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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PRENEURSHIP - 그리스 요구르트가 미국인의 입맛 사로잡았다 

 

DANIEL GROSS 기자
3000달러 들고 도미한 터키 출신 어학연수생, 건강에 좋은 여과 요구르트로 억만장자 반열에 올라

▎초바니의 창업자 함디 울루카야와 그의 독일 셰퍼드 애완견들.



쿠르드족 출신의 한 터키인이 30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한 뒤 포천 500대 기업이 버린 오래된 요구르트 공장을 인수한다. 그리고 이른바 ‘그리스 요구르트(Greek yogurt)’를 롱아일랜드에 있는 코셔(유대교 율법에 따른 음식) 식품점에 첫 납품한다. 5년 뒤 그 회사는 1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한다.

경제지 포브스는 그 영주권자 기업가를 억만장자로 평가한다. 그의 회사 초바니(Chobani)는 작은 소비재 회사가 어떻게 거대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연구사례로 우뚝 선다.

함디 울루카야(41)는 IT기업 경영자들이 규제완화를 요구할 때 떠올리는 유형의 이민자가 아니다. 그는 고급 엔지니어도, 거액의 투자자도 아니었다. 컴퓨터코드 작성법도 모른다. 하지만 소셜게임 업체 징가나 사진공유 서비스 인스타그램 창업자들보다 미국 경제와 소비자에게 훨씬 더 크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초바니 요구르트는 전 세계에 3000명 안팎의 직원을 뒀다. 미국 내에서 생산된 우유를 한 주에 1만8100여t씩 소비한다. 경제침체에 빠졌던 뉴욕 북부 지역을 그리스 요구르트 생산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게다가 다른 많은 대기업들과 달리 인력을 채용한다. 5월에는 290명의 직원을 모집했다.

초바니는 또한 미국 소비자를 둘러싼 오랜 편견을 깨뜨렸다. 펩시코, 코카콜라, 제너럴 밀스, 크래프트는 수십 년 동안 당분 많고 건강에 해로운 가공된 정크푸드를 식품점에 공급했다. 미국인들의 입맛이 그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뒤 더 질 좋은 틈새 상품이 주류로 올라서며 대중화하는 동안 당혹감과 불안감 속에 지켜본다. 샘 아담스 맥주, 스타벅스 커피, 치포틀 패스트푸드가 대표적이다. 이제 초바니가 그 뒤를 잇는다.

그리스 요구르트는 기본적으로 더 진한 여과 요구르트(strained yogurt)다. 콜레스테롤이나 탄수화물은 많지 않은 대신 단백질은 풍부하다. 제조과정에서 신 맛의 액체 성분을 없애기 때문에 다른 요구르트보다 맛이 더 부드럽다. “그들은 더 진하게 만들면 사람들이 더 좋아하리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설탕을 추가하지 않고 그 일을 해냈다.” 수시로 포장식품 업계를 맹비난하는 뉴욕대 매리언 네슬레 영양학 교수의 말이다.

“(유기농 요구르트의 개척자) 스토니필드도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설탕을 추가했다. 따라서 이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보낼 만하다.” 초바니의 연간 매출액은 10억 달러를 웃돈다. 미국 내 그리스 요구르트 업계의 선두 브랜드다. 각종 요구르트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닐슨에 따르면 2013년 4월로 마감된 회계연도에서 전체 요구르트 매출은 총 61억 달러에 가까웠다.

기업가들은 회사를 창업할 때 자신의 ‘천연자원’을 활용한다. “돈이나 옷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에서 얻은 지식을 밑천으로 삼는다. 내 경우는 아버지의 사업방식에서 얻은 교훈, 그리고 아버지가 좋아했던 제품이었다. 그것이 내 사업의 종자”라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 씨앗이 싹 틔울 수 있는 좋은 토양을 제공했다.” 뉴욕주 뉴벌린에 있는 초바니 공장 내 울루카야의 사무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울루카야가 커다란 독일 셰퍼드 두 마리를 데리고 왔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녀석들이 요란스럽게 물을 마신다. 그는 청바지 차림에 빨강색의 작은 팔찌를 착용했다. 행운을 상징하는 터키 전통의 푸른 눈이 그려졌다. 희끗희끗한 턱수염, 오뚝한 코, 표정이 풍부한 눈을 가진 그는 기업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울루카야는 터키 일리치 출신이다. 아나톨리아 반도 쿠르드족 지방에 있는 주민 10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앙카라 동쪽으로 640여km 가량 떨어져 있다. 그의 가족은 양을 치고 치즈와 요구르트를 만들었다. 7형제 중 한 명인 울루카야는 1994년 영어를 배우러 미국에 도착했다.

뉴욕 시립대버루크 칼리지와 아델피 대학에서 수학했다. 올버니에 있던 조카를 방문한 뒤 뉴욕 북부의 아름다운 산세에 반했다. 그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뉴욕주립대(올버니)에서 생산작업에 관한 에세이를 작성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자신이 잘 아는 페타치즈 제조에 관해 썼다. 깊은 인상을 받은 담당 교수가 자신의 농장을 봐달라고 그를 초청했다.

울루카야의 아버지가 방문했을 때 효자인 그는 최고의 페타치즈를 대접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아버지는 질이 떨어진다고 푸념하며 아들에게 직접 만드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다. 울루카야는 유프라테스를 창업하고 우유 페타치즈를 만들어 도매상에 납품했다.

제한적인 사업경험에 조언자도 없이 울루카야는 시행착오를 통해 장사요령을 터득해갔다. 치즈를 만들고 사람을 고용하고 제품을 고물차에 싣고 동해안 지역을 돌며 고객을 찾아 다녔다. “2002~2004년의 2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생각한다”고 그가 말했다. “2년이 지나자 소규모로나마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최소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2005년 봄 광고 우편물 더미를 뒤적이던 중 작은 광고 하나가 눈에 띄었다. 크래프트사가 뉴벌린의 85년 묵은 설비 완비된 요구르트 공장을 수십 만 달러에 매물로 내놓았다는 내용이었다. 쓰레기통에 던졌다가 나중에 다시 꺼내 들었다. “호기심에서 보러갔다”고 그가 말했다. “공장 책임자가 시설을 안내했다.”

미국 러스트 벨트(사양화한 중공업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100년 가까이 됐으며 오래 방치된 채 인력이 줄고 머지 않아 문을 닫을 공장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방금 본 공장을 매입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그가 돌이켰다.

현지의 키 뱅크 직원들이 중소기업청 프로그램을 소개해줬다. 공장매입에 필요한 융자의 최대 50%까지 보증했다. 2005년 8월 17일 울루카야는 공장 열쇠를 건네 받고 남은 직원 55명 중 제조 책임자를 포함한 4명을 채용했다. 그리고 터키에서 가족과 친분이 있던 요구르트 장인 무스타파 도건을 불러들였다. 서둘러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지역 및 주 경제개발 당국으로부터 수십 만 달러의 보조금을 받았다. 그렇게 창업 멤버 6명이 초바니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몇 달 만에 앞으로는 이 여과 요구르트가 뜨리라는 확신이 섰다”고 그가 말했다. 역시 뉴욕주에 자리잡은 업체 파예가 지중해 지역에서 인기 있는 여과 요구르트를 몇 년 전부터 수입해 왔다. 전문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중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것을 그리스 요구르트로 불렀다. 하지만 터키의 이스탄불과 앙카라 사람들은 당연히 그 이름을 싫어한다.

울루카야는 질을 더 높일수 있다고 믿었다. “초기에는 설탕을 많이 첨가하지 않으면 미국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대기업들이 제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을 뿐이다.” 울루카야는 매장을 찾아가 그리스 요구르트를 구입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시장이 믿는 소비자 취향과 사람들의 기호가 달랐다.” 그는 한창 눈보라가 몰아칠 때 위스컨신을 찾아가 중고 분리기를 구입했다. 여과 요구르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장비였다. 그리고 그 횅댕그렁한 공장에서 2년 가까이 시험에 시험을 거듭하며 배양균과 우유로 균질하고 만족스러운 제품을 만들어내려 노력했다(그 비결은 특허기술이다).

2007년 9월 마침내 출시 준비를 마쳤다. 뉴욕주 그레이트넥에 있는 코셔 식품 판매점 에버 프레시에 첫 납품을 했다. “소매 판매는 전혀 몰랐다”고 울루카야가 말했다. 그를 비롯한 판매팀은 플레인·복숭아·딸기·블루베리·바닐라 요구르트 300 상자를 손으로 포장해 롱아일랜드로 차를 몰았다. 상자 당 12달러에 팔아 4600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

처음 납품한 제품은 금세 팔려나갔다. 에스닉 브랜드는 인기가 높은 편이다. 히브리내셔널 핫도그나 고야 콩 통조림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전국에 공급되더라도 점내에서 특정민족 제품으로 분류돼 진열되는 편이다. 이민자라면 모두 자식의 성공을 바라듯이 울루카야는 자신의 그리스 요구르트가 주류의 물결에 올라타기를 바랐다. “문제는 이 훌륭한 식품을 어떻게 모두가 쉽게 접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점이었다”고 그가 말했다.

홀푸즈 같은 식품매장들은 현지 납품업체를 이용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대형 식품점들은 사실상 그런 시스템을 갖추지 않았다. 실상 그 비즈니스 모델은 대기업 위주로 이뤄졌다. 식품점들이 기본적으로 진열대에 제품을 올려주는 대가로 입점비(slotting fees)로 알려진 임대료를 받기 때문이다.

주류 소매판매 시장에서 초바니의 첫 기회는 대형 식품매장 숍라이트에서 찾아왔다. 입점비를 현금 대신 요구르트로 내겠다는 초바니의 제의를 그들이 받아들였다. “전문품과 자연식품 구역이 아니라 주요 유제품 구역에 진열돼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울루카야가 말했다.

그가 플레인 요구르트를 몇 개 따서 앞에 놓아주자 독일 셰퍼드들이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한다. “내가 이걸 딸 때마다 얘들이 미쳐 날뛰어요.” 소비자들의 반응도 기본적으로 똑같았다. 여과작업 덕분에 6온스 컵에 13~18g의 단백질을 담을 수 있다. 배고픈 사람들이 더 큰 포만감을 느낀다. 무지방 제품의 경우 콜레스테롤과 당분이 적어 식사 조절을 하거나 체중을 줄여야 하는 많은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이다.


▎현재 페이스대로라면 매일 6만 마리 가량의 소가 계속 우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주문이 급증하고 또 급증했다. 큰 돈이 드는 광고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순간부터 판매가 아니라 생산이 중요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그가 말했다. 대다수 식품추세와 마찬가지로 초바니는 주로 해안지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뒤 뉴욕지역에 이어 동해안으로 퍼져나가 중서부와 서부에 안착했다.

지난 수년간 초바니는 공장을 신설하고, 생산라인을 새로 증설하고, 추수감사절·성탄절·설날을 포함해 1년 365일 하루 24시간 공장을 가동하며 생산 확대에 힘써 왔다. “우리는 무엇 하나 외부업체에 맡기지 않았다. 제품이 내게서 고객들에게 건네질때까지 전 과정을 통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했다.

뉴벌린 공장의 생산능력이 주당 5만5000상자 안팎에서 200만 상자에 육박했다. 아이다호주 트윈폴스에 3억5000만 달러를 들여 새로 지은 공장도 2012년 12월 문을 열었다(뉴벌린 공장의 두 배 규모). 보이시 남동쪽 약 210km 거리에 있는 주민 4만4000명의 도시다.

터키말로 양치기를 뜻하는 초바니는 목가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킬지 모르지만 사실상 대단히 기계화된 과정이다. 공장견학을 안내했던 책임자 데이브 크리스첸슨은 항공기자재 회사 출신이다. 크리스첸슨의 안내로 돌아본 공장 시설 중 일부는 기존의 낡은 공장 위에 대충 지어 올렸다. 매일 탱커 트럭 70대 분량의 우유가 들어온다. 대부분 뉴욕주의 농장에서 공급된다(나머지는 펜실베이니아와 버몬트주). 줄지어 늘어선 스테인레스 스틸 통에 과일이 채워진다.

복잡 기괴한 자동화된 장치가 컵에 외피를 씌우면 내용물을 담는 공정으로 이동한다. 두 줄의 사출구(하나는 과일용, 다른 하나는 요구르트용)에서 컵에 내용물을 쏟아낸다. 그 결과물은 놀랍다. 초바니의 뉴벌린 공장에서 매주 1만2700t의 우유가 200만 상자의 요구르트로 만들어진다. 2012년 그 공장에서 사들인 우유는 총 57만1500여t. 2011년보다 50% 이상 증가했다. 현재 페이스대로라면 매일 6만 마리 가량의 소가 계속 우유를 만들어내게 된다.

많은 경제 분석가들이 제조업에 애착을 갖는다. 제조업이 경제 활성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 같은 농촌 지역은 도시의 경제성장을 돕는 창의적인 계급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가 37㎞ 떨어진 오네온타에 있다. 그리고 초바니의 창의적 직원들(마케팅과 홍보담당자들)은 뉴욕시에서 근무한다.

대다수 다른 생산시설과 마찬가지로 공장은 고도로 자동화됐다. 하지만 고용효과는 뉴벌린을 넘어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까지 미친다. 설비를 구축해 제품을 만들기 시작하면 연관 업체들도 따라서 생산시설을 가동하게 된다. “우리는 컵을 전혀 만들지않다가 10억 개나 생산하게 됐다.” 미시건주 칼라마주에 있는 패브리-칼의 마이크 로더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말했다. 1000명 가량의 직원을 둔 비공개 기업인 패브리-칼은 뉴벌린 공장에 컵을 납품한다. “우리가 60년간 해온 사업에 비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요즘은 사회학자들이 이른바 게젤샤프트(이익사회)라고 부르는 비인간적이고 글로벌화된 경제의 시대다. 하지만 울루카야는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의 열성적인 추종자다(최근 콜게이트 대학에서 그가 받은 명예 학위는 경제학이 아니라 문학이었다). 비즈니스는 사람들 간에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초바니는 국가적 산물이며 홈데포나 맥도널드 같은 글로벌 대기업과 함께 미국 올림픽 대표팀 스폰서다. 그래도 변함없이 소읍 뉴벌린(인구 1146명) 주변의 언덕과 계곡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초바니가 들어서기 전에도 “일자리는 있었지만 먼 거리로 출퇴근해야 했으며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테리 포터 뉴벌린 시장이 말했다. 그는 초바니에서 일했던 지인 10여명의 이름뿐 아니라 초바니의 설비 건설과 유지관리를 주업으로 하는 조경·굴착·건설 회사들을 열거했다. “그들은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했다.” 쌓여있던 부동산 매물들이 소진되고 있으며 흉물이었던 건물 두 채도 팔려 수리된 뒤 외지에서 온 초바니 직원들에게 임대됐다고 포터는 전한다. “시내에 차가 막힌다는 소리도 들린다”고 포터가 말했다.

뉴벌린과 아이다호에 생산시설을 구축할 때까지 초바니는 농촌 지역 공장들에 7억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지역경제에 현금이 유입되고 지역 기업들에 안정적인 일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울루카야는 보람을 느낀다. 사무실 창문 밖 안전모를 착용한 일단의 작업자들을 가리켰다. “아버지와 아들 셋으로 이뤄진 4부자 전기 기술자 팀이지요. 우리 공장에 근무한 지 5년 됐어요.” 납품업체와 하청업체 대다수가 소들과 마찬가지로 회사 반경 80㎞ 이내에 위치한다.

초바니에 우유를 공급하는 소의 90%가량이 고렐 패밀리 농장에 있다. 농장은 공장에서 몇 ㎞ 떨어진 구릉진 72만8000여㎡ 부지에 자리잡았다. 마이크 고렐(33)은 4자녀와 함께 내게 농장을 안내했다. 고렐이 우유를 생산해 뉴벌린 우유협동조합에 판매하면 조합이 생산량의 75%를 초바니에 공급한다. “전에는 우유가 어디로 팔려나가는지 전혀 몰랐다”고 그가 말했다.

실제로 초바니는 이들 지역에 짙게 배어있던 일종의 기업 가족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후반에 이곳에 자리잡았던 옛날 기업도시 같은 측면이 있다. 당시엔 운하, 증기기관차, 전기가 농촌지역을 산업지대로 탈바꿈시켰다. 데이브 크리스첸슨 공장장이 성탄절 날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날 공장에 나와 일해야 했던 근무자들을 위해 울루카야가 최상급 쇠갈비를 들고 찾아왔다.

그뿐 아니라 지역사회 공헌활동도 한다. 초바니가 20만 달러를 기부한 뒤 하청업체들을 끌어들여 초바니 챔피언스 필드를 지었다. 고급 덕아웃, 관람석, 방송실, 그리고 조명을 갖춘 소규모의 울타리 처진 야구장이다. 제대로 된 야구장이 없어서 리틀리그의 꼬마 선수들이 차를 타고 지역을 돌며 모든 경기를 원정으로 치러야 했던 마을에 절실히 필요했던 시설이었다.

결론적으로 거의 빈손으로 미국에 건너 온 이민자가 큰 돈을 벌어 야구장을 짓고 올림픽까지 후원하게 됐다. “식품박람회에 우리 부스를 설치했을 때 기업 인수합병 전문가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고 그가 말했다. “그런 시스템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대기업들도 인수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아직 시민권을 받지 못한 울루카야는 회사 경영권을 넘길 생각이 없다.

물론 생각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초바니의 분위기가 목가적이고 훈훈하지만 요구르트 사업은 여느 사업과 마찬가지로 힘들고 골치 아프고 까다롭다. 농민이 유기농 요구르트를 통째로 픽업 트럭에 실어 농산물 시장에 내다파는 장사와는 거리가 멀다. 젖소는 풀을 먹고 우유를 생산하지만 냄새나는 부산물 즉 거름도 만들어낸다.

여과 요구르트 제조과정에서 나오는 산유청(acid whey)이라는 찌꺼기가 환경에 해로울 수 있다. 초바니 공장을 드나드는 대형 트럭들은 2차선 시골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달려야 한다. 그리고 초바니의 상승세에 따른 혜택이 모든 기업에 골고루 돌아가지는 않았다. 목장주 마이크 고렐은 초바니의 등장으로 자신이 생산하는 우유 가격이 오른 건 아니라고 말한다.

“힘들었다. 원가는 높은데 가격은 오르지 않는다”고 그가 말했다. 경쟁도 문제다. 다농·크래프트 외에 여러 경쟁사가 시장에서 초바니를 강력히 견제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만한 두뇌와 힘을 갖고 있다. 뛰어난 성장기업은 모두 도중에 장애물을 만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초바니는 변함없이 기세 등등하게 독자행보를 계속한다. 여느 기업가들처럼 울루카야는 어느 정도 전도사나 다름없다. 아직 여과 요구르트의 복음을 충분히 전도하지 못했다. 아이다호주의 신축 공장은 생산능력을 배로 늘리는 중이다. 초바니는 소비자들에게 아침식사용으로 진하고 그렇게 달콤하지 않은 유제품의 장점을 설득시켰다.

지금은 하루 내내 요구르트를 즐기게 만드는 전략을 모색 중이다. 스낵 사이즈 컵, 더 단 맛(초콜릿이 가미된 커피), 피스타치오 칸을 따로 만든 용기 등을 선보인다. 게다가 세계로 눈을 돌리면 개척할 시장이 넓다. 초바니는 뉴욕산 요구르트를 영국에 수출한다. 2011년에는 호주 유제품 생산업체 비드 푸즈를 인수해 2012년부터 오세아니아에서 초바니 요구르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울루카야는 회사를 계속 이끌어나감으로써 미국의 기업 엘리트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보낸다고 믿는다. “월스트리트, 그리고 이어 앱과 ICT(정보통신기술)를 모두가 선망하는 산업으로 만들었듯이 우리는 제조업을 쿨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스탠퍼드 대학을 중퇴하거나 샌프란시스코 또는 시애틀에 가야만 근사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벤처 창업은 이런 시골마을에서도 가능하다.”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 기술(인터넷 등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컴퓨팅 자원을 공동 이용하는 시스템) 덕분에 첨단기술 분야에서 개인도 거대기업과 경쟁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제조업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 미시건주의 자동차 공장을 부활시키든, 애리조나주의 학교 지붕에 태양 전지판을 깔든, 뉴욕주 북부에서 요구르트를 만들든, 뭔가를 만들어내는 단순한 행위가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은행가와 투자자들은 인스타그램이나 텀블러(마이크로블로깅 서비스) 같은 수입 적은(또는 수입 없는) 기업들에 눈독을 들인다. 하지만 초바니의 성공으로 그들이 전통 제조업체의 평가방식을 재검토하게 될 전망이다. 전자상거래 플랫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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