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설립된 핀테크 스타트업 트래블월렛의 누적 거래액이 4조8000억원을 돌파했다. 2024년 매출액은 400억원을 웃돌 전망이다. 스타트업 혹한기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고속 성장을 멈추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 김형우 트래블월렛 대표가 인터뷰 내내 수차례 강조한 ‘효율성’에 답이 있었다.
▎김형우 트래블월렛 대표는 금융시장의 복잡한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창업을 결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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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을 떠날 때면 외화 결제 카드를 여러 장 챙기곤 했다. 또 현지에서 급하게 외화가 필요하면 은행이나 환전소를 방문해야 했다. 이러한 번거로움이 ‘옛 추억’이 된 건 핀테크 스타트업 트래블월렛(travel Wallet) 덕분이다. ‘카드 한 장으로 떠나는 세계여행’을 표방하는 트래블월렛은 2021년 한 카드에 여러 통화를 충전할 수 있는 ‘멀티-커런시(Multi-Currency)’ 서비스 트래블페이를 선보였다. 트래블페이는 북미와 유럽, 아시아, 남미,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총 46개국 통화를 미리 충전해 낮은 수수료로 환전·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다.국내 여러 카드사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내놨지만 트래블페이의 아성을 넘지는 못했다. 지난해 말 트래블페이 카드는 누적 발급 건수 630만 건을 돌파했다. 고객 편의성에 방점을 둔 독보적인 서비스 덕분이다. 사용자는 모바일카드인 트래블페이 카드를 실물 카드 형태로 발급받으면 현지 ATM에서 외화를 인출할 수 있고, 여행 후 남은 충전금을 수수료 없이 다시 한화로 환전할 수도 있다. 트래블페이가 오늘날 여행객의 필수품으로 불리는 이유다.국내 대형 자산운용사에서 외환딜러로 일했던 김형우(39) 대표는 2017년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트래블월렛을 설립했다. 김 대표의 창업 계기는 ‘비효율의 효율화’로 요약된다. 그는 금융사의 업무 행태와 기존 외환시장의 시스템이 모두 비효율적이라고 봤다. 그는 “이른바 ‘일을 위한 일’이 다반사였다”며 “부수적인 업무 때문에 불필요하게 야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직장인 시절 전체 업무의 80%는 보고서 작성을 비롯한 부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일이 20%밖에 안 된다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죠. 당시에도 업무 자동화시스템이 있었지만 극히 일부분에만 활용됐을 뿐,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100명이 할 수 있는 일을 500명이 하는 식이었어요. 쓸데없는 일을 없애고 작업을 간소화하는 스타트업을 꿈꿨던 이유입니다.”문제는 업무 방식뿐 아니라 환전·외화 결제 시스템도 비효율적이라는 점이었다. 고려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영국 런던경영대학교에서 금융공학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금융과 IT(정보기술) 분야에 두루 박식했다. 김 대표는 “당시 환전·외화 결제 시스템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며 “IT를 활용해 복잡한 금융 프로세스를 간소화하고자 했다”고 창업 배경을 설명했다. 그가 기획한 사업 모델은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중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시장을 겨냥한 크로스보더 환전·결제 서비스가 사업화로 이어져 오늘날의 트래블월렛이 탄생했다.
공급자 중심 금융시장을 소비자 중심으로
▎김형우 트래블월렛 대표(왼쪽)와 김익환 한세실업 부회장은 비효율적 업무 시스템을 간소화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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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표는 복잡한 해외 결제 정산 구조를 단순화하는데 방점을 뒀다. ▶해외 결제 ▶현지 금융사 ▶글로벌 결제 브랜드사 ▶국내 금융사 ▶카드사 ▶소비자로 이어지는 기존 프로세스에서 소비자는 절차마다 수수료를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수수료 누수 현상을 해결하고자 트래블월렛은 2020년 아시아 최초로 비자(VISA) 카드 발급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또 결제 프로세스에 참여하는 중간 사업자를 모두 없애 ▶해외 결제 ▶트래블월렛 ▶소비자로 절차를 간소화했다.최근 트래블월렛은 B2B(기업 간 거래) 서비스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B2C와 B2B 사업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야심 찬 포부다. 지난 2023년 트래블월렛은 자체 개발한 클라우드 기반 지불결제 솔루션을 다른 금융사에 제공하는 비즈니스를 론칭했다. 김 대표는 “지난해는 B2B 비즈니스의 기반을 다지는 해였다”며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B2B 성과가 가시화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지난 1월 15일 서울 강남에 있는 트래블월렛 본사에서 김 대표와 김익환 한세실업 부회장이 만났다. 김 대표에게 트래블월렛이 고속 성장한 비결과 새로운 B2B 비즈니스의 청사진, 향후 발전 전략 등을 물었다.
설립 6년 만에 누적 거래액 4조8000억원을 돌파했다. 고속 성장의 비결이 있다면.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선점효과다. 크로스보더 환전·외화 결제 서비스로 금융시장에 빠르게 진입해 어젠다를 선점한 것이 가장 주효했다. 선두 주자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한 후발 주자는 이미 공고해진 시장 판도를 뒤집기 어렵다. 엄청난 자금과 어마어마한 노력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트래블월렛’이라는 네이밍도 선점효과에 한몫했다. 둘째는 뛰어난 기술력이다. 트래블월렛의 IT 시스템이 타 금융사보다 더욱 빠르고 유연하다고 자신한다. 트래블월렛은 전 세계 어디서든지 압도적인 결제·송금 속도를 자랑한다.
클라우드 기술을 도입한 배경은 무엇인가.클라우드 도입은 회사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나자 거래량이 폭증하고 평균 단가도 치솟았다. 갑작스런 변화에 스타트업으로서 대응하기가 벅찼다.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더라. 이 상태가 2년 이상 지속되다간 회사가 문을 닫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구성원들과 치열하게 고민하던 중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클라우드 기술을 택했다. 당시만 해도 지불·결제에 필요한 IT 시스템 인프라를 100% 전부 클라우드에 올린 전례가 없었다. 당연히 가이드라인이 없었기에 맨땅에 헤딩하듯 자체적으로 클라우드 기술을 도입했다.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단 시도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클라우드에 대한 국내 규제가 전면 완화되는 등 운도 따랐다. 클라우드는 트래블월렛에 신의 한 수나 다름없었다.
클라우드의 장점은 무엇인가.우선 진입장벽이 낮다. 클라우드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관리하는 비용이 기존 데이터센터와 비교해 상당히 낮은 편이다. IT 속도도 빠르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오류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고 미세 조정을 통해 예상되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다. 특히 고객의 니즈와 피드백을 발 빠르게 서비스에 반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고객센터에 신규 서비스 요청이나 불편 신고 등이 올라오면 바로바로 해결하는 편이다. 클라우드 기반이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는 기능을 곧바로 서비스에 추가할 수 있다. 트래블월렛의 고객 편의성이 높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기존 금융시장이 공급자 중심으로 돌아갔다면 트래블월렛을 계기로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물론 적지 않은 기업이 안전성을 우려해 클라우드를 섣불리 도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불과하다. 오히려 클라우드는 기존 데이터센터와 비교해 보안성이 뛰어나다. 모든 작업의 발자국이 기록에 남기 때문이다.
B2B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다.창업 초반 B2B 비즈니스를 구상했지만 수익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핀테크에 초짜나 다름없는 트래블월렛에 일을 믿고 맡길 기업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B2C 서비스를 도입해 성과를 낸 뒤 B2B 시장에 진입하는 방향으로 로드맵을 세웠다. B2C 사업을 먼저 진행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트래블페이에서 터득한 외환 관련 기술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트래블월렛은 클라우드의 A부터 Z까지 직접 구축하면서 자체적인 노하우를 축적했다. 클라우드 기술과 트래블월렛의 노하우를 결합하면 시장성이 있겠다고 판단해 B2B 사업을 시작했다. B2B 비즈니스는 금융사에 클라우드 기반 지급결제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골자다. IT 인프라를 클라우드에 구현해 인프라 설치·관리 비용을 낮추고 업무 효율성을 향상했다. 또 정산 과정을 단순화·자동화해 수수료를 큰 폭으로 낮췄다. 특히 기업의 기존 전산망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기업 맞춤형 클라우드 서비스를 구축한다는 이점이 있다. 이미 신한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 등 여러 은행과 증권사, 카드사가 트래블월렛 클라우드 솔루션을 이용하는 중이다.
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진화그렇다면 B2C 비즈니스는 후순위로 밀리는 것인가.아니다. B2B 사업에 집중한다 해서 트래블월렛이 B2C 비즈니스에 소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해 트래블월렛은 국내 결제 서비스 영역으로 B2C 사업을 확장했다. 여행 친구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소셜페이’ 서비스와 모임 비용을 간편하게 더치페이할 수 있는 ‘N빵 결제’ 기능을 론칭했다. 소셜페이는 동행자를 구하는 여행객을 위한 트래블월렛 애플리케이션 내 플랫폼이다. 계좌·신분증·연락처 등 개인정보를 입력한 사용자만 참여할 수 있어 사기 거래 등 범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또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의 개인별 신뢰도 평가제인 ‘매너온도’와 유사한 평가 시스템도 도입할 방침이다. 사용자가 서로의 매너를 평가해 수치화하면 상대방에 대한 우려와 의심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소셜페이란 명칭을 ‘소셜’로 바꿀 계획이다.N빵 결제는 결제자 한 명이 카드로 지불하면 모임에 속한 사람들의 카드에서도 금액이 N분의 1로 나눠져 결제되는 시스템이다. 이를 위해 카드와 QR, 근거리무선통신(NFC), 온라인, 오프라인 등 다양한 결제 방식에 사용할 수 있는 더치페이 관련 분할 결제 기술에 대한 특허도 획득했다. 한편 국내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 위한 방안으로 GS리테일과 협업해 GS25 편의점 ATM에서 트래블페이 카드를 즉시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
마케팅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모양새다.마케팅이 통하는 업종이 있고 그렇지 않는 업종이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이나 커머스 분야는 마케팅 성과가 즉각적으로 나오지만 금융업은 마케팅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 요즘에도 많은 카드사가 신규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해 ‘카드 발급 시 현금 지급 이벤트’를 진행하는 데, 그만큼 마케팅 효과가 없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트래블월렛은 마케팅 비용을 기술개발 비용으로 돌리고 전체 인력의 80%를 IT 개발팀에 투입하고 있다.
트래블월렛의 중단기 목표와 궁극적인 비전은 무엇인가.단기적으로는 오는 2월 론칭 예정인 기업용 송금망 서비스가 안정 궤도에 오르길 바란다. 각 기업의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에 트래블월렛이 개발한 송금 자동화 솔루션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기업 맞춤형으로 공급할 예정이며, 이미 국내 여행 플랫폼 회사와 글로벌 금융사 등이 베타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트래블월렛이 클라우드 기반 IT 금융시스템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술로 업계 1위를 점하길 바란다. 사실 시장점유율 목표치나 명확한 KPI(핵심성과지표) 등을 정해놓지 않았다. 우선 최고의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트래블월렛의 최우선 과제다. 어떤 테크기업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고 싶다.
※ 김익환 - 노동력 위주의 제조업인 한세실업에 IT를 접목해 성과를 내고 있는 혁신 CEO다. 한세드림, 한세엠케이, FRJ 등 패션 자회사들의 경영에 직접 참여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며 2022년 2조2142억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다. 최근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갖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