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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3大 실리콘밸리를 가다②독일 드레스덴 - 폐허가 된 도시에 핀 첨단 과학의 꽃 

 

백승아 월간중앙 기자
막스플랑크·프라운호퍼 등 세계적 연구기관 위치…1200개 기업 밀집한 반도체 클러스터 경쟁력 막강

▎독일 드레스덴 북쪽 지역에 위치한 ‘미나폴리스.’ 응용과학연구소인 프라운호퍼연구소 두 곳과 창업인큐베이터인 ‘나노센터’가 들어서 있다.



독일 남동부의 작은 도시 드레스덴. 과학비즈니스벨트의 성공모델로 평가받는 이 첨단과학도시는 도심의 고풍스러운 건물 덕분에 예술도시의 이미지가 더 짙게 풍긴다. 하지만 도시 외곽으로 가면 양상이 달라진다. 구시가지에서 지하철을 타고 북쪽으로 20분쯤 나가자 전혀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드레스덴 공항과 가까운 이곳은 현대식 건물들이 작은 단지를 이룬 미나폴리스(Minapolis)다. 독일 최대 응용과학기술연구소인 프라운호퍼연구소와 창업센터‘나노센터(Nano Center)’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마이크로 전자·나노 기술을 응용해 제품을 개발·생산하는 벤처기업들에 사무실과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일종의 ‘창업 인큐베이터’인 나노센터에는 현재 20개 기업이 입주해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동양인들도 눈에 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국적과 인종이 그만큼 다양하다. 지난해부터 나노센터에서 일하는 한태영(39)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6월 나노다이아몬드를 활용한 의료기기 개발업체 ‘누가랩(Nuga-Lab)’을 창업한 그는 8명의 동료와 함께 이곳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한국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독일 유학길에 오른 그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전자공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후 2009년부터 독일 최대 응용과학기술연구소인 프라운호퍼 비파괴평가연구소(IZFP)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지난해에 동료들과 함께 누가랩을 창업했다.

그는 두 개의 명함을 가졌다. 누가랩의 이사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비파괴평가연구소의 연구원 신분을 앞세운다. 그의 동업자인 유겐 슈라이버 누가랩 대표도 마찬가지다. 비파괴평가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한 그는 은퇴한 지금도 CEO이기 이전에 연구원으로서 비파괴평가연구소와 협력한다. 공공연구기관 부소장 출신이 이제 막 걸음을 뗀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민간기업의 직원이 공공연구기관에 동시에 속한 구조가 낯설게 비친다. 하지만 이곳 드레스덴에서는 연구소와 기업간의 협력은 물론 연구원들의 이동이 자유롭다고 한다.

대전광역시 면적의 3분의 2 규모인 드레스덴은 공공연구기관과 기업, 교육기관이 유기적으로 잘 결합돼 있는 도시다. 미나폴리스(MiNaPolis)로 불리는 도시 북쪽 지역에는 나노센터와 프라운호퍼연구소가 있고, 매트폴리스(MatPolis)로 불리는 동쪽 지역에는 신소재 분야의 연구소와 기업이 들어서있다. 또 남쪽 지역에는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막스플랑크연구소와 재학생이 3만5000여 명이나 되는 독일 최대 규모의 기술대학 드레스덴 공대가 자리한다. 프라운호퍼연구소·막스플랑크연구소 등 공공연구기관도 19곳이나 된다.


▎슈라이버 누가랩 대표가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개발 중인 제품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나노센터에는 누가랩과 같은 기업 20곳이 입주해 있다.
기초과학부터 응용과학까지 고른 연구가 핵심

미나폴리스에는 두 곳의 프라운호퍼연구소가 있다. 나노센터를 중심으로 비파괴평가연구소와 광학마이크로시스템연구소(IPMS)가 차례로 들어섰다. 각 건물은 복도를 따라 하나로 연결된다.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응용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드레스덴에만 모두 11곳이 있다.

이들 연구소는 작센주와 드레스덴시로부터 연구비의 3분의 1을 지원받고, 나머지 비용은 ‘계약연구’를 통해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는다. 나노센터에 입주한 기업은 물론 드레스덴에 있는 인피니온지멘스 등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이 모두 이들의 연구 파트너다.

프라운호퍼연구소가 매년 기업과 협력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3억5000만 유로(4990억원)에 이른다. 슈라이버 누가랩 대표는 “프라운호퍼의 경쟁력은 학문을 위한 연구에 그치지 않고 이를 비즈니스로 연결시키려는 철학에서 비롯된다”며 “기업과 효율적인 업무 파트너십을 맺어 능동적으로 연구에 참여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한다”고 말했다.

드레스덴 남쪽에 위치한 막스플랑크연구소(Maxplanck Institute) 분위기는 프라운호퍼연구소와 사뭇 다르다. 물리·화학 등 기초과학 연구 중심인 이곳에는 실험실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기자가 방문한 5월 24일은 막스플랑크 복잡계물리연구소(MPI-PKS)에서 학술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이곳에서는 해외 석학과 연구원이 모이는 학술대회와 세미나가 빈번히 열린다. 라이 도 복잡계물리연구소 연구원은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는 주로 인류 발전을 위한 기초과학 연구가 이뤄진다”며 “해외 석학을 초빙해 지식 교류의 장을 열고, 미래의 연구 비전을 공유하는 것도 이곳의 과제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전 세계에 80개 연구소를 둔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작센주와 드레스덴시로부터 연구비를 100% 지원받는다. 드레스덴에는 복잡계물리소를 포함해, 화학과 생명과학 등 3곳의 연구소가 있다. 1992년 설립된 복잡계물리소는 물리학 연구의 산실로 평가받는다. 연구원 수는 170명으로, 이 중 절반은 외국인 출신이다.

프라운호퍼와 비교해보면 기업과 직접적인 교류는 적은 편이다. 대신 연구원 간의 협업이 활발하다. 가령 복잡계물리소소속 연구원이 화학연구소와 함께 팀을 이뤄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식이다. 라이 도 연구원은 “최근 들어 이런 양상은 더욱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다른 연구소와 교류도 활발하다. 막스플랑크 복잡계물리소 출신인 외르크 오피즈는 2007년 프라운호퍼 비파괴평가연구소(IZFP)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연구원인 동시에 연구소가 개발한 기술을 필요한 기업에 접목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드레스덴 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유학한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드레스덴에 돌아와 복잡계물리소에서 기초과학연구를 수행해왔다.

그러던 중 IZFP와 공동연구 기회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응용과학 분야 연구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기초과학이든 응용과학이든 분야별 벽이 없는 게 드레스덴의 경쟁력”이라면서 “유연한 연구환경이 좋은 연구성과를 낼 수 있는 기초”라고 말했다.




조세 특혜 등 전략이 기업 참여 이끌어

최고의 연구환경도 이곳의 자랑거리다. 라이 도 연구원은 막스플랑크연구소가 세계 최대의 연구소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창조적인 연구환경 덕분이라고 말한다. 실제 이곳의 연구원들은 논문 같은 실적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단시간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해도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거나 여러 분야가 접목된 연구를 수행할 경우 수 년이 걸리더라도 지속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연구원들이 연구에만 매달릴 수 있는 창조적 환경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물론 연구에 대한 평가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가절차가 까다롭다. 해당기관과 연구를 수행하지 않은 석학 연구자들이 평가위원회로 참여해 연구원들의 연구를 해마다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연구소장 선임도 마찬가지다. 심사대상 인물 중심으로 평가위원회가 별도로 구성되고, 공개 심포지엄을 통해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공개 검증할 수 있는 심포지엄이 열린다.

기초과학부터 응용과학에 이르는 고른 연구는 과학도시로서 드레스덴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막스플랑크연구소를 중심으로 기초과학 연구가 활성화되자 해외 곳곳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이주는 지역 살림에도 보탬이 된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이 비즈니스 창출로 이어지자 도시 경제력은 크게 성장했다.

53만 여명에 이르는 드레스덴시의 인구 중 연구 인력은 1만5000여명이나 된다. 대학교수와 과학자 등 고급 인력 노동자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에 이른다. 그 결과 드레스덴은 정보통신(IT) 부문 유럽 1위, 기계부품과 나노 재료 부문 독일 1위의 강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드레스덴이 이처럼 유럽을 대표하는 과학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폐허, 통일 후 찾아온 경제위기 등으로 오랫동안 침체를 겪었다. 하지만 1992년 막스플랑크 복잡계연구소가 설립되고, 연구기관들이 하나둘씩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도시 분위기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드레스덴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8%에 달한다. 2001년 이후 인구 1인당 구매력도 7% 이상 증가했다. 그 덕에 드레스덴은 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뜻에서 ‘실리콘 색스니(Silicon Saxony: 실리콘밸리와 작센주의 영어명 색스니의 합성어)’라는 별칭도 얻었다.

이러한 성공과정에는 드레스덴시와 작센주, 연방정부의 역할이 컸다. 디르크 힐버트(Dirk Hibert) 경제부시장은 “연방정부와 작센주, 드레스덴시 정부가 협력해 기업의 투자를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곳에 투자하려는 회사들이 2~3주 안에 관련 절차를 마칠 수 있도록 돕고, 작센주 정부는 기업과 연구기관의 설립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작센주 정부 1991년 이후 23억 유로(약 3조400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조세 특혜로 기업 투자를 유인했다.

그 결과 1994년 지멘스가 테크노파크를 조성하며 이곳에 반도체 생산·연구시설을 세웠다. 이어 인피니온·모토로라·AMD 등 첨단 반도체회사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현재 드레스덴에는 1200개 이상의 첨단 과학기술기업이 가동 중이다.

드레스덴시는 과학분야 인재양성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에도 힘쓴다. 청소년 과학체험 프로그램 ‘주니어 닥터’가 대표적이다. 2006년 드레스덴이 ‘독일과학진흥기부자협회가 선정한 과학도시’로 뽑히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과학 꿈나무 양성을 위해 마련됐다.

이 프로젝트에는 드레스덴 공과대학를 비롯해 카를 구스타프대 병원 등 25개 이공계 대학과 연구소에서 매년 과학자 30명이 참여한다. 공교육 과정에 과학교육의 비중을 늘린 것은 물론이다. 드레스덴의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통해 나노공학 등 전문분야의 지식을 어려서부터 습득한다.

전체 외국인 인구 중 전문가 비율 높아

이런 노력 때문일까? 드레스덴 공과대학은 최근 몇 년 새 독일 내에서 최고 공과대학으로 우뚝 섰다. 공공연구기관들과 활발한 연구 협력이 밑거름이 됐다. 드레스덴 공대의 박사과정 학생들은 라이프니치연구소, 막스플랑크연구소 등에서 기존 연구원들과 함께 공동연구를 수행하기도 한다.

다양한 인턴십 프로그램은 학부생들의 연구 참여를 돕는다. 2009년부터 라이프니치연구소에서 재료공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유학생 김진영 씨는 “드레스덴 공대에는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학생들의 연구 참여를 돕는 요인 중 하나”라 했다.

드레스덴 공과대학이 가진 디플롬(Diplom) 학제도 드레스덴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독일 대학이 미국식 학제시스템을 도입한 것과 달리 드레스덴 공대는 학사와 석사과정이 통합된 옛 독일 대학의 학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캠퍼스에서 만난 도시공학 전공생 요헨은 “베를린 출신이지만, 보다 깊이 있는 공부가 가능한 이곳의 학제 시스템이 좋아 드레스덴 공대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공공연구기관·기업·교육기관 간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자 해외 연구원은 물론 유학생의 유입도 증가한다. 현재 드레스덴에 거주하는 외국인 비율은 전체 인구 중 4.5%에 이르며, 국적은 100여 개국으로 다양하다. 이는 옛 서독의 도시들에 비하면 적은 비율이다. 하지만 타 도시들이 이민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반해 이곳은 연구원·과학자 등 전문인력의 비율이 눈에 띄게 높다.

드레스덴시는 앞으로 국제화되는 도시에 발맞춰 외국인 연구원들을 위한 정주여건 조성에 더욱 힘쓸 계획이다. 디르크 힐버트 드레스덴 경제부시장은 “연구기관과 기업, 학교마다 ‘웰컴오피스’를 세워 거주·교육 등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시스템’을 조만간 도입할 예정”이라면서 “산업·연구기관·대학의 조화가 일궈낸 과학도시의 국제화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201308호 (201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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