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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주 눔 의장 

사람을 이해하는 기술 

노유선 기자
2005년 정세주 눔 의장은 500만원을 쥔 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몰라주는 자신의 잠재력을 낯선 타지에서 증명해내겠다는 야심 찬 도전이었다. 젊은 창업가의 의지는 결국 기업가치 5조원 규모의 유니콘기업 ‘눔’을 일으켰다. 정 의장은 이제 타인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데 전념할 계획이다.

한번 구겨진 종이는 빳빳했던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한다. 아무리 종이를 펼친다 한들 자국은 기어코 남는다. 하물며 세 번이나 구겨졌던 종이는 어떨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힘든 시절이 남긴 상흔을 완벽하게 없애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그 흔적은 인생의 훈장이 될 수도, 주홍글씨가 될 수도 있다.

디지털헬스케어 기업 눔(NOOM)을 이끄는 정세주(44) 의장은 살면서 세 차례 크게 구겨졌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 한국인 스타트업 성공 신화를 쓴 정 의장은 여느 신화 속 주인공처럼 다사다난한 시절을 보냈다. 의대 진학 실패와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 창업 과정 중 겪은 모멸감 등으로 크게 아팠고 오랜 기간 방황했다. 구김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자 발버둥쳤지만 무모한 시도일 뿐이었다. 인생의 궤도에서 이탈했던 그는 구깃구깃한 종이 위에 새겨진 흔적을 나침반 삼아 살아왔다.

정 의장은 연고도 없는 미국에서 맨손으로 기업가치 약 5조원에 달하는 유니콘기업을 일궈낸 인물이다. 2005년 창업이란 큰 뜻을 품고 미국에 도착했지만 수중에는 500만원밖에 없었다. 뉴욕 할렘가에 거주하며 음식 배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갔고 이방인으로서 억울한 수모도 왕왕 겪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끈기 있게 버텼다. 정 의장은 “내게 사업가적 기질이 잠재한다고 확신했다”며 “자존감에 흠집이 나는 순간에도 언젠가 그 잠재력이 꽃필 날을 기대하며 견뎠다”고 고백했다.

희미한 확신은 선명한 현실이 됐다. 2019년 눔은 세계 최대 벤처캐피털(VC)인 세쿼이아 캐피털에서 5800만 달러(약 675억원)를 투자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2021년에는 시리즈F(상장 전 후기 투자) 펀딩에서 투자금 5억4000만 달러(약 7000억원)를 유치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 반열에 올랐다. 현재 눔의 기업가치는 37억 달러(약 4조8000억원)로, 미국에서 한국인이 세운 스타트업 중 가장 큰 규모다. 정 의장은 “뉴욕 맨해튼에 자리 잡은 비상장 테크기업 중에서 기업가치가 가장 큰 편”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월 9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빌딩에서 만난 정 의장에게선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인터뷰 내내 보여준 쾌활함은 고된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너무나도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에 의아함을 드러내자 정 의장은 “구겨진 종잇살은 인생의 훈장도, 주홍글씨도 아니다”라며 “아름다운 문양으로 내면에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깨달음을 모두 녹여내 지난 2008년 눔을 설립했다. 정 의장은 눔 서비스를 “기술과 과학의 만남”이라고 소개했다.

눔은 사용자가 스스로 생활 습관을 개선해 질병을 예방·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헬스케어 기업이다. 인공지능(AI) 기술로 사용자의 식생활과 생활 습관 등을 분석하고, 인지행동치료 기법(행동심리학)을 기반으로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창업 초반 체중감량·식단 관리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스트레스와 불안증, 당뇨병, 고혈압 등으로 관리 대상을 넓혔다.

오늘날 눔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 걸쳐 5000만 명에 이르는 가입자를 확보했다. 국가별 가입자 비중은 미국이 가장 크고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뒤를 잇는다. 2023년 기준 연 매출액은 약 5억 달러(약 6650억원)다. 정 의장은 “지난해 사용자의 만성질환을 관리하는 비대면 진료 서비스와 약물 처방이 가능한 비만 치료 서비스를 도입하면서 가입자가 가파르게 늘어나는 추세”라며 “과거 웰니스(wellness) 기업에 가까웠던 눔이 전문적인 헬스케어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눔이 창업 초반부터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다. 미국에서 디지털헬스케어 산업은 2010년대 들어 각광받기 시작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미국은 2013년부터 2017년 1분기까지 글로벌 디지털헬스케어 투자액의 75%를 유치했다. 전 세계에서 의료 비용이 가장 높은 상황에서 의료보험 가입률이 감소세를 나타낸 것이 주된 배경이었다. 설립 후 줄곧 영업손실을 면치 못했던 눔은 산업 트렌드 변화에 힘입어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됐다. 2016년 흑자전환 이후 2017년 약 135억원이었던 매출액은 2020년 약 452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사실 눔 서비스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방법은 아닙니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 줄곧 권고해온 예방의학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활용하기 쉽도록 서비스화한 거예요. 소비자의 잠재적 니즈와 모바일 기술 혁신이 만나면서 눔이 비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건강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 커졌죠.”

시대적 요청으로 헬스케어 붐이 강하게 일자 관련 서비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눔은 경쟁에서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유니콘기업으로 성장했다. 정 의장은 눔의 차별화 포인트로 ‘사용자의 지지’를 꼽았다. 테크기업이지만 난해한 기술·솔루션을 앞세우기보다 사용자 편의성·피드백 연구에 전념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기술과 솔루션만 강조했다간 대중에 알려지지 못한 채 사장돼버리겠다고 생각했다”며 “사용자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여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꼽았다”고 덧붙였다.

“미국 초대형 테크기업의 성공 사례를 보면 수많은 사용자의 지지에 기반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기술력은 기본이고요. 눔 역시 효과적인 건강관리 기능을 기본적으로 갖추되 서비스의 대중성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심혈관질환 관리나 혈당 관리보다 다이어트 코칭 서비스라고 했을 때 대중에게 각인되기 쉽겠죠. 체중이 건강 상태를 판단하는 가장 가시적이고 직관적인 척도니까요. 이런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서비스 인지도와 신뢰도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더군요.”

눔은 사용자 데이터와 피드백으로 서비스 개선을 거듭했다. 정 의장은 “사용자 수천만 명의 데이터와 피드백을 기반으로 AI 알고리즘을 계속 고도화해나갔다”며 “눔 서비스로 건강을 되찾은 사용자가 입소문을 퍼트리면서 눔은 전체 미국인 중 58% 이상이 인지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고 강조했다. 높은 인지도는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사업에서 B2B(기업 간 거래) 사업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보험사와 제약사 등이 먼저 사업 제휴를 제안하는 한편 일반 대기업은 직원 복지의 일환으로 눔을 활용하고 있다.

500만원 들고 미국행… 16년 뒤 기업가치 5조원


스스로 “인생에서 크게 세 번 구겨졌다”고 말할 만큼 정 의장이 기업가치 5조원 규모 유니콘을 설립하기까지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난 그는 의사였던 아버지와 유독 사이가 좋았다. 아버지를 롤 모델 삼아 의대 진학을 꿈꿨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 의장은 “의대 진학에 실패했을 때 난생처음으로 오열했다.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에 방 안에서 혼자 눈물을 쏟았다”며 “자존감이 전혀 없는, 오로지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학생이었다”고 고백했다.

1999년 홍익대 전기전자공학과에 진학한 후에는 헤비메탈 음악에 푹 빠져 공부와 담을 쌓았다. 대신 이 시기는 창업에 눈길을 돌린 결정적 터닝 포인트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한 번도 반장을 놓친 적이 없었다”는 정 의장은 “친구들을 통솔하길 좋아하는 리더 기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 감명 깊게 봤던 다큐멘터리 [성공시대]도 그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무리를 이끄는 리더형 성격과 [성공시대] 주인공을 향한 동경이 자연스럽게 창업으로 이어졌다. 정 의장은 “비록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지 못했지만 내 안에 있는 재능을 사회에 증명하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대학 때 헤비메탈 음악 프로덕션 ‘바이하드’를 설립한 게 첫 창업이었어요. 경영에 재미를 느꼈고 사업도 잘됐습니다. 설립 6개월 만에 순수익으로 1억원을 벌었어요. 제게 내재된 사업가적 기질을 확인하면서 그동안 저를 억눌러왔던 열등감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창업 덕분에 자존감을 다소 회복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성공에 따른 기쁨도 잠시, 곧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정 의장은 “돈을 벌면서도 무언가 허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며 ‘도대체 행복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등 인생의 본질적 질문에 천착했다고 돌이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 의장이 대학 2학년 때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아버지마저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를 회고하던 정 의장은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인생이란 길을 주행하던 중 어마어마한 혼란에 빠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며 “빅뱅과도 같은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하고 함께 TV 뉴스를 보는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를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매일 밤 9시가 되면 TV 앞에서 아버지와 뉴스를 보곤 했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 때까지 이어온 루틴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죠. 제가 다리를 주물러드리면 아버지께선 뉴스에 대한 배경지식을 쉽게 풀어 설명해주셨어요. 가정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면서 동시에 세상을 보는 눈도 뜰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은 정 의장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정 의장은 “아버지께서 ‘세주야, 넌 왜 사업을 하니’라며 ‘네 재능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면 좋겠다’고 당부하셨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잘 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해온 건 사업이 아니라 ‘장사’였어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사업하는 사람은 ‘장사꾼’이지 ‘진정한 경영자’는 아니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프로덕션 사업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면서 자연스레 사업을 접고 군대에 입대했죠.”

군에서 하루 종일 무거운 군장을 메고 행군하면서 정 의장은 쉼 없이 생각했다. 그동안의 인생을 성찰하는 한편,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고찰했다. 병사들이 훈련하는 동안 장교는 점수를 매기는데, 두 가지 지표가 고득점에 가장 주효했다고 한다. 첫째는 ‘똑같은 걸음으로 잘 걷는지’ 점검하고 둘째는 ‘후배와 동료를 잘 챙기는지’ 살펴본다는 것이다. 정 의장은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든 상황에 타인을 돕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며 “고난을 겪을 때 인간의 본질,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누군가를 가장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그가 힘들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봐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학벌로 사람을 쉽게 재단한다”고 지적했다.

“사실 창업에 성공했어도 의대 진학 실패에 따른 멍자국이 가슴에 남아 있었어요. 세상이 저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억울함이 있었죠.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정말 싫었습니다. 군에서 경험한 잣대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더욱 공정하다고 생각했죠. 제 잠재력과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으려면 한국이란 시스템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잣대가 있다는 믿음으로 미국으로 떠난 거죠.”

전역 후 과감하게 대학을 중퇴한 정 의장은 일주일도 채 안 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영화 [박하사탕] 속 남자주인공 같았다고 했다.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듯 정 의장도 그렇게 소리치며 인생을 리셋하고 싶었다는 고백이었다. 그는 “가장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두려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며 “미국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말겠다는 야망만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미국의 여러 도시 중 뉴욕을 택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정 의장은 “만약 샌프란시스코나 LA에서 창업했으면 오늘날의 눔은 없을 것”이라며 “이너서클이 잘 구축된 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방인이 창업하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뉴욕이 그를 반긴 건 아니었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던 터라 6개월 넘도록 변변한 대화라고는 나눈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도 버거웠다. 정 의장은 “뉴욕의 가장 후미진 동네에서 불법 개조한 건물 반지하에 살았다”며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온종일 라디오를 붙잡고 있었고 마트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곤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배달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첫 휴대폰을 장만했을 때 폰에 저장할 번호가 없다는 사실에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어떻게 버텼냐는 질문에 그의 코끝이 붉어졌다.

“인생을 리셋하고자 미국에 왔는데 아무 성과 없이 한국에 돌아갈 순 없었어요. 미국에서 제 잠재력과 재능을 충분히 살려 당당하게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첫 창업으로 사업가적 기질을 확인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다시 창업에 도전할 생각도 어렴풋하게 있었어요. 이후 어느 정도 뉴욕 생활에 적응한 뒤 창업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짐 콜린스의 책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를 읽게 됐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경영 컨설턴트가 업력 100년 이상인 기업이 어떻게 장수할 수 있었는지 연구한 내용이었어요. 머리를 도끼로 강하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잠재력이 최대한 발현되는 세상


낯선 타지에서 이방인이 테크기업을 창업하기란 녹록지 않았다. 정 의장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준비했다. 너무 힘들었다”며 “당시 고생담만으로도 책 몇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다행히 남다른 용기와 순수한 열정, 진지한 도전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창업 당시 27세에 불과했기에 세상 물정을 너무도 몰랐다. 뭘 몰라서 용감했고 순수했다”며 “새로운 도전 앞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진지했다”고 자신했다.

“당시에는 스타트업을 벤처기업이라고 불렀어요. 벤처기업 준비생들의 모임도 활발했죠. 무료 네트워킹 행사도 많았습니다. 이런 모임을 전전하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곤 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구글 엔지니어였던 아텀 페타코프(Artem Petakov)를 만났습니다. 그 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어요. 첫인상에서 그가 집중력이 뛰어난 엔지니어라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헬스케어 산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제게 부족한 재주를 가진 아텀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저와 아텀이 가진, 서로 다른 장점이 만난다면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습니다.”

모임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간 정 의장은 그날 밤 장문의 편지를 써 내려갔다. 아텀에게 보낼 이메일이었다. 정 의장은 자기소개를 담은 이메일을 보냈고 그의 정성에 감동한 아텀은 정 의장에게 마음을 열고 공동 창업에 뜻을 모았다. 디지털헬스케어 붐이란 산업 트렌드를 일찍이 감지한 그들은 디지털 기술과 행동심리학에 기반한 코칭, 과학적 지식(생물학, 의학, 심리학 등)을 결합하면 시장성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2008년 비로소 눔이라는 혁신적인 헬스케어 서비스가 탄생했다.

눔의 미션은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이 더 오래, 더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다(Help everyone, everywhere, live better longer)’는 것이다. 정 의장이 정의하는 ‘더 나은 삶’은 무엇일까. 그는 “단순히 기대수명이 높고 무병장수하는 세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더 나은 삶을 결정하는 최대 요인은 개인의 잠재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을 원했듯, 타인의 잠재력에도 관심이 깊다. “‘잠재력’이란 단어는 제 인생과 눔을 모두 관통하는 단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건강을 잃으면 매사에 위축되고 자신감이 떨어져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죠. 눔 서비스는 개인의 잠재력이 최대한 발현될 수 있도록 육체적·정신적 건강 기반을 다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저는 눔의 미션이 매우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눔을 이용해 건강을 회복한 사용자들은 자신의 스토리를 피드백으로 남기곤 합니다. 고맙다는 후기를 읽을 때마다 이 일의 보람을 느낍니다.”

눔은 어느덧 설립 18년 차에 들었다. 수많은 스타트업의 흥망성쇠 속에서 눔이 살아남고 또 오랫동안 롱런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정 의장은 크게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발 빠른 혁신이다. 그는 “스타트업은 속도전이다. 속도, 속도 또 속도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눔을 운영하며 어떤 해도 순조롭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며 “눔을 복제하듯 벤치마킹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계속해서 기술을 고도화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선보여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제품이 출시되는 즉시 구닥다리로 취급받는 세상에서 테크기업은 빠른 속도로 혁신하고 지속적으로 사용자에게 놀라움을 선사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둘째는 무조건적인 낙관은 금물이라는 점이다. 정 의장은 “기업 운영상 부족한 점과 한계점은 늘 보이기 마련”이라며 부정적인 생각과 비판적인 고민을 기업 성장의 밑거름으로 봤다. 다만, 해가 떠 있을 때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뛰어야 한다”며 “낮에는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해가 진 뒤에는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모든 문제의 해결과 예방은 ‘소통’에 있다”고 강조했다. 눔에선 구성원 간 의견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격주로 경영 전문 상담가를 초청해 구성원이 회사에 아쉬운 점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매주 금요일에는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세션을 마련해 회사의 비전과 미션, 성장 전략을 공유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해가 지고 나서


▎어린 시절 정 의장은 부친과 유달리 친밀했다.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는 정 의장의 창업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지난 2023년 정 의장은 힘겨웠던 창업 여정과 유니콘기업으로의 성장 과정을 뒤로하고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는 “이제는 후배들의 스타트업 창업과 기업경영을 돕는 든든한 선배가 되고 싶다”며 “모든 창업자에게는 온몸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들이 더는 상처 입지 않도록, 불필요한 고통을 겪지 않도록 돕겠다”고 자못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창업은 인생의 쓴맛을 더 쓰게 느끼는 일”이라며 “기업 규모와 무관하게 모든 창업자가 느끼는 스트레스의 무게는 같다”고 강조했다.

“저는 특히 EQ(감정지수, Emotional intelligence Quotient)가 높은 탓에 수치스러운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EQ가 높다는 건 상대방의 기분 파악에 능하다는 겁니다. 투자금을 유치하고자 여러 사람 앞에서 피칭할 때마다 앞에 앉은 이들의 눈빛을 모두 읽으며 수치스럽고 괴로웠어요. 상대방이 제 말에 흥미를 잃은 듯 보여도, 또 시종일관 저를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도 꿋꿋하게 눔을 소개했습니다. 속으론 부끄럽지만 겉으로는 자신감 있게 보이고자 노력하는 동안 위궤양에 걸리기도 했어요. 그만큼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상당했다는 거죠.”

스타트업 창업가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는 정 의장은 지난해 이기하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대표와 합심해 ‘한인창업자연합(United Korean Founders·UKF)’을 발족했다. 미주 지역 내 한인 기업가들의 창업 생태계 조성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앞서 ‘코리안 스타트업 포럼 뉴욕’이란 행사를 이끌었던 정 의장이 미국 서부에서 비슷한 행사로 ‘82 스타트업’을 운영하던 이 대표와 뜻을 합쳐 두 행사를 통합한 것이다. 정 의장은 “UKF 발족 후 미국 전역에 있는 한인 스타트업 단체들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며 “한인 스타트업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UKF는 올가을 미국 최대 한인 축제를 기획 중이다. 정 의장은 “한인 스타트업 생태계에 속한 선후배가 UKF를 통해 서로 끌어주고 도와주길 바란다”며 “한국인의 강한 응집력을 UKF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정 의장은 머지않아 UKF가 국내 강소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는 교두보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한국 소도시 곳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강소기업이 많다. 기술력이 상당한 데 반해 우물 안 개구리로 제자리걸음 중인 게 현실”이라며 “강소기업이 더 큰 무대에서 기술력과 성장성을 인정받도록 이바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어 “내가 창업할 때 겪었던 고생을 이들은 피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며 “이들이 글로벌기업으로 발돋움하면 한국의 지역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의장은 제프 쿡(Geoff Cook) 신임 CEO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뒤 비로소 철학적 사색의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껏 겪은 수많은 경험에서 추상적인 깨달음을 도출하고 이를 구체적인 언어로 정립하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고 했다. 그에게 ‘성공’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정 의장은 “젊었을 땐 제 잠재력을 인정받고 눔을 안정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면 성공인 줄 알았다”며 “이제는 임팩트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성공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임팩트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얼마나 좋은 영향을 세상에 남겼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미와 보람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최근 헨리 크라운(Henry Crown)이란 모임에서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이끌지 고민하고 있어요. 많은 이의 잠재력을 캐치하고 극대화하는 데 이바지하겠습니다. 이런 게 진정한 성공 아닐까요?”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502호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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