가진 작품으로 ‘K 의학 소설의 개척자’를 자처하고 나선 김유명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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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마취]를 쓰기 전, 개원 의사로서 외래를 보고 수술하며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내가 매일 반복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를 찾아온 환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얼굴을 선물하며 보람도 느꼈지만, 뭔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왜 하필 소설인가.넌지시 보여주기 위함이다.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깨달은 작은 지혜, 혹은 명상 중에 잠깐 들여다본 진실을 전달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것을 논문으로 쓰면 어떨까? 혹은 교과서로 기술하면? 결국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이야기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을 키워온 생물이다. 다른 어떤 생물에는 없는 인간 만의 독특함은 있을 법한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명과 시스템은 이 상상력을 근거로 발전하고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회화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는데.글을 쓰며 어려운 점은 사람들이 의외로 글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의 어머니조차도 내 작품을 읽지 않으셨다.(웃음) 물론 어머니는 난시가 심해 책을 못 읽는다고는 하시지만 말이다. 물론 작품을 쓰는 기간인 5~6년보다는 짧은 시간이긴 해도 3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을 읽으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린다.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책장을 펼치고 찬찬히 읽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대 작가로서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었다. 영화사와 판권 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한 권의 책이 영화로 재탄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정이다.
같은 주제를 가장 직관적으로, 빠른 시간에 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회화이다. 그림을 보는 데는 독서만큼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마치 다트처럼 관람자의 심장을 순간적으로 꿰뚫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에 수행하는 명상 속에서 느끼는 것들, 어려운 수술을 앞두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신에 대한 헌신과 자아 초월의 염원을 그림으로 그렸다. 작품을 소개하는 홈페이지(www.surgeonstrange.com)에서 ‘축의 중심’ 시리즈, ‘지켜봄’ 시리즈, ‘영원’ 시리즈 등 그림들과 각 그림의 주제와 일치하는 소설 속 문장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해외에는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 테스 게리첸 등 의사 겸 소설가가 많지만 국내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다.그렇다. 마이클 크라이튼 같은 의사 출신 작가가 내 롤 모델이다. 하버드의대를 나와 영화 [쥬라기 공원] 원작이 된 작품을 쓴 마이클 크라이튼 같은 작가가 되어, 전문 직업 세계에서 낚아 올린 싱싱하고 신기한 소재로 식상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써서 한국의 국격을 높이고 동양의 깊은 멋을 서구에도 알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리고[셜록 홈스] 시리즈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 경도 내 롤 모델이다. 그 역시 안과의사로 개업해 활동하며 탐정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그가 진정으로 쓰고 싶은 책은 영성에 관한 책이었는데, [셜록 홈스]를 절필하고 매달렸지만 잘 안 팔렸다고 한다. 작품성과 상업성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상업적 소재에 진지한 주제의식을 남 모르게 끼워 넣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다.창작 활동이 진료 활동에 방해가 된 적은 없나.그런 염려 때문에 김유명이라는 필명으로만 작품 활동을 한다. 두 가지 캐릭터가 섞이면 자칫 양쪽에 모두 피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나를 아는 친구들은 실명으로 글을 쓰면 병원 홍보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들 하지만 나의 문학에 대한, 회화에 대한 진심이 오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로 주말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므로 진료 시 집중력이 떨어지는 일은 없다.
다른 분야에 종사하며 예술 활동을 겸하는 사람들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하는데.현대에는 직업의 세분화가 곧 전문화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의료에서도 너무 장기별로, 질환별로 세분화되다 보니 제각각 병은 고쳤는데 환자는 사망했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는 거다. 이제는 전체를 보는 제너럴리스트가 전문가인 세상이 온다. 경계를 넘을 때 새로운 가치가 생겨난다. 전문적인 직업 세계의 생생하고 특별한 이야기는 그 직업을 수십 년 경험한 사람들 외에는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직업을 가진 모두가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신기한 이야기들을 독자와 시청자가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다.다른 의사 출신 소설가들과 구별되는 대표적인 차별점은 무엇인가.나는 칼을 잡는 외과의사이면서, 정신을 해부한다. 아마도 정신과 전문의를 희망했던 과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작품에서 서구 의료라는 소재로 동양적인 사상을 표현하며 동서 융합적인 작품을 추구한다.소설 속에 의료 현장이 현실적으로 투영되다 보니 환자들의 사생활이나 의료 정보가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을 것 같다.실제 인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는 없다. 한 인물의 독특한 측면을 기술한다고 하더라도 성별, 나이, 출신배경 등 모든 특성은 변경된다. 주인공은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인물이 융합된 가상 인물이므로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지금까지 현장에서 겪은 고충이나 보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나의 소설 [얼굴]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문장으로 대신하고 싶다.“P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의 의식 속에, 그 탐욕 덩어리가 무너지고 난 뒤 피어난 뽀얀 먼지 위로 잊고 있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나이 마흔까지 노총각으로 퇴짜만 맞다가 수술 후 드디어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들고 왔던 남자 환자의 얼굴, 오디션만 수십 번을 보다가 수술을 받고 나서 이제 데뷔하게 되었다고 환하게 웃던 배우 지망생의 얼굴, 뺨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칼자국을 수술로 지우고 나서 행복해하던 어린 여학생의 얼굴, 그 얼굴들…”향후 계획을 들려달라.앞으로도 소설 [마취]와 [얼굴]처럼 의사가 주인공인 소설들을 계속 발표할 것 같다. 의료는 내가 제일 잘 아는 분야이니까. 그리고 우리의 무뎌진 영혼을 순간적으로 일깨울 수 있는 그림을 계속 그리려고 한다. 글과 그림 모두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획, 진행하고 있다. 학문적·지리적 경계를 넘어 좋은 소식이 있다면 전해드리겠다.작가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작품을 만나는 것이 가장 편한 시대이다. 하지만 향긋한 종이 냄새, 잉크 냄새가 나는 책에서 더 깊은 감동을 느끼시기를 기대해본다. 손에 쥘 수 있고, 서가에 꽂을 수도 있는, 물리적인 책이 다시 사랑받는 시대가 돌아오길 바란다.
※ 정승우 - 고려대학교 법학과(학사), 동 대학원(법학 석사, 법학 박사) 졸업 후 2011년 공익재단법인 유중문화재단과 복합문화공간인 유중아트센터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리=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_ 사진 최기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