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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 - “ 중국 중시하는 박근혜 국제감각은 탁월한 것” 

‘정글만리’의 작가 조정래 

한기홍 월간중앙 기자 사진·오상민 기자
중국인의 DNA에 흐르는 유구한 문화의 저력 무시할 수 없어… 소프트파워로 세계 제패 꿈꾸는 중국 신(新)패권주의 잘 활용해야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장편소설 <정글만리>를 통해 G2 시대 중국의 위상과 활용론을 개진한 작가 조정래. 사진 속 공간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그의 자택 집필실이다.



작가 조정래(70)의 소설 <정글만리>가 10월 14일 현재 판매 70만 부를 돌파했다. 인문학과 문학 서적이 2천∼3천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극심한 출판계 불황을 감안하면, 70만 부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판매 부수다. 금년 1월부터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연재돼 6개월 만에 탈고된 이 소설이 이토록 강한 흡입력을 보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1천만 회가 넘는 누적 조회수를 보일 때 어느 정도 돌풍을 예감하긴 했지만, 바로 그 엄청난 조회수 때문에 종이책 판매는 크게 기대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바로 그 대목을 물었다. 조씨 역시 인터넷 연재가 책 판매에 미칠 영향이 궁금했다고 한다.

“아들이 그랬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접속해 읽었으니 종이책 판매는 크게 기대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요. 출판사 사람들의 예상은 달랐습니다. 완독한 사람들은 극히 적을 것으로 보고 있더라고요. 전업주부 등을 제외하곤 일반인들은 거의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란 분석이었어요. 완독율이 0.1%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 봤던 겁니다. 포털 사이트 연재와 종이책 판매라는 연계기획이 결국 성공한 것이라 자평합니다.”


<정글만리>의 첫 장인 ‘깨끗한 돈, 더러운 돈’이 열리는 공간은 중국의 경제수도 상하이의 국제공항이다. 한국에서 의료사고를 치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도망치듯 중국으로 건너온 성형외과 의사 서하원과 그를 돕는 상사맨 전대광이 등장한다. 도입부부터 작가는 중국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그들이 얼마나 ‘멘쯔(체면)’를 중시하는 나라이며, 국제공항조차 얼마나 시끌벅적한 소음으로 가득하며, 빈부 간의 격차가 까마득한 나라인지를 묘사하면서 말이다.

중국에 대한 한국인 고정관념 해체한 소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한국인들이 품어온 중국에 관한 고정관념은 하나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작가는 중국이 우리보다 더 빠른 고속철을 손수 만들어내고, 100층이 넘는 최신식 고층 빌딩을 척척 지어 올리며,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나라이며, 우리나라 인구보다도 많은 2억 명의 중산층을 지닌 경제대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든다.

이 노 작가의 중국 오디세이는 물론 수많은 중국 관련 전문서적을 제치고 현존하는 최고의 ‘중국입문서’로 자리 잡았다. 10월 15일 현재 9주째 베스트셀러 1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30만∼40만 부 판매에 머물며 10위권 밖으로 쳐진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조씨는 1983년부터 <현대문학>과 <한국문학>에 <태백산맥>을 연재하기 시작, 1989년 원고지 1만6500매 분량의 대작을 완성했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두 번째 대작에 도전, 1990년부터 다시 <아리랑>을 집필하기 시작해 1995년에 탈고했다. 2만 매 분량이었다.

3년 뒤인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1만5000매 분량의 <한강>을 썼다. 20년 가까이 ‘글감옥’에 살았던 것인데, 그는 그 감옥이 황홀했다고 말했다. ‘황홀한 글감옥’에 살았다니 글쟁이로서 큰 행복을 누린 셈이다. 그가 이룬 성취는 대단한 집중력과 엄격한 자기관리, 작가적 사명감과 소명의식 없인 이룰 수 없는 위업이다.

그는 <태백산맥> 연재 이후 30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청탁불문 두주불사, 밤새 마시던 젊은 시절의 술버릇을 깨끗하게 청산했다. 집필 중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사람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남도의 예인에게 그 점은 아마도 적지 않은 고통이었으리라. 그가 <태백산맥>을 쓰느라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아리랑> 집필 때는 오른팔과 손가락이 마비돼 침을 맞아가며 썼고, <한강>을 끝내고 대수술을 해야 했던 이유는 너무 오래앉아 있어 탈장이 생겼기 때문이다. 30년간 금주했다는 건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 채근해 물었더니 그 실상을 고백했다.

“저녁 술자리를 딱 끊은 건 맞아요. 그런데 반주는 더 열심히 했어요. 47도짜리 안동소주에 수삼을 넣어 우린 인삼주를 밥 먹을 때 한 잔씩 했지요. 그야말로 약주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장수한 이유 중의 하나가 좋은 술로 반주했기 때문이랍니다. 특히 생선 먹을 때 한 잔씩이 좋아요. 독하게 한 잔 먹고, 깨끗하게 깨는 반주로 오히려 술을 절제하는 습관을 들였어요.”

그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운동을 즐겼고, 특히 역도를 통해 근육질의 몸매를 다듬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잘 발달된 이두박근과 임금 왕(王) 자가 또렷한 복근이 인상적이다. 매끈하고, 날렵하고, 강인한 육체다.

목표를 향한 매진의 정신이 강렬하고, 투철하게 계획된 삶의 사이클을 지속하는 데는 거의 달인의 경지다. 건강 유지에 대한 관심은 ‘과도한 집착’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가 밝힌 향후 10년간의 집필 계획을 보면 그 오해가 풀린다. 도대체 건강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목표다.

조씨는 <정글만리> 서문에, “이제 세 권의 소설을 마친다. 다시 새 작품을 향해 새 길을 떠날 짐을 꾸려야겠다”고 적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장편 1권짜리 두 편, 3권짜리 두 편, 단편집 하나, 산문집 하나를 펴낼 계획이다. 그가 쓰는 ‘글월의 장강’이 흘러 도대체 언제 바다에 이를 것인가? 육체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가 결코 붓을 꺾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드는 것은, 절륜한 그의 건강과 함께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의 작가 본능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일상을 방불케 한다는 그의 하루가 궁금해 좀 자세히 보여주기를 청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의 하루는 “나약한 문인이 될 수는 없다”는 청년 시절의 각오가 실천을 통해 압축되고 압축된, 하나의 격자 속 정물화와 같은 시간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는데 한 번도 누가 깨워서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7시에 아침식사, 12시 30분에 점심식사, 오후 6시 30분에 저녁식사를 합니다. 박정희 정권 때 누구나 익숙했던 국민체조를 열심히 하고요, 소식과 채식 원칙을 철저히 지킵니다. 식사 시간은 1시간 30분, 숟가락을 절대 쓰지 않고 젓가락으로만 밥알을 세듯 천천히 먹습니다.

태백산맥을 쓸 때는 하루 200자 원고지 35매, 이번 정글만리를 쓸 때는 25매를 썼습니다. 정글만리 연재 6개월 동안 하루도 어기지 않았고요. 규칙적인 등산에, 젊은이도 따라오기 어려울 만큼 속보로 걷습니다. 한 번 정한 원칙은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삶의 철칙으로 삼고 있어요.”

그의 계획은 늘 장기적이다. 중국에 관한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한 것도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이었으니 이미 20년 전의 일이다. 그가 중국에 천착한 것은 중국의 5천 년 역사가 일궈낸 문화적 저력과 함께, 중국인의 실사구시적 경제본능과 기업가정신이었다. 진보적 언론인 고 이영희가 ‘마오쩌뚱 방식 중국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했다면, 조씨는 연암 박지원이 당대의 청나라를 바라본 바로 그 시각, 중국의 경제적 역동성과 거대한 잠재력에 주목했다.


▎1 초등학교 4학년 때 벌교상고 운동장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 조정래. 2 벌교북초등학교 6학년 때 순천 선암사에 수학여행을 가 5, 6학년 담임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이 5학년 때 담임 김기상 선생, 오른쪽이 6학년 때 담임 한규필 선생이다.




▎1990년 대하소설 <아리랑> 집필 취재를 위해 중국 옌벤조선족 마을을 찾아 버스로 이동 중인 조정래.
중국 노동자들의 DNA 안에 흐르는 유구한 중국문화

지난 2천 년간의 세계 경제사를 돌아볼 때 중국은 무려 1800년간이나 GDP 1위 국가를 유지했고, 그 지위를 빼앗긴 세월은 200년에 불과했다고 본다. 미국과 중국, 즉 G2 체제로 세계의 패권지도가 재편되었지만, 중국이 G1의 국가로 도약할 시기를 그는 아주 짧게, 10년 안에 도래할 것으로 설정한다. 그는 고대 중국의 탑 이야기로 그 저력을 설명했다.

“1500년 전 중국의 주요 도시에 건설된 거대한 탑을 보세요. 그 높이가 60∼80m에 달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100층 짜리 초고층 마천루입니다. 당시 그런 문명을 조직적으로 건설한 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 문명은 단절됐지만 중국문명은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 탁월한 문명의 설계와 장인적 DNA는 100년도 안 되는 사회주의 실험으로 단절되지 않는다고 저는 봤던 겁니다.

지금 상하이·광저우·텐징·칭따오에 건설되는 엄청난 물질문명을 한번 보세요. 20년 전 중국의 도로 포장률은 5%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역전되어 포장되지 않은 도로가 5%에 불과합니다. 중국 노동자들의 DNA 안에는 중국의 유구한 문화가 스며 있어요. 그 저력을 무시해선 안됩니다. 선악의 차원을 떠나 지구 문명의 대전환을 이미 중국이 감지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왜곡된 중국, 중국인 관이다. 아니 왜곡보다 더 위험한 것은 피상적 시각이다. 왜곡은 의도적인 것이지만 피상적 시각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므로 수정이 더 어렵다고 보는 듯하다. 부분적인 사실을 전면의 진실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한국인의 대표적인 중국관은 3가지로 요약된다. 중국은 짝퉁 천국이고 중국인은 게으르며 지저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굴절된 중국관의 소유자로 규정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직후 미국을 가장 먼저 찾았습니다. 2008년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임기 말 레임덕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것이 하나도 급할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해 대선에서 오바마가 승리해 정권이 교체되면서 부시와의 만남이 요식적인 것이었다는 게 드러났죠. 이 대통령은 미국 다음으로 취임 두 달 만에 일본을 방문해 천황을 만나는데, 그때 공개된 사진이 가관 아닙니까? 천황은 뻣뻣하게 서 있고 대통령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장면입니다. 제가 하도 기가 막혀 그 사진을 코팅해서 보관하고 있어요.

이명박 정부 내내 한·중관계는 굉장히 좋지 않았고, 당연히 남북관계도 경색을 피할 수 없었던 겁니다. 4대강사업 등 내치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의 더 큰 실책은 미국 중심의 일방외교였어요. 세계의 패권이 G2 체제로 재편되고 있다는 걸 애써 무시하고 눈감아버린 거죠. 이 대통령의 중국관이 피상적이고 왜곡돼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조정래식 중국관에 의거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외교 행보는 평가할 만한 것이다. 그는 신임 대통령이 미국 다음으로 일본을 먼저 방문하는 관례를 깨고, 중국을 먼저 방문한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본다. 일본 정부의 그간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한·일관계가 후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박 대통령이 한·중관계를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베는 아마도 한·중 양국이 연합하여 일본을 배척하는 구도를 형성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 중·일 외교에 대한 조씨의 평가가 궁금했다.

“아베의 정상회담 제의를 거절한 박 대통령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아베는 일본의 우경화를 선도하면서 정치적 이득을 꾀하고 있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이 그런 시도에 일침을 놓은 거예요. 실리 없고 진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정상회담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 그걸 꿰뚫고 있어요. 외교의 저울추를 평형상태로 맞춰 중국의 비중을 높이고 있는 건 참 잘한 일입니다. 그에겐 국제감각이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한·중관계를 든든히 해놓으면 그걸 지렛대 삼아 남북관계도 순조롭게 풀 수 있어요.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지난 6월 중국 방문 기간 동안 박 대통령은 칭화대 연설 등에서 중국 고전을 인용하며 중국문화에 대한 소양을 과시했다. 중국어 연설은 외교관례 등의 문제로 조율하기 쉽지 않은 주제였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칭화대 연설은 약 5분 동안 이어졌다. 그는 인사말에서 “이곳 칭화대의 교훈이 ‘자강불식 후덕재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자강불식 후덕재물(自强不息 厚德載物)’이란 말은 ‘쉬지 않고 정진에 힘쓰며 덕성을 함양한 뒤 재물을 취한다’는 뜻이다. 20여 분의 전체 연설 가운데 약 20%를 중국어로 소화했다. 방중 전부터 청와대는 연설을 한국어로 할지 중국어로 할지를 놓고 고민하다 ‘한국어에 중국어를 일부 곁들인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정글만리>는 조정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설이다. 이번에 그 목소리는 우리의 이웃에 있는 중국이 곧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며, 한국에게는 그것이 둘도 없는 기회이자 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경고다. 조정래는 소설적 상상력을 협소하게 만든다며 1인칭 소설을 비판해온 작가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늘 3인칭이다. 게다가 주인공이 한 명만 등장하는 소설은 드물다. <정글만리>도 장이 바뀔 때마다 다른 인물을 하나씩 비춘다.

중국 지식인, 미국식 ‘중국 패권주의’에 반대

이 방대한 소설에서는 중국의 상사맨 전대광과 김현곤, 베이징대 학생인 송재형과 연인인 리옌링, 일본 상사원인 이토 히데오와 도요토미 아라키, 동양계 미국인 사업가 왕링링과 한국인 건축가 앤디 박, 중국의 신흥부자인 리옌링의 아버지 리완싱 등이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나간다. 미국의 패권주의, 서양인의 편협한 중국관, 한·중·일 3국의 관계를 토로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다. 그러나 그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중국 바로보기’ 슬로건 안에는 만만치 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이른바 ‘중국 패권주의’의 문제다. 미국 패권주의가 문제라면 중국 패권주의 역시 문제가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물었다. “중국 정치 지도부가 전 세계적 차원의 패권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 지식인 사회의 저변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들은 미국식 패권주의의 파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군사적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기류가 역력합니다. 중국이 미국을 답습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사실 중국의 군사력은 미국의 10분의 1 규모에 불과합니다. 항공모함을 만들고 달 탐사를 시도하고 있지만 미국을 군사적으로 따라가기는 역부족이죠. 중국이 G1이 된다는 것은 경제적·문화적 차원이 될 겁니다. 중국 사람들은 하드파워보다 소프트파워로 세계를 이끄는, 인류 사상 유례 없는 패권국의 지위를 노리고 있어요. 이 같은 흐름을 우리가 지혜롭게 활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한·중 동반 번영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는 거예요.”

조씨는 2010년부터 중국 취재를 본격 시작했다. 100권에 가까운 국내외 중국 관계 서적을 읽었고 90권의 신문 스크랩을 만들었다. 중국에 8차례나 장기 체류하며 무수한 인간 군상을 만났다고 한다. 그 같은 노력을 통해 그는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보게 된 것이 값진 소득이었다.

“중국 사람들 한국인 칭찬이 대단해요. 성실하고 자질이 휼륭하다는 찬탄이죠.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그 사람들 표현을 빌면 ‘자대(自大)’의 경향이죠. 스스로를 크다고 생각하는 경향, 다시 말해 오만함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중국을 폄하하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깃들어 있어요. 칭따오를 중심으로 진출했던 한국 기업이 망해서 돌아온다는 보도가 많이 있었죠.

우리 언론은 그 책임을 대부분 중국 측에 돌렸습니다. 처음엔 공장 부지도 헐값에 내주고 법인세도 경감하더니 이제는 그런 혜택을 싹 거둬갔다는 식으로요.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면 지대와 임금과 세금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국 기업인들은 이익이 적게 나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조씨는 중국 사람들이 전 세계 시장을 제패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박리다매’ 전략을 꼽았다. 단위 당 이익이 적게 나도 많이 팔면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중국산 저가 상품’이란 표현 안에는 ‘저임금에 기반한 조악한 싸구려’라는 폄훼가 들어 있지만 중국인 특유의 무서운 ‘박리다매’ 전략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박리다매’야 말로 시대를 초월한 상술의 기본이며, 고품질의 추구와도 배치되지 않는 개념이다. 더구나 박리다매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니 경제 주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중국인들은 우리가 골머리를 싸매고 찾고 있는 창조경제의 원리를 복잡하게, 먼 곳에서 찾는게 아니라 가장 단순한 원리 속에서 발견하고 있다는 조씨의 지적이다.

“이익이 줄어드니까 한국 기업인들은 공장을 팽개치고 도망을 나오기도 합니다. 왜 도망 치느냐? 밀린 임금과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죠. 중국 사람들 무서워요. 잡을 수도 있지만 굳이 잡지 않는다는 겁니다. 도망가게 놔두고 공장과 시설을 중국인에게 공매하죠. 기술과 노하우를 금방 익히는 사람들이니까 공장을 인수해도 가동에 문제가 없어요. 중국에 가서 떼돈을 벌 생각보다 적은 이익을 참고 버티는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중국은 14억 인구의 시장이란 걸 한시도 잊으면 안 돼요. 가장 간단한 셈법 아닙니까?”

역시 작가는 직관적으로 접근하는 통찰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변화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인간의 선택을 강요한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묻는다. 그리고 평생 그가 추구했던 예술의 본질 속에서 한·중관계, 무역과 상호 교류의 일반원리를 추출하기도 한다.


▎1 조정래의 스승 미당 서정주 시인은 일제시대 친일 작품활동 문제로 조정래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2 빅토르 위고는 조정래가 사숙한 위대한 문호로 사회·역사의식을 문학성과 가장 조화롭게 형상화한 작가로 평가된다.




▎1 동국대 국문과 동문으로 캠퍼스에서 만나 결혼한 김초혜 시인은 문학적 교감을 나누는 동료이자 비평가이다. 2 1998년 중국 옌벤의 원로작가 김학철(가운데) 씨가 조정래를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스승 미당 서정주와 친일문학 문제로 갈등

“모든 예술은 상투성과의 싸움입니다. 이미 있는 것과의 싸움이지요. 심지어 자기의 것과도 싸워야 합니다. 10년 전, 작년, 어제의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작품과 싸워야 하는 것이죠. 자신이 이룩한 것이 그야말로 거대한 성채라 할지라도 그걸 깨부수는 용기가 있어야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어요.

중국에 대한 관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10년 전, 5년 전 중국관을 가지고 어떻게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게 중국이란 나란데….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의 성채’, 실체가 없는 자기중심적 중국 이해를 이젠 버려야한다는 겁니다. 제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런 메시지입니다.”

시인이자 그의 아내인 김초혜 선생과의 인연을 물었다. 조씨는 문단 내에서도 유명한 ‘공처가’로 통한다. 그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공처가를 넘어 ‘경처가’란 오래된 농담을 불러온다면, 그때의 ‘경’자는 ‘놀랄 경’이 아니라 ‘공경할 경’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대하소설 <한강>을 마치면서 작가의 말에 “내 소설 절반은 아내가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썼다.

김초혜 시인과의 연애과정과 영감을 주고 받은 문학적 동반자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장편소설 감인데, 두 사람 모두의 스승이기도 한 미당 서정주 시인은 그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 되어야 하리라.

조정래와 김초혜는 동국대 국문과 동문으로 학창시절 만난 캠퍼스 커플이다. 당시 대학생 김초혜는 이미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었다. 동대 국문과 교수였던 미당 서정주 시인이 김초혜의 시재(詩才)를 높이 사 그를 문단으로 이끌었다.

“아내 김초혜는 당시 국문과로서는 전국 제일로 꼽혔던 동국대 국문과의 통합문학서클 ‘동국문학회’의 최초의 여학생 회장이었습니다. 물방울무늬 플레어스커트에 흰 하이힐, 긴 머리에 얼굴이 하얗던 그가 좁은 동국대 캠퍼스에서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그에게 만년필을 빌려 말문을 트고, 링컨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해 환심을 샀지요.

펜촉으로 링컨의 얼굴을 극사실화로 그려나가기 시작했는데 날마다 조금씩, 이마의 주름 하나를 묘사하기 위해 눈썹보다 더 가는 선들을 수백 번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슬픈 듯 형형한 링컨의 눈을 표현하기 위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며칠씩 눈을 부릅떴습니다. 장편소설 20권을 읽을 시간을 그 그림 그리기에 투자한 겁니다.”

결혼 후 조정래 부부는 새해를 맞을 때마다 스승 미당을 찾아 세배했다. 미당은 아내를 등단시킨 스승으로 결혼식 주례도 섰다. 정초 미당의 집에는 수십 명씩의 세배객이 몰렸다. 미당은 특유의 느릿느릿한 전라도 말투로 조정래 부부를 세배객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어허 인사들 하시게. 여기는 장래가 아주 촉망되는 여류시인 김초혜 씨, 그리고 옆은 남편, 문청 조정래 군.” “미당 선생님은 술이 거나하게 취했지만 빈틈이 없었습니다. 김초혜는 시인이니까 ‘씨’이고, 조정래는 아직 문학청년에 불과하니 ‘군’이란 호칭을 붙인 겁니다. 저는 아내 덕에 기성 문인 20여 명과 동석해 술잔을 드는 ‘출세’를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미당 선생의 그 엄격한 차별은 제게는 수모이기도 했지요. 그런 차별을 무려 5년이나 겪어야 했습니다. 아내보다 5년 늦은 28세가 되어서야 소설가로 등단했기 때문이죠.”

가장 감동할 때조차 굴복하지 않는 것이 작가의 영혼

그 무렵 같이 등단한 작가가 조해일·윤흥길·황석영 등이다. 미당 선생과 조정래 부부는 둘도 없는 사제의 정을 맺었지만 ‘친일 행적’ 문제를 둘러싼 조정래와 미당의 갈등은 미당이 죽기 직전까지 끝내 해소되지 않았다. 일제의 민중 수탈사를 대하소설로 그렸던 <아리랑>의 작가로서, 조씨는 미당의 친일 행적에 눈감을 수 없었다. 문단의 거목이자 자신과 아내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조씨의 내면적 갈등은 더욱 깊었다. 그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4년부터 5년간 <한국문학>의 편집을 맡았을 때 일이 터졌습니다. 1985년 해방 40주년을 맞아 특집을 하나 기획했어요. 일제시대 친일의 글을 썼던 작가들에게 자신의 내면과 일제시대 당시의 정황을 고백토록 하는 기획이었습니다. 변명도 좋고 반성문도 좋고 어쨌든 친일 행적의 작가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같은 통과의례가 필요한 것 아닌가하는 취지에서 시작한 기획이었죠. 미당 선생도 당연히 포함되었습니다.

제가 미당 선생을 찾아가 말씀드렸죠. ‘선생님 변명도 좋습니다. 분량도 200장이건 300장이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만큼은 민족과 역사에 대하여 내가 죄인이니 속죄한다고 쓰십시오’라고요. 미당 선생은 대로해서 두 시간 동안이나 저를 꾸짖었습니다. 그렇게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어요. 제게 ‘너는 임마, 대학 시절부터 반골이었어!’ 하시며 꾸짖는데…. 폭포처럼 쏟아지던 분노를 접하고 어떠한 말로도 그분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일제시대 미당은 예컨대 ‘마쓰이 오장 송가’와 같은 시에서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른 우리의 하늘이여’라고 읊었다. 정작 조씨가 스승 미당에게 극도의 섭섭함을 느낀 것은 일제시대 때의 행적보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찬양과 옹호 발언 때문이었다. 미당은 작고하기 전 자신의 잘잘못에 대하여는 말을 아낀 채 “일제가 그렇게 빨리 패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솔직한 발언으로 볼 수도 있었으나 역시 대중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웠다.

“그때 선생이 제가 드린 말씀을 귀담아들으셨다면 지금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겁니다. 제가 만든 말 중에 ‘용서는 반성의 선물’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그때 잘못을 인정하셨다면 그분은 용서받았을 것이고, 지금 최고의 시인으로 존경을 받았을 겁니다. 허물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임종하시기 전 기자들이 병상을 찾아 친일 행적에 대한 소명을 듣고자 했지만 그분은 ‘어이 기자 양반들, 잘 좀 봐주시게’ 하시면서 끝내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위대한 시적 재능과 성취를 생각할 때 정말 안타까운 일이고, 제 가슴에는 하나의 큰 회한이나 멍울처럼 그분의 초상이 남아있습니다.”

작가 조정래는 평생 작품의 ‘형식’보다 ‘내용’을 추구했다. ‘어떻게 쓰느냐’보다 ‘무엇을 쓰느냐’를 고민했던 작가다.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며 문청 시절을 보냈다”는 젊은 작가들을 크게 일갈했던 것도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한 리얼리스트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청소년 교육문제가 다음 소설의 주제 될 것

최근 한국의 소설이 공동체의 운명에 눈 감은 채 왜소한 자아 탐구의 늪에 빠져 있는 것도 그에겐 걱정으로 남아 있다. 인간은 혼자일 수 없고 서로 관계를 맺는 존재이며 그 관계의 얽히고설킴이 사회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적 이야기들을 형상화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이 그의 작품론이다.

“저는 빅토르 위고와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사회·역사의식을 문학성과 가장 조화롭게 형상화한 모범적인 작가였기 때문이죠. 빅토르 위고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면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옹호한 작가였습니다. 그보다 더 값진 작가의 삶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에 파묻히거나 그늘에 안주해선 안됩니다.

무수한 작가의 작품을 섭렵하고 문학적 사숙의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 ‘예술적 스승’이란 뛰어넘고 극복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추월당하는 운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빅토르 위고에 감동했지만 저는 늘 그보다 더 잘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것이 만용일지라도, 그런 만용의 정신조차 없다면 작가가 될 수 없었겠지요. 스승이라는 우상을 파괴하고, 그들에게 가장 감동할 때조차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고유의 영혼이 있어야 하는 거죠.”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가를 물었을 때 조씨는 몇 년 전 집에 불을 질러 가족을 모두 사망케 한 중학생을 면회해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다음 작품의 주제는 청소년 교육의 문제가 될 것이란 암시다. 이 중학생은 사진 찍기를 좋아해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부모는 그에게 법관이 되기를 희망하며 공부를 강요했던 모양이다. 비극의 얼개에 청소년 교육의 문제가 첨예하게 얽혀 있다는 판단이다.

“작가는 시대의 산소·나침반·등불이라고 해요. 가장 첨예한 시대의 고통을 직면하라는 의미일 거예요. 얼마 전 손주가 다니는 중학교에 가서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시키는 거 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했어요. 부모가 강요하면 저항하라고 했더니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고함을 지르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주었어요. 그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억압을 받았나 알 수 있었어요.

이 소리를, 이들의 목마른 외침을 부모와 기성세대는 이제 경청해야 해요. 아이들을 좀 살리자, 이 말입니다. 이 학교는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모인 기숙학교인데 부모들이 매일 휴대폰으로 학습 지시를 내리는 모양입니다. 제가 그랬어요. 휴대폰을 확 꺼버리라고…. 진정한 스승이 사라지고, 학습지도사만 존재하는 학교를 이제 개혁해야 합니다. 그런 소설을 쓰고, 교육 개혁의 전도사가 한번 되어보고 싶어요.”

201311호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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