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정승우가 만난 예술계 파워리더(33) 김유명 작가 

K 의학 소설의 개척자 

정소나 기자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K팝으로 시작한 한류가 K문학으로 정점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료 현장에서 마주한 의료계의 현실을 직시하며 삶과 죽음에 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김유명 작가는 ‘K 의학 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K문학 한류에 일조하고 있다.

▎정승우 이사장과 김유명 작가(왼쪽)가 의료계부터 문학, 미술 등 예술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늘 만나는 김 작가님을 ‘메스를 든 예술가’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의사인 ‘본캐’와 작가인 ‘부캐’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모든 방면에서 출중하신 분이에요. 완벽한 예술미를 추구하는 동시에 삶과 죽음, 탄생이라는 심오한 주제로 여러 권의 의학 소설을 펴낸 스타 작가이기도 해요.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틈틈이 그려온 작품들을 전시회에서 선보이고 있어요.”

정승우 이사장은 인터뷰를 앞두고 이달의 주인공 김유명 작가를 이렇게 소개했다. 정 이사장의 말처럼 성형외과 전문의인 김 작가는 의사라는 직업 세계에서 건져 올린 독특한 소재로 삶과 죽음, 그 이면의 진실을 일깨우는 의학 소설을 집필하고, 그림으로도 같은 주제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그의 소설은 서양의학을 배운 동양인으로서 현대 의학적 소재로 동양 사상의 전통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한강의 소설을 해외에 소개한 KL매니지먼트 이구용 대표는 소설 [마취]를 “화려하고 위대한 것과 그 각각의 이면에 들러붙어 보이지 않는 초라하고 폭력적인 추한 것들을 함께 조명한 소설”이라고 평가하며 해외 저작권 계약을 맺기도 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 독자들에게도 큰 반응을 불러일으킬 잠재력을 가진 작품으로 ‘K 의학 소설의 개척자’를 자처하고 나선 김유명 작가를 만났다.


▎의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생생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의학 소설로 K문학 한류를 리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김유명 작가.
‘본캐’와 ‘부캐’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성형외과를 전공한 후 현재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운영 중인 전문의다. 작가로는 2018년 첫 장편 소설 [마취]를 출판사 가쎄에서 출간하고 화산영화사와 영화 [마취] 판권 계약을 마쳤다. 또 한국 문학 세계화의 주역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와 해외 저작권 계약을 맺었다. 2020년에는 출판사 가쎄와 함께 장편소설 [얼굴]을 출간했고, 2021년 7월에서 8월 사이에는 KBS 라디오 [소설극장]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화가로는 2022년 11~12월에 열린 유중아트센터 ‘힐링캠프’ 초대전에서 ‘축의 중심’ 시리즈를 전시했고, 2023년 10월 서울대학교병원 외래에 100호 대형 작품 ‘얼굴’을 영구 전시하고 헌정했다. 지난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일본 오카야마 텐진야마 문화프라자에서 열린 ‘한국 미술, 과거 현재 미래’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내년 2월 싱가포르 더 아트 하우스에서 열리는 한국-싱가포르 수교 50주년 기념 ‘한국예술축제’에 참여할 작품을 준비 중이다.

‘유명’이라는 필명에 담긴 뜻이 궁금한데.

한자로 깨우칠 ‘유(喩)’, 밝을 ‘명(明)’ 자를 쓴다. 문학이든 그림이든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기에 비유를 통해 진실을 밝히자는 뜻을 담았다. 다른 의미로는 이름을 통해 먼저 ‘유명’ 작가가 되어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재미있게 과정을 즐기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작가가 된 계기가 있나.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를 결정할 때,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이 성형외과와 정신과였다. 결국 크리에이티브한 손재주를 발휘할 성형외과를 택했지만, 정신과 영성에 대한 추구는 늘 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성형외과를 택하고, 레지던트를 하던 시절에도 가운의 주머니 한쪽에는 성형외과 편람, 반대쪽에는 작은 명상 서적이 꽂혀 있었다. 가보지 못한 길, 정신과에 대한 미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림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먹으로 추상화를 그리는 현재의 스타일이 그때 시작되었다.

소설 [마취]를 쓰기 전, 개원 의사로서 외래를 보고 수술하며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내가 매일 반복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를 찾아온 환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얼굴을 선물하며 보람도 느꼈지만, 뭔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1, 2 김 작가의 대표 작품인 ‘축의 중심’ 시리즈. 서양화의 소재인 캔버스와 아크릴로 동양적 ‘공’과 ‘여백’, ‘내면의 세계’를 추상화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 3 삶의 변화를 욕망하는 내용으로 개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직업의 본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 소설 『얼굴』. / 4 매일 반복하는 일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더하기 위해 시작한 소설 『마취』. 전신마취제 부작용을 둘러싼 의료사고를 소재로 삼았다.
한국이라는 동양의 한 나라에 태어나서, 이성과 합리로만 이루어진 서양의학을 기를 쓰고 배웠다. 그리고 여태껏 수많은 수술을 하면서 동시에 마취를 경험했다. 마취는 서양의학이 동양의학과 현저히 차별화되는 점이다. 현대 외과의사들은 여러 가지 마취제를 이용해 환자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의식을 잃게 하고 수술을 한다. 서양의학을 배운 현대 의사들은 환자의 의식을 사라지게 하고 환자의 몸에 메스를 대어 피부 속을 열고 들어가 수술을 하지만, 정작 우리의 심층의식과 각성, 잠과 꿈을 다루는 데는 서툴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환자들을 재우고 깨우며 경험한 특이한 일들, 개인적인 명상의 체험을 소재로 동양적 ‘공사상’과 ‘무아윤회’의 모순을 풀어내려는 시도로 소설 [마취]를 쓰기 시작했다. 어떤 주제보다도 어릴적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던 삶과 죽음의 이면을 밝히는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장편소설 [얼굴]은 탐욕의 막장이 될 수도 있는 성형외과 자체에 대한 우화이다. 유명해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성형외과도 한때 대형화·기업화를 추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에서 주인공 역시 본질을 망각한 채 더 크게, 더 화려하게 탐욕을 추구하다 결국 몰락하는 이야기이다. 천신만고 끝에 유명해지는 소수의 사람이 막상 겪게 되는 것은 개인적 자유의 상실이다. 또 오명을 쓴 사람들은 모두에게 잊히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들을 위해 변신 성형을 제공하며 유명해진 주인공 자신도 결국 모두에게 잊히기 위해 성형수술을 결심한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직업의 본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왜 하필 소설인가.

넌지시 보여주기 위함이다.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깨달은 작은 지혜, 혹은 명상 중에 잠깐 들여다본 진실을 전달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것을 논문으로 쓰면 어떨까? 혹은 교과서로 기술하면? 결국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이야기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을 키워온 생물이다. 다른 어떤 생물에는 없는 인간 만의 독특함은 있을 법한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명과 시스템은 이 상상력을 근거로 발전하고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화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는데.

글을 쓰며 어려운 점은 사람들이 의외로 글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의 어머니조차도 내 작품을 읽지 않으셨다.(웃음) 물론 어머니는 난시가 심해 책을 못 읽는다고는 하시지만 말이다. 물론 작품을 쓰는 기간인 5~6년보다는 짧은 시간이긴 해도 3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을 읽으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린다.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책장을 펼치고 찬찬히 읽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대 작가로서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었다. 영화사와 판권 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한 권의 책이 영화로 재탄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정이다.

같은 주제를 가장 직관적으로, 빠른 시간에 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회화이다. 그림을 보는 데는 독서만큼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마치 다트처럼 관람자의 심장을 순간적으로 꿰뚫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에 수행하는 명상 속에서 느끼는 것들, 어려운 수술을 앞두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신에 대한 헌신과 자아 초월의 염원을 그림으로 그렸다. 작품을 소개하는 홈페이지(www.surgeonstrange.com)에서 ‘축의 중심’ 시리즈, ‘지켜봄’ 시리즈, ‘영원’ 시리즈 등 그림들과 각 그림의 주제와 일치하는 소설 속 문장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해외에는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 테스 게리첸 등 의사 겸 소설가가 많지만 국내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다. 마이클 크라이튼 같은 의사 출신 작가가 내 롤 모델이다. 하버드의대를 나와 영화 [쥬라기 공원] 원작이 된 작품을 쓴 마이클 크라이튼 같은 작가가 되어, 전문 직업 세계에서 낚아 올린 싱싱하고 신기한 소재로 식상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써서 한국의 국격을 높이고 동양의 깊은 멋을 서구에도 알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리고[셜록 홈스] 시리즈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 경도 내 롤 모델이다. 그 역시 안과의사로 개업해 활동하며 탐정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그가 진정으로 쓰고 싶은 책은 영성에 관한 책이었는데, [셜록 홈스]를 절필하고 매달렸지만 잘 안 팔렸다고 한다. 작품성과 상업성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상업적 소재에 진지한 주제의식을 남 모르게 끼워 넣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창작 활동이 진료 활동에 방해가 된 적은 없나.

그런 염려 때문에 김유명이라는 필명으로만 작품 활동을 한다. 두 가지 캐릭터가 섞이면 자칫 양쪽에 모두 피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나를 아는 친구들은 실명으로 글을 쓰면 병원 홍보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들 하지만 나의 문학에 대한, 회화에 대한 진심이 오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로 주말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므로 진료 시 집중력이 떨어지는 일은 없다.

다른 분야에 종사하며 예술 활동을 겸하는 사람들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하는데.

현대에는 직업의 세분화가 곧 전문화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의료에서도 너무 장기별로, 질환별로 세분화되다 보니 제각각 병은 고쳤는데 환자는 사망했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는 거다. 이제는 전체를 보는 제너럴리스트가 전문가인 세상이 온다. 경계를 넘을 때 새로운 가치가 생겨난다. 전문적인 직업 세계의 생생하고 특별한 이야기는 그 직업을 수십 년 경험한 사람들 외에는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직업을 가진 모두가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신기한 이야기들을 독자와 시청자가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다.

다른 의사 출신 소설가들과 구별되는 대표적인 차별점은 무엇인가.

나는 칼을 잡는 외과의사이면서, 정신을 해부한다. 아마도 정신과 전문의를 희망했던 과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작품에서 서구 의료라는 소재로 동양적인 사상을 표현하며 동서 융합적인 작품을 추구한다.

소설 속에 의료 현장이 현실적으로 투영되다 보니 환자들의 사생활이나 의료 정보가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을 것 같다.

실제 인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는 없다. 한 인물의 독특한 측면을 기술한다고 하더라도 성별, 나이, 출신배경 등 모든 특성은 변경된다. 주인공은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인물이 융합된 가상 인물이므로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겪은 고충이나 보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소설 [얼굴]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문장으로 대신하고 싶다.

“P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의 의식 속에, 그 탐욕 덩어리가 무너지고 난 뒤 피어난 뽀얀 먼지 위로 잊고 있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나이 마흔까지 노총각으로 퇴짜만 맞다가 수술 후 드디어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들고 왔던 남자 환자의 얼굴, 오디션만 수십 번을 보다가 수술을 받고 나서 이제 데뷔하게 되었다고 환하게 웃던 배우 지망생의 얼굴, 뺨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칼자국을 수술로 지우고 나서 행복해하던 어린 여학생의 얼굴, 그 얼굴들…”

향후 계획을 들려달라.

앞으로도 소설 [마취]와 [얼굴]처럼 의사가 주인공인 소설들을 계속 발표할 것 같다. 의료는 내가 제일 잘 아는 분야이니까. 그리고 우리의 무뎌진 영혼을 순간적으로 일깨울 수 있는 그림을 계속 그리려고 한다. 글과 그림 모두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획, 진행하고 있다. 학문적·지리적 경계를 넘어 좋은 소식이 있다면 전해드리겠다.

작가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작품을 만나는 것이 가장 편한 시대이다. 하지만 향긋한 종이 냄새, 잉크 냄새가 나는 책에서 더 깊은 감동을 느끼시기를 기대해본다. 손에 쥘 수 있고, 서가에 꽂을 수도 있는, 물리적인 책이 다시 사랑받는 시대가 돌아오길 바란다.

※ 정승우 - 고려대학교 법학과(학사), 동 대학원(법학 석사, 법학 박사) 졸업 후 2011년 공익재단법인 유중문화재단과 복합문화공간인 유중아트센터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정리=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_ 사진 최기웅 기자

202412호 (2024.11.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