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한국 신발산업 전성기를 이끈 부산에 디지털전환 바람이 불고 있다. 부산에 자리한 슈즈테크 스타트업 크리스틴컴퍼니는 신발 제작 과정을 디지털화해 정보의 투명성과 생산 효율성을 높였다. 부산 신발산업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는 이민봉 크리스틴컴퍼니 대표를 만났다.

▎이민봉 크리스틴컴퍼니 대표는 유년기 추억을 밑거름으로 창업에 도전했다. |
|
1970년대 한국 수출의 견인차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이었다. 그중에서도 신발산업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1977년 4억8000만 달러였던 신발 수출액은 10년 만에 5배 이상 늘었고 1990년 들어선 43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한국 신발산업의 황금기를 이끈 곳은 부산광역시였다. 1970~80년대 부산은 세계 최대 규모 신발 공장으로 꼽혔던 국제상사를 중심으로 신발산업 클러스터를 이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생산 거점이 이동하면서 부산의 신발산업은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이후 부산테크노파크가 신발패션진흥단을 마련하고 중소벤처기업부가 부산진구를 ‘신발산업 성장거점 특구’로 지정했지만 과거 같은 전성기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이민봉 크리스틴컴퍼니 대표는 “산업 생태계에 새로 유입되는 차세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신발 자재 사업을 하던 부모님을 따라 1980년대를 신발 공장에서 보낸 이 대표는 부산 신발 생태계의 뼈아픈 현실에 안타까워했다. 그는 “유년기를 함께 보낸 업계 2세들 중 일부만 가업을 잇는 실정”이라며 “남은 이들과 신발 네트워크를 구축했지만 이마저도 이어갈 새로운 세대가 없다”고 토로했다.이 대표는 부산 신발산업 침체의 원인으로 미흡한 디지털전환(DX)을 들었다. 그는 “젊은 층에게 신발산업이 단순노동 중심의 3D(Difficult, Dirty, Dangerous) 업종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며 “첨단기술로 산업구조를 바꾸면 새로운 세대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 2019년 이 대표가 슈즈테크 스타트업 크리스틴컴퍼니를 설립한 이유다. 크리스틴컴퍼니는 인공지능(AI) 기반 신발 제조 솔루션 플랫폼 ‘신플(SINPLE)’을 운영한다. 신발 브랜드와 제조 공장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기존 오프라인 방식의 신발 제조공정을 디지털화한 결과물이다.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이 대표는 5년간 LG유플러스 PI(Process Innovation)팀에서 일하다 2018년 부산으로 돌아왔다. 한때 신발산업의 메카였던 부산에서의 추억이 그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이 대표는 “사실 2017년 서울에 있을 때부터 신발 공장 리스트를 작성하는 등 창업 준비를 해왔다”며 “신발 도매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신발 생태계 구조를 몸소 익혔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가 무색하게도 DX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지난 3월 12일 서울 중앙일보빌딩에서 김익환 한세실업 부회장과 만난 이 대표는 “1970년대부터 이어져온 고착화된 구조를 깨기는 상당히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어느덧 7년 차 CEO가 된 그에게 지난한 창업 여정과 슈즈테크 사업의 성과, 청사진 등을 물었다.
신발 제조공정을 심플하게
▎김익환 한세실업 부회장(좌)과 이민봉 크리스틴컴퍼니 대표는 제조업의 디지털전환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
|
신발 제조공정은 재단과 봉제, 결합, 광택, 채색, 스티칭, 검수 등 복잡다단한 작업으로 이뤄진다. 기존 방식의 문제는 단계마다 중개인이 개입해 제조 기일이 늘어진다는 점이었다. 공정 전반이 투명하지 못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고자 이 대표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는 “신발을 심플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플랫폼명을 ‘신플’이라 정했다”며 대화를 이어갔다.
신플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신발 제작 과정을 빅데이터와 AI 기술로 돕는 솔루션이다. 신발 브랜드사가 신플에 디자인을 업로드하면 AI가 견적을 내고 공정별 최적의 공장을 찾는다. 공정 타임라인에 맞게 가동 가능한 공장을 매칭하기 때문에 6개월 가량 걸리던 제작 기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투명한 견적 비교 데이터와 뚜렷한 공정, 빠른 제작, 원가절감 등이 주요 장점이다. 브랜드사가 요구하는 최소 주문 수량(MOQ)에 맞추는 것도 신플의 차별성 중 하나다. 크리스틴컴퍼니는 이에 머물지 않고 신플에 유통과 물류(보관), 배송 서비스 등을 추가해 신발 제작의 A부터 Z까지 책임지는 원스톱 솔루션을 완성하고자 한다.
공정별 공장 데이터는 어떻게 수집했나.국내에 있는 신발 관련 공장은 총 1000여 개에 달한다. 그중 70%가 부산·울산·경남에 밀집해 있다. 현재 확보한 협력 공장은 약 450곳이다. 통계청 자료를 참고해 부울경에 있는 신발 공장을 추린 뒤 모든 곳을 직접 방문해 설득한 결과다. 발품을 팔아 공장을 찾아가도 만나주는 사장님이 별로 없었다. 풋내기 스타트업 대표의 제안에 섣불리 귀를 쫑긋 기울일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지만 60대 이상 사장님 중에는 신발산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분이 많았다. 자녀가 공장을 물려받지 않으려 하니 답답할 노릇인 거다. 다행히 그들이 내가 내민 손을 잡아줬다.이른바 ‘뻗치기’ 에피소드도 있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공장을 협력사로 확보하면 신플을 신뢰하는 공장이 늘어날 것으로 봤다. 그 공장을 찾아 사장님이 출근할 때까지 문 앞에서 3시간 넘게 기다렸다. 그런데 어렵사리 마주친 사장님이 날 보더니 그냥 지나가버리더라. 문 앞에서 보란 듯이 2시간을 더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자 마침내 우리의 사업 제안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부산의 여러 공장을 협력사로 확보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과 비교해 영세한 공장이 많았을 텐데.산업현장을 살펴보며 격세지감에 마음이 아팠다. 공장 규모와 상관없이 업계 종사자 모두 처우가 좋지 않았다. 복지는 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 5060세대인데 힘들게 일해도 대우가 그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자녀들이 일을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르신들이 쌓아온 노하우가 제대로 대접받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신발 제조업은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밀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기술력과 신발 퀄리티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지역과 비교해 월등히 높다. 오랫동안 농익은 노하우 덕분이다.
AI는 어떻게 학습시켰는가.우선 공정별 공장 라인과 월 단위 생산능력(CAPA), 공장별 신발 종류, 정직원 수 등을 수집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했다. 이러한 정량적 데이터에 더해 공장 운영 방식을 정성 분석한 자료도 AI에 학습시켰다. 단순히 공장만 중개해서는 제조 과정의 효율성을 높일 수 없다고 보고 매니징에 필요한 데이터를 AI에 적용했다. 공장 운영 방식에는 공장 대표의 성향이 반영되기 마련이라 부품 공장과 제조 공장 간 조화도 중요한 포인트다. 두 곳의 손발이 맞아야 공정 전환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고도화된 AI라도 창작 영역 넘볼 수 없어글로벌 경쟁 시대에 기술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나.그렇다. 기술력과 효율성만으로는 전 세계를 상대할 수 없다. 감도 높은 브랜드가 국내 생산기술과 만난다면 글로벌 경쟁력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감도가 높다’는 말은 패션업계에서 세련된 스타일을 표현하는 용어다. 크리스틴컴퍼니가 디자인 추천·제안 기능을 갖춘 AI를 개발한 이유다. 트렌드 변화에 따라 가지각색의 신발이 인기몰이를 했는데, 그들의 주요 특징(소재, 컬러, 밑창, 브랜드 정체성 등)을 세분화해 라벨링한 결과물을 AI에 입력했다. 지금까지 학습량은 20만 건 정도다. 덕분에 브랜드사가 아직 디자인 기획 단계에 머물러 있을 경우 신플 AI가 시즌별 디자인을 제안하기도 한다.
AI가 디자이너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보나.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리 AI가 만능이라지만 AI 학습데이터를 만드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한다. 패션의 마지막 감성을 완성하는 일 역시 사람의 역할이다. 창작 영역은 AI가 주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기획 과정에서 AI의 추천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AI 아이디어를 실제로 디자인에 반영할지 여부와 어떻게 어느 정도 적용할지 결정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AI가 추천한 디자인을 브랜드 정체성과 최신 트렌드에 맞게 수정·보완해야 하기 때문이다. 브랜드의 특징과 정체성, 차별성, 가치관 등을 반영하는 일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 물론 독창성과 개성이 뚜렷하지 않고 대중적인 디자인을 지향하는 브랜드사는 AI 추천에 상당히 의존적이다. 국내 패션브랜드사의 절반 이상은 의류 부문 디자이너와 상품기획(MD) 담당자를 보유하고 있지만 신발 부문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1인 개인사업자(1인 셀러)가 늘어나는 추세다 보니 AI 제안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신플 플랫폼을 활용하는 브랜드사는 현재 어느 정도인가.플랫폼 가입 브랜드사는 625개이고 실제 납품까지 이어진 곳은 20개사에 달한다. 아모멘토나 오호스, 김해 김 등 MZ세대 사이에서 핫한 브랜드 여러 곳이 신플을 이용한다. 주로 무신사나 W컨셉, 29CM 등 이커머스 플랫폼에 입점된 브랜드사다. 코오롱 패션 부문과 국내 대형 검색 플랫폼 기업, 대형 유통사 등과도 협업 논의를 진행 중이다. 최근 국내 유통사는 입점 브랜드 중 시장성이 높다고 판단한 곳을 마케팅 측면에서 지원하는 추세다. 여러 유통사와 협업해 이들이 지원하는 브랜드사를 신플 고객사로 유인하고 있다.
고객사가 아직은 많지 않은 편이다. 어떻게 개선할 계획인가.지난해 1월 신플을 정식 론칭한 점을 고려하면 괜찮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2023년까지 신플은 클로즈 베타버전이었다. 올해는 신플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임해 제품 납품에 성공한 브랜드사가 50곳으로 늘어나길 바란다. 또 올해 매출 예상치는 약 55억원이며 내년에는 세 자릿수 달성이 목표다. 현재는 플랫폼 개발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기술을 고도화하고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해야 AI 기술이 더욱 정교해지기 때문이다. 플랫폼 개발비를 충당하기 위해 동남아 지역 진출도 염두에 두고 있다. 지난 2023년 크리스틴컴퍼니는 나이키 신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인 TKG태광(구 태광실업)으로부터 투자금을 유치했다. 덕분에 동남아 지역 여러 공장과 협업을 논의하고 있다. 신플을 이용해 저가 신발 생산 밸류 체인을 구축할 방침이다.
신발 디자인 지식재산권(IP) 사업도 진행 중이라 들었다.국내외 여러 디자이너가 참여하는 신발 디자인 IP 클라우드 마켓을 준비하고 있다. 디자이너와 브랜드사가 신발 디자인 IP를 거래할 수 있는 마켓이다. 신발로 사업을 다각화하려는 패션 기업이 IP 마켓을 이용하면 효율적으로 시장에 진출할 것으로 전망한다. 현재까지 확보한 IP는 1000여 건이다. 2000건을 달성하면 마켓을 오픈할 계획이다.
크리스틴컴퍼니의 최종 지향점은 무엇인가.국내 신발산업의 상향 평준화를 지향한다. 또한 신플을 거쳐야만 힙한 신발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젊은 세대에게 핫한 브랜드가 신플을 찾게 하는 게 우선이다. 이들이 글로벌 진출에 나서는 여정을 신플이 함께 하고 싶다. 국내 신진 디자이너의 트렌디한 신발이 글로벌 시장의 주류를 대체할 것으로 확신한다.
※ 김익환 - 노동력 위주의 제조업인 한세실업에 IT를 접목해 성과를 내고 있는 혁신 CEO다. 한세드림, 한세엠케이, FRJ 등 패션 자회사들의 경영에 직접 참여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었다. 최근에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갖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